[Interview] 함께 읽는 일로부터 변화를 꿈꾸다 - '들불' 노혜지 대표

글 입력 2022.08.29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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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모두 은연중에 그것을 알고 있다. 무언가를 새롭게 알아간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내가 모른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한번 알기 시작한 사람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뿐만 아니라 매우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앎이 가져다주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기꺼이 알기를 택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다. 여성 독서 커뮤니티 ‘들불’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 가장 가까이 있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기에 들불은 독서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들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지는 햇수로 3년차, 회사 일과 들불 일을 병행하며 들불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노혜지 대표는 들불을 통해 함께 읽고 변화하는 ‘우리’를 상상한다. 더 나아가 바람에 번지는 들불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으키는 작은 변화의 바람이 모여 사회를 바꾸는 ‘공부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꿈꾼다.


지난 23일,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며 앎을 멈추지 않는 노혜지 대표와 대화를 나누었다. 용기를 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 그리고 함께하는 동료다. 들불은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노혜지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1년 동안 한 권을 읽어도 괜찮다, 어쨌거나 책을 읽었다는 건 일단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걸음을 뗀 것이다."


 

 

독서 커뮤니티, 들불

“들불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다뤄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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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의 노혜지 대표

 

 

들불은 어떤 곳인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들불은 여성 독서 커뮤니티입니다. 독서 모임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독서 모임뿐만 아니라 책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활동을 겸합니다.

 

 

들불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시작은 2015~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였어요.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기 시작하며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개념이 생소하기도 하고 혼자 하려니 막막해서 동료들을 모았습니다. 2017년에서 2018년 무렵부터 들불의 전신이 되는 독서 모임을 고정 멤버들과 꾸려 오다가, 2020년에 본격적으로 규모를 키워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들불’이라는 이름도 짓고 브랜딩도 맡기면서 지금의 들불이 되었습니다.

 

 

왜 시작이 책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책을 좋아하셨나요?


독서부 활동을 열심히 했던 고등학교 때, 사서 선생님께서 세상을 알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 책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하셨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시기에 정희진 선생님 강의를 들었는데 선생님도 공부가 진짜 중요하다고 말씀하셨고요. 공부를 하려고 단체 강연이나 활동을 찾아보기도 했는데, 제가 그 강연에 100퍼센트 참여할 수 있으려면 기본적인 토대가 먼저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 토대를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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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고정희 시인의 작품으로 진행했던 독서 모임 포스터

 

 

들불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들려주세요.


문학을 다룬 프로그램들이 기억에 남아요. 최근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분을 모시고 고정희 시인의 시를 읽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것도 무척 좋았어요. 많은 독자들이 문학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효용이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아요. 문학은 그저 감상하고 느끼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실제로 문학 안에도 운동성이 있어요. 예를 들어 앞서 말씀드렸던 고정희 시인의 경우 여성운동을 오랫동안 해왔고, 운동에 대한 신념이 작품 속에 단단하게 녹아 있거든요. 참여자들과 그런 부분을 함께 발견하면서 문학도 어떤 정치적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 정말 의미 있었어요.

 

 

그럼 들불의 터닝포인트가 된 프로젝트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회사가 사라졌다』로 진행한 프로젝트예요. 부당한 폐업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된 여성들이 노동운동을 하게 되며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문제가 해결되거나 상황이 더 나아졌는지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책이에요. 흔히 ‘노동문제’라고 하면 사람들은 주 몇 시간 일할 것인가, 최저임금은 얼마인가 같은 걸 주로 생각하잖아요. 그 책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들불에서 나누고 싶은 문제도 그렇거든요. 어떤 사안에 대한 전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좀 더 곁가지에 있다고 여겨지는 문제로 접근하고 싶어요. 지금 생각해야 한다고 다들 말하는 것 말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고요. 그 책을 통해 들불에서 구축하고 싶은 프로그램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게 있을까요?


예를 들어, ‘N번방 사건’을 다루고자 한다면 보통 사건의 피해자나 그 사건을 수사했던 분들에 대한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N번방이 도대체 왜 생겨난 것인가 근원적인 물음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성 산업을 더 알아보는 식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시에 『남자들의 방』이라는, 한국의 성 산업 문화를 되짚는 책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그 책을 통해서 N번방과 성 산업의 연결고리를 찾고, 우리가 왜 성매매 여성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집중하는 식이에요.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용기

“읽는 일은 두렵지만, 종국에는 용기를 향해 가는 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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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의 로고

 

 

들불을 성장시키며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사람을 모으는 게 일차적으로 어려워요. 저는 책을 통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일종의 세력화를 하고 싶거든요. 보통 여성단체나 환경단체는 공통의 목표가 뚜렷하기에 상대적으로 사람 모으기가 쉬워요. 그런데 독서 모임은 사회적인 성격을 띤다기보다 친목이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들불의 모임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다가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아는 게 없는데 참여해도 괜찮나 망설이시기도 하고요. 윤리적, 사회적으로 필요한 가치를 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책을 통해 모색하자는 슬로건이 생각보다 어렵고 너무 강하게 받아들여지는 듯해요.


또 하나는 지속성이에요. 저는 궁극적으로는 공부 공동체를 만들고 싶거든요. 예전에는 광장으로 달려나가 하나의 구호를 외치는 운동이 의미 있었다면, 현재는 온라인 광장이라는 곳에 모여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고 그에 맞는 연대를 꾸려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토대가 되는 게 공부라고 쭉 생각해 왔어요. 문제는 이런 공부에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취업에 도움도 안 되는데 지속이 가능하냐는 거죠. 안 그래도 바쁜 사람들을 공부하게끔 유도하는 방법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들불은 ‘여성 독서 커뮤니티’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데, 혹시 참여자의 범위를 확장하실 계획이 있나요?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기는 해요. 초창기에는 제한을 두지 않아서 남성 참여자분들도 계셨어요. 물론 좋은 분들도 계셨지만 제가 몇 차례 모임을 이끌며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었고,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어요. 저는 남성을 이 장으로 끌어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지금과 같은 방식이 너무 배타적인 게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도 있고요. 현재는 제가 사람들을 관리하는 데 너무 많은 품이 들것 같아서 성별 제한을 두고 있는데, 제가 사람을 관리하는 일에 좀 더 요령이 생기거나 다른 직원을 고용하게 된다면 모두를 위한 플랫폼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들불을 시작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들불에서는 굉장히 많은 일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 같아요. 대표님의 시간 관리법이 궁금합니다.


저는 체크리스트나 시간 계획을 따로 쓰지는 않아요. 그렇게 해본 적도 있는데, 능률을 올려준다기보다 압박감만 커지더라고요. 제 방법은 일기를 열심히 쓰는 거예요. 매일 일기를 쓰면서 왜 이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했는지, 어떤 일을 집중해서 할 수 있었는지를 돌아보고 다음 날 바로 반영하는 식이죠. 어떤 날은 일기만 5장을 쓸 만큼 정말 열심이었어요. 내가 하루 동안 집중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는 데 그만한 방법이 없어요.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시간 운용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집니다.


지금은 건강 문제로 퇴사했는데, 회사에 다닐 때는 9시부터 6시까지 회사 일을 하고 들불 일은 퇴근 이후에만 해야 했어요. 저녁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지가 과제였죠. 그것도 일기를 쓰면서 균형을 잡았는데, 회사 내에서의 능률을 올리는 데도 효과적이었던 것 같아요. 가끔 어쩔 수 없이 들불 일이 많으면 회사에서 비는 시간에 잠깐 할까 생각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내가 회사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면 사이드 프로젝트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했어요. 오히려 그랬기에 두 가지 일을 오랫동안 병행해 올 수 있었다고 봐요.

 

 

그걸 다 하시고 책까지 읽으셨다는 거잖아요? 대표님의 독서 루틴이 궁금합니다. 평소 언제 어디서 얼마나 책을 읽으시나요?


사실 저녁 시간에 하는 들불 업무의 8할은 독서예요. (웃음) 예전에는 빨리,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많이 읽는 것 못지않게 한 권을 읽더라도 천천히 소화할 수 있게끔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한번 쭉 빠르게 살펴본 다음 2회차에 정독을 시작해요. 저는 메모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챕터별로 메모도 열심히 해요. 책 내용을 키워드로 정리해보고, 책을 펼치지 않고 각 챕터별 내용을 정리해봐요. 정리가 잘 안 되면 제대로 안 읽은 것이니 그 부분을 다시 읽고 불분명한 부분을 복기하는 방식으로 독서합니다.


비슷한 책을 찾아 읽는 병렬독서도 엄청 열심히 해요. 요즘에는 『공정 이후의 세계』로 모임을 해서 그 책을 읽는데, 제가 운영자이기에 이 책 한 권만 읽을 게 아니라 공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책을 함께 읽어야 하거든요. 책에서의 키워드가 ‘공정’ ‘돌봄’ ‘정의론’이라면 그 키워드와 관련된 책을 찾아 읽고 책끼리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편이에요.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이 책에 100퍼센트 동의하느냐 따져보는 거예요. 소설이나 시는 동의 여부보다 내가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고 어떤 식으로 그걸 현실에서 이해할 수 있을지 궁리한다면, 사회과학서는 읽고 나서 저자가 주장하는 개념이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사회현상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언어가 될 것이냐를 고민합니다. 흔히 말하는 ‘비판적 읽기’를 하는 편이에요.

 

 

말씀을 듣다 보니 대표님에게 책을 읽는 행위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감정으로 표현해보자면 ‘두려움’입니다. 책을 읽을 때 자주 반성을 하는 편이에요. 제가 밖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고 동물권을 지지한다고, 그러니까 소위 요즘 사람들이 많이 지지하는 가치를 나도 지지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고 물으면 지금도 자신이 없어요. 책을 읽을 때마다 제 오류나 잘못된 생각을 자주 발견하죠.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할 때면 무섭고 두려워요. 나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는 게 망설여져요.


하지만 그걸 넘어서 읽기 시작하면 두려움이 용기로 바뀌는 것 같아요. 내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용기, 나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어떻게 바꿀지 고민하는 용기가 생겨요. 모임에 참여하는 분들이 “전 진짜 잘 모르는데, 제 생각을 말해도 될까요?”, “전 그냥 듣기만 할게요.” 같은 말을 정말 많이 하시거든요. 저는 무조건 발언을 유도해요. 어쨌거나 책을 읽었다는 건 일단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걸음을 뗀 것이니 저는 그 사람이 이미 어떤 지점을 넘어섰다고 생각하거든요. 책을 읽은 것만으로 용기가 있는 사람이니 어떤 말이든 해달라고 말씀드려요.


그래서 읽는다는 건 처음에는 두려움이지만 종국에는 용기를 향해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대표님이 최근에 읽었던 책 중 좋았던 것을 한 권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요. 책 읽는 것 자체가 혁명이 될 수 있냐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흥미로운 책이에요. 저자는 역사 속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혁명했던 사람들을 조명합니다. 보통은 책을 읽는 걸 혁명으로 연결시키기 쉽지 않잖아요. 저조차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랜 시간 나는 책만 읽으며 책 속에서 사회혁명을 궁리하는 사람 같아 부끄러웠고, 밖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는 사람 옆에서 괜히 고상한 척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했어요.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으로부터 조금은 해방됐어요. 읽는 것도 운동의 일부가 될 수 있고, 나는 내 방식대로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들불이 꿈꾸는 공부 공동체

“내 이야기를 나의 입으로 정리해서 말하는 게 시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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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을 운영하며 이렇게 공부해도 바뀌는 게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낄 때는 없나요? 그럴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잡으시나요?


들불은 카카오뷰에 여성 뉴스 아카이빙을 꾸준히 올리고 있어요. 그걸 올리기 위해 뉴스를 다 찾아봐야 하는데, 그날그날 사건 사고를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세상은 조금씩 나아진다고 말할 때 저는 비관적인 생각만 하게 되고요. 한동안은 모임을 운영할 때도 비장한 마음으로 임하곤 했어요. 모두를 운동에 참여하게끔 만들고 싶었달까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저 스스로를 깎아 먹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더라고요.

 

 

어떤 식으로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제 막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이미 많이 읽은 사람이 지금 이 현실을 너무 비관적으로 말한다면, 알면 알수록 괴로운 건가 보다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제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걸 막게 되는 거죠. 그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의식적으로 세상은 진보하고 사람은 변한다고 믿으려 해요.


또 제가 ‘들불레터’라는 뉴스레터를 발행하는데요, 하루는 제가 보낸 들불레터를 읽고 어떤 분이 길게 메일을 주셨어요. 많이 알게 되어서 감사하지만 제가 레터에 쓰는 말투 같은 게 너무 우울하고 비장하다며, 그럴 때마다 자신이 페미니즘에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 수치스러워진다고 하시더라고요. 좀 놀랐어요. 저는 무거운 문제는 무겁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게 능사가 아니었던 거죠. 읽는 사람이 무거운 문제를 자기 자신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여기려면 그걸 전달하는 제 말투에도 신경을 쓰고, 관련하여 소개하는 책들의 허들을 낮출 필요도 있겠다는 걸 배웠어요.


그래서 내 비관적인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창작자 입장에 서서 콘텐츠 내용을 어떻게 구성해야 좀 더 사람들에게 가닿을지 고민을 많이 해요. 아까 무력감을 느낄 때 어떻게 마음을 다잡는지 물어보셨는데, 저는 운이 좋게도 이렇게 뉴스레터 같은 콘텐츠를 만들며 무력감을 해소하게 되었어요.

 

 

그럼 반대로 들불에서 힘을 얻었던 순간이 있을까요?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책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어요. 여성운동에서는 여성들이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저는 자기만의 언어를 찾는다는 게 뭐 엄청 대단한 학문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내 이야기를 나의 입으로 정리해서 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대단한 힘이기도 하고요.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한번 말로 뱉기 시작하면 언어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을 거치면 참여자들의 눈빛이나 태도가 달라져요.

 

프로그램 중 눈물을 보이는 분도 계시는데 다 울고 나면 오히려 내일을 기대하게 되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때 정말 보람찹니다. 한 명이 울면 다 같이 울게 될 때가 있는데, 저는 그것도 좋아요. 들불에 와서 허심탄회하게 우는 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참여자들이 이 장소를 편하게 느끼는 것 같거든요.

 

 

들불에서 대표님이 펼치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우선 지금 당장은 여러 가지 일들을 실험해보고 있는 단계예요. 궁극적으로는 공부 공동체를 꿈꿉니다. 공부라고 해서 모여서 어려운 글을 읽고 연구하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나의 언어로 나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게 공부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요즘 공정함이 이슈라는 건 아는데, 정작 그 공정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려면 어렵게 느껴지잖아요. 꼭 학문적인 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책을 통해 자기 언어를 갖고 자기 주장을 뚜렷하게 할 수 있는 공부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요.


더불어, 그 공부를 통해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 명확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해요. 최근 여성단체에서 진행한 미투운동 중간결산 프로그램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인상 깊었던 말이 공동체를 향해야 하는 질문이 늘 피해자, 약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었어요. 저도 크게 공감하는 부분이에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화가 나고 안타까운 동시에 지금 당장 내게 일어난 일은 아니니까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측면도 있거든요. 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 내부 자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아요. 여러 가지 질문들을 피해자가 아니라 공동체 내부로 던지고 함께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공부 공동체를 꾸리는 게 ‘큰 그림’이라면, 앞으로 계획 중이신 ‘작은 그림’도 듣고 싶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뒤집다 프로젝트’를 가을 동안 계속할 예정입니다. 저는 여러 연구자, 활동가와 팀을 꾸리는 데 관심이 있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 함께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하는 단계를 거칠 것 같아요. 분명하게 어떤 방식으로 하겠다는 청사진이 있다기보다 최대한 많은 여성을 만나고 원하는 바를 들불 내에서 구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노력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들불과 함께하게 될 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면 여기서 해주세요.


책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싶어요. 책에 집중을 못 하겠다고 하시는 분들,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며 부끄러워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씀드렸듯 많이 안 읽고 한 권을 오래 제대로 읽는 것도 괜찮거든요. 1년에 몇 권 읽겠다는 목표보다 하루에 두세 페이지를 꾸준히 읽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한 권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또, 요즘 화두가 ‘자기효능감’인데, 책은 자기효능감을 발견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에요. 어려운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은 다음 거기 나오는 개념을 이해했을 때 뿌듯함과 효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러니 많은 분들이 어렵고 무서운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가볍게 책을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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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을 생각하면 막연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있는데 용기가 나는 인터뷰였어요. 들불과 대표님의 행보를 앞으로도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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