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소수자성의, 소수자성에 의한, 소수자성을 위한 소설 - 마고

소설로 하는 인권운동
글 입력 2022.08.0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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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대사회는 단언컨대 '인권'에 매우 예민한 시기다. 그동안 서발턴'지배세력'의 반대말으로서 소리없이 존재해왔던 주체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 장애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 수많은 소수 집단이 저마다 제 권리를 되찾기 위해 농성 중이다.

 

이러한 사회 경향에 대하여 필자의 의견을 묻는다면, 글쎄. 필자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소수 집단의 투쟁을 무작정 덮어놓고 옹호하기 시작하면 여성이니까, 장애인이니까, 노동자이니까, 성소수자이니까 '옳다' 혹은 '특별하다' 는 논리로 이어지기 쉽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특별하다'는 말은 평범한 일원일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필자는 그들이 특별한 지위를 가진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단지 목소리가 필연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는 그들이 여느 평범한 구성원들만큼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법적으로 그들의 발언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필자는 소수자성을 특별히 전면에 내세워 마케팅하는 예술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덧붙여 소수자성뿐 아니라 필자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념적 목적을 '위해' 창작된 '특별한' 예술 그 자체를 꺼린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읽는 이에게 곰곰이 사유할 만한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육중한 압박감을 선사하는 시위 현장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다는 점, 다수자를 향해 소수자라는 존재를 꺼내보인다는 점,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나 필자의 사견으로는, 그런 기능은 문학이나 미술, 음악이 아니라 뉴스와 각종 시사 칼럼 및 수기(手記)물론 수기 역시 넓게 보면 문학의 한 갈래이긴 하다에서 주도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몇 년 전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만을 나열한 글 <82년생 김지영>이 에세이가 아닌 '소설'로서 돌풍을 일으킨 것을 보면, 필자의 불편감이 보편은 아닌 듯하다. 나를 제외한 현대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아무래도 소수자성의, 소수자성에 의한, 소수자성을 위한 작품들인 것 같다.

 

필자가 지난 달 읽은 소설 <마고> 역시 이와 유사한 카테고리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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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패망 직후, 미군정이 시작된 혼란스런 한반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미군에 의해 살해된 윤박 교수 살인 사건에서 시작된다. 살해범이 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미군정의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미군정 조사관은 사건을 조작하려고 한다. 때문에 사건 당일 윤박 교수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언론에 보도된 세 명의 무고한 여성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종로경찰서의 검안의이자, ‘세 개의 달’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여성 탐정인 연가성은  문화부 기자인 권운서와 함께 희생의 제물로 바쳐질지도 모를 윤박 교수와 이 세 여인들과의 관계를 추적한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세 여인들에게 충분히 범행동기가 될 만큼 윤박 교수가 이들을 이용하고 착취한 사실과, 그로인해 이들이 원한과 죄책감에 서로를 적대하도록 얽힌 관계에서 서로를 구해내려는 마음에까지 가 닿아 있던 내면의 심층까지 파악하게 된다. - 작품 소개 中

 

*

 

필자가 많고 많은 신간 중 <마고>를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첫째로 표지가 매우 감각적이었고, 둘째로는 '미군정기 살인사건'이라는 키워드가 눈길을 끌었다. 세상에. 미군정기 살인사건에 대한 소설인데, 그 용의자가 모두 여성이라지 않는가. 특이한 설정이 꽤 구미가 당겼다. 첨언하자면 소설의 독특한 제목 '마고'도 내가 입맛을 다시게 하는 데 한몫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고>는 내게 너무 과했다. 어쩌면 과했다기보다는 과분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 여성의 인권에, 성소수자의 인권에 최소한 무관심했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그런 나에게도 이 소설은 너무 붉은 맛 혁명이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에는 한 여성을 사랑한 (수술 이후 남성이 된) 반음양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하고 싶은 트랜스젠더(MtF)와 서로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무성애자(?) 여성의 이야기와, 남성의 혐오와 압박을 견디며 사회적 지위 보장을 외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무려 1940년대 남한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대체 이게 어떤 내용일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소수자성을 넣은 건 좋은 시도였는데 너무 과했다, 가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현대도 아니고 1940년대에 이렇게 감당하지 못할 양의 '소수자' 설정을 때려 넣는 것은 현실성만 떨어트릴 뿐이다. 심지어 위 서사 중간중간에는 여성의 화장에 관한 탈코르셋 문제도 언급되고, 자식을 물건으로 대하는 부모의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도 등장한다. <마고>는 그야말로 소설로 하는 인권운동인 셈이다.

 

그리고 서사 전반에서 무엇보다 도드라지는 것은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 의식이다. 그 빈도가 매우 대단한데, 아래에 소설 초반 30페이지 남짓한 분량 안에서 등장한 수많은 '여성 인권'과 '남성 권력'에 관련된 묘사들을 예로 첨부한다. 농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바닥에 적어도 한 문장씩은 '남성들이 권력으로 여성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어린 여아의 뇌수를 빼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다기에 그랬습니다." - 22p

 

물론 기자들이 가성을 만나지 못한 까닭이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계급, 혹은 성별. (글쓴이: 주인공의 성별이 '여성'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 23p

 

일제든 미군정이든 여성들이 범죄에 더 취약한 것은 여전했다. 가령 여성이 낙태를 하면 현재 교제 중이거나 결혼한 남편까지 공개되는 수치를 짊어져야 했다. - 24p


일부종사해야 할 '여성'이라는 기준에서 가성은 이미 불합격이었으나 그랬기에 오히려 의사로서의 일을 할 수 있었다. - 26p


기사화되지 않았을 뿐, 조선 땅에서 은밀히 쫓아온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들의 사건이 흘러넘쳤다. - 26p


호외지의 자극적인 제목에 가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중략) 조선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들은 그런 가십이나 괴담을 싣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잡지들이 다루니 여성들이 그걸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된 건지도 몰랐다. - 28p


여태 한 명의 여성을 죽이기 위해 떼로 달려든 남성들은 많았다. 한 명의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 모여든 남성들도 많았다. - 29p


신분이나 계급, 나이 같은 건 이들이 여성이라는 것 앞에서는 모두 상관없었다. 여성들은 범죄 앞에 참 공평한 처지였다. 물론 그것은 변태 성욕자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이 남성 옷을 입고 짧은 머리를 하며 붙어 다녔다고 그들을 돌로 내리친 남성도 있었으니. - 29p


"일단 이런 문장 자체가 문제입니다. 남자들은 이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조선어는 여성형과 남성형 문장이 없습니다. 평등한 어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 30-31p


미군정은 여성들의 권리를 적극 지지한다며 공창제 폐지를 부르짖었지만, 어린 기생들을 마치 공공재인 양 대하는 것은 일제 때와 썩 다르지 않아 보였다. - 35p


"연가성, 잘 들어둬. 엄연히 조선은 남녀의 구별이 명확한 나라야. 그리고, 일본이 떠나면 뭐라도 달라질 줄 안거야?" - 36p


"어서 다시 자리를 지키지 그래? 술자리의 꽃은 여인이니까." - 37p


'조선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무장하여 일본군들을 모두 총으로 쏴 죽이는 내용이에요.' - 39p


'여성 소설가도 별로 없고 여성이 나온다 한들 늘 고뇌하는 남자의 곁다리로 나오는 게 현실이니 그랬을지 모르지. 그게 리얼리즘이라나' - 39p


마고는 세상을 천지창조한 신 중에 유일한 여성 신이었다. 다른 남성 신들이 산을 넘어뜨리고 육지를 파괴해서 세상을 창조할 때 마고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세계를 만들었다 한다. - 41p


"그냥 이제 여성 신은 필요 없는 거야.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여성이 만들었다고 하면 말이 안 되니까." - 42p


"얘는, 사람 죽는 게 뭐 멋있니?"

"아니, 하도 여자를 죽이니까 그냥 해본 말이야." - 42p


"너는 내가 만약에 남자한테 당해서 자살이라도 강요당하면, 그래도 그 남자 편이야?"

"아우, 얘는. 그런 일은 없어야지."

"너무 흔하니까 그렇지. 엊그제도 우리 전차 탔다가 어떤 사내가 우리 보면서 시집도 안 간년들이 책줄이나 읽는다고 한 거 기억 안 나? 엉덩이도 치고 갔잖아."

"참 세상 무서워 죽겠어. 여자로 살다가 제명에 죽는 게 소원 되려고 그래. 사디즘인가 뭔가 그 성 과학잡지 안 본 남자 있을까?"

"여자인 내가 본다고 하면 난리겠지? 왜, 레뷰 무대를 보던 사내들 말이야. 입을 못 다물더니만 끝나자마자 여자가 다리를 벌리느니 어쩌느니 하고. 저번에는 숙명여전 여대생이 안 만나준다고 죽인 사람도 있었잖아. 그래놓고도 그 여자 과부여서 그렇다고 그 살인마 편드는 사내들도 있더라니까. 그런데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는 내가 시집 안 가고 늦게 다니니 그런 일 당해도 할 말 없다고 이런 말까지 하셔." - 43-44p

 

***


나 역시 여성으로 살면서 많은 것들─예를 들자면 남학생만 전교 회장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는 학교 측의 무언의 압력이라든가─을 느껴온 터라 세상에 작용하고 있는 남성의 권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남성 권력에 대해 고발하는 에세이나 칼럼이 아닌 '소설'에서 한 바닥에 한 문장씩 이 아이디어가 등장한다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거였다'(=것이었다)와 같이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가 불쑥불쑥 등장하는 서술과 1940년대임에도 너무나 현대인스러운 말투들이 눈에 띄어 필자는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달리 '인권 운동' 혹은 '투쟁'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이 책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실 필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이 소설은 파격적이고 신기하기는 하다. 그리고 특히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한국과 동떨어진 가성의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표현 방법─집안일을 하는 가성과 한국의 상황을 병치하는─은 매우 참신하기까지 했다.

 

소수자성이 사정없이 교차하는 바람에 읽는 입장에서 다소 정신없긴 했지만, 이 작은 책에 이 시대의 인권 담론을 모조리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치열한 고뇌 덕택일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특이한 시대를 배경으로 특이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특이한 사랑 이야기에 흥미가 있다면, 지금 바로 <마고>를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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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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