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스압주의) 우리의 문해력 - 사회문제이자 AI 대항법

사회문제이자 AI 대항법인 문해력
글 입력 2022.07.0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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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글의 독자는 반토막이 났으려나. 긴 글은 물론, 긴 글의 집합인 책은 고지식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학자 타입의 사람들, 펜과 친해야 하는 직종들, 기자라던가. 언제부터 긴 글이 미리 주의를 주어야 하는 위험물로 취급이 되었던가.


책에 꽤 호의적인 나조차도 ‘주의’라는 단어와 밀착되어 있는 글들을 마주하면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SNS에서 카드 뉴스를 업로드하는 개인 계정을 팔로우하고, 유머글조차 길어진다 싶으면 다른 사람들의 댓글을 보면서 내용을 유추하고 다시 스크롤을 올려 대강 훑어보는 식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스압주의’가 붙은 글들은 스킵.


댓글창을 보고 있자면, ‘이 글을 다 보지는 않았지만’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전쟁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오히려 양심적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문맥에 맞지 않거나, 글의 요점이 아닌 것들을 지적하는, 지엽적인 댓글에 휘둘린 이들을 볼 수 있는 경우 또한 흔하며, 이를 ‘댓망진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혹 이렇게 지나갔던 글들이 지인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을 때 흠칫 놀라는 순간이 있는데, 댓글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본인의 의견인 냥 늘어놓는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가 단연 그렇다.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멋진 모습에 글의 처음과 끝을 매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어떠한 글에 대해서는 나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였으리라. 나는 점점 말을 잃고, 비슷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기만을 즐기면서 소통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소통이 활발하면서도 단절 역시 활발하다.


댓글들 역시도 매번 언성을 높이다가 다른 글로 넘어가버리면 그만. 이해 필요성의 감소, 그리하여 이해 능력의 불필요성을 가진 사람들의 탄생. 문해력 부족의 종족들이다. 개인의 삶이니 컨트롤이 필요하겠냐마는 이 문제가 어찌나 심각한지 이 종족 출신의 신입 사원들을 감당하지 못한 기업들은 대학에 국어강의를 요청하고, 초등학교에서는 책을 요약한 영상을 보고 독서감상문을 작성하는 것을 ‘독후감 숙제’라고 알림장에 적도록 한다.


그 뿐이랴. 수많은 방송에서 이에 대해 다루고 있다. JTBC <다수의 수다>의 작년 12월 17일 방송에서 현직 선생님들 간 대화 속에서도 문해력이 빠지지 않았으며, 동 방송국의 <차이나는 클라스>의 올해 3월 6일 방영된 회차에서는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조병영 교수가 ‘문해력’을 주제로 강연했다. 뿐만 아니라, 작년 3월에는 EBS에서 <당신의 문해력>이라는 교양 시리즈를 방영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지 오래되었으며, 사실상 일반인들도 이 문제가 피부에 와닿았을 것이 자명하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댓글들, 기생충-코로나-등의 큰 사회 이슈 때마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키워드 - ‘ooo 뜻’, 그리고 잦은 빈도의 ‘요약’ 언급(ex. 뉴스 요약 AI봇, 영화 요약 영상), 대화하기 어려운 집단 혹은 세대 간 격차, 각양각색이지 않은가? 알다시피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모습이다.


EBS에서 진행한 뇌 활성화 실험은 글을 읽을 때 오디오, 동영상에 비해 능동적으로 뇌를 활용한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이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으면 속도를 조절하거나 다시 읽는 등의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술이 극도로 발전된 미래를 표면적인 유토피아이자 실질적인 디스토피아로 그리고 있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문명 세계의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심히 불쾌한 것을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문명은 현재다. 읽기 귀찮다면 다른 매체를 이용하면 된다. 정보의 습득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단정해버리면서 그 외의 목적들은 불쾌한 부가적인 활동으로 치부하지만, 위생적으로 완벽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의 면역력이 더 약한 것과 다를 바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즉각적으로 효과를 관찰하기 힘든 문해력 훈련을 멀리한다면 앞서 언급한 문제들이 아노미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보다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부가적으로 덧붙이자면 OECD에 따르면 문해력이 높은 집단은 낮은 집단보다 연봉이 2.7배 높고, 취업률이 2.2배 높으며, 건강이 2배까지 차이난다고 한다.


이런 극단적인 결과를 보이는 것은 문해력이 삶의 전반에 있어서 근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출발선에서 틀어진 1°가 처음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점점 직선을 그어나가보면 그 사이가 벌어져 있음과 같다. 문해력은 이제 기본 소양이 아니라 개인 역량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관전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반가운 것은 문해력이란 후천적인 습득 능력이라는 점. 문해력이 낮은 집단은 글자를 읽는 행위 자체에 노력을 쏟아야 하는 반면, 문해력을 훈련시킨 집단은 글자를 읽는 것보다 글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노력하여 효율적으로 뇌를 사용한다. 결국은 뇌도 반복작업을 통해 자동화를 시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고차원적인 사고를 고 문해력 집단은 힘을 덜 들이고 좋은 결론을 낼 수 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결국, 마시멜로우 실험과 같다. 현재의 한 개의 마시멜로우를 참는다면 이후에 우리는 여러 개의 마시멜로우를 획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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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을 넘어서서 ‘디지털 문해력’까지 언급되고 있는 마당이다. 아직도 낮은 문해력을 ‘개인의 역량’이라고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단어일지도. 디지털 문해력이란 디지털 기술을 적재적소에 사용해 온라인 상 정보의 필요성을 판별하는 능력이라고 압축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활용 능력과 문해력의 종합이다. 이탈리아 등의 국가에서는 문해력 시험(Literacy)을 공식화하면서 비교적 기초가 다져져 있기 때문인지 OECD 국가 중 디지털 문해력 항목에 대해서도 낮은 순위(12위)에 랭크하고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이므로, 디지털 기기를 통해 기술 활용 능력과 문해력을 동시에 키우는 것이 효율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디지털 기기는 화면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일련의 읽기(라고 생각하고 싶은) 독서 행동은 ‘읽기’가 아닌 ‘보기’로 인식되며(김소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시대, 21세기 한국 소설의 새로운 지형도), 앞선 실험에서 언급했듯 글을 읽을 때 가장 뇌 활성화가 커 오히려 이쪽이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지신경학자이자 현재 UCLA 사회정의 센터 책임자인 매리언 울프는 “디지털 매체를 통한 읽는 행위로 인간의 읽기 능력은 퇴보하고 있고, 깊이 읽기를 실천하기 힘든 환경이 생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다시, 책으로”를 외친다.


굳이 책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흰색은 종이요, 검은색은 글씨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더 피로도를 느낄 수 있다. 결국 영상에도 글이 가미되어 있고, 영상 설명란도 존재하며, 소설을 영화화한 외화를 보더라도 자막을 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때 ‘읽기’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점, 뇌에게 영상은 글의 대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AI의 시대에, 우리의 차별점은 ‘사고력’이다. 암기, 계산, 데이터 기반의 유추 따위의 것들은 기계가 대신 해 줄 터이다. 지금, 흔히, 인공지능의 인간 대체를 걱정하곤 한다. 분명 소멸하는 직업들이 생길 것이나, 지금까지 변화된 환경마다 새로운 수요가 필요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니치가(추후엔 니치가 아닌 보편화될 지점이) 사고하는 인간일 것이다.


어디선가 사고하는 인공지능이 이미 출현했다고 염려 혹은 환호한다. 언젠간 그럴 수 있겠으나, 최소한 근미래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AI에게는 모든 결정이 확률게임일 뿐이다. 따라서 AI에 대한 평가는 ‘성공률(%)’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않으며, 그리하여서도 안된다. 결과주의의 AI에 대항하고 싶다면 우리는 사고해야 한다. 그리고 고등사고는 동일하게 전두엽을 사용하는 문해력으로부터 나온다.


과거 신분제 사회를 기억하라. 양반들은 가만히 앉아서 글이나 읽어재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 글을 읽는 자는 우위에 있다. AI가 제공하는 것들은 누리고, 인간은 사고하기로 하자. <멋진 신세계>에서의 풍자의 풍경이 아닌 정말로 멋있는 모습으로 만들 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문명사회를 문명사회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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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Freepik

참고 문헌 : EBS <당신의 문해력>

 

 

[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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