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신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6.20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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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책이 내게 던진 질문이다. 온몸에 용 문신을 두른 건장한 조폭들이 터질 것 같은 팔뚝에 ‘차카게 살자’를 새기곤 시민을 위협하는 장면이 재생되었다. 조폭 소재를 과용했던 시대에 스크린에 비치는 문신의 존재감은 그랬다. 요즘에는 명칭을 달리해 '타투'라고 부른다. 살갗을 날카로운 바늘로 찔러 안료를 새겨 넣는 방법은 동일하지만 타투는 좀 더 포괄적인 보디 아트로 분류되었다.

 

'요즘 애들은 지우지도 못하는 그림을 몸에 마구잡이로 그려 넣더라.' 처음 시도한 내 오른팔 타투를 보며 연세 지긋한 상사가 말했다. 화인의 타투를 조롱했던 상사 역시 그를 이단아 취급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마구잡이가 맞을 지도 모르겠다. 옷차림이 가벼운 여름이면 또 다른 옷을 걸치듯 타투를 새겨 넣었다. 이름, 생년월일, 좌우명, 마음에 드는 문구를 신체에 새기는 레터링(lettering) 타투는 가벼운 일탈에 가까웠으므로.

 

그렇다면 문신과 타투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행위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관념적 대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요란한 그림을 이곳저곳 새겨 넣은 이들은 왕년에 좀 놀았을 테고 과시하려는 성향과 반항적이며 제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올해 타투이스트를 준비하는 친구 S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타투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뿐인 몸을,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수놓는 사람들에 대하여. 착하게 살고 싶어서 근육 위에 새겼던 어수룩한 문구도, 힘든 날에 웃으며 새겨 넣은 단검과 세련된 샐러맨더 타투 역시 모두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구병모 작가의 장편 소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는 타투에 대한 이야기이다. 타투이스트가 등장하지만 글의 화자는 아니며, 타투를 그저 액세서리와 패션의 일부로 취급하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타투라는 용어 대신 문신을 떠올리곤 목욕탕 조폭들을 연상하는 평범한 50대 중년 여성의 이야기. 딸 뻘 되는 후배 화인이 목뒤에 새긴 샐러맨더 타투,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 타투가 갖는 의미


 

 

패션이구나. 문신이라고 하면 공중목욕탕에 들어와서 등이나 어깨의 승천하는 용을 자랑하는 폭력 조직원 내지는 호전적인 인종차별자들의 스킨헤드 같은 걸 떠올렸던 시미는 단순한 패션이라는 그들의 감각 자체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구병모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타투는 피부에 색소를 주입해 일정한 문양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표피 아래 진피층에 색소를 입혀 영구적으로 문양이 남도록 하면 '타투'고, 표피나 진피층 상부에 색소를 넣어 6개월~3년간 효과가 지속되도록 하면 '반영구 화장'으로 분류되었다. 타투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이 변화했다. 몸에 타투를 많이 새겨 넣었다는 이유로 사회복무요원으로 배치되었던 이들은 현역으로 복무하게끔 규정되었고, 조폭 문화의 일부라는 공감을 얻기 위해 뉴스에 자주 노출되었던 타투는 많은 연예인들의 타투 시술을 통해 개성을 추구하는 신세대의 전유물로 바뀌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타투인과 함께 타투이스트라는 직업 역시 각광을 받고 있는데 모두가 추구하는 의미는 다를 것이다. 거창하게 의미랄 것 없는 그림을 새겨 넣기도 한다. 타투이스트 강습을 받고 있는 S는 고무판 찌르기를 맹연습 중이었다. 연습이 끝나면 제 몸에 원하는 도안을 새겨 넣으며 길을 들인다. 타투이스트의 몸에 그렇게나 많았던 타투들이 연습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이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타투가 신세대의 전유물이라고 말한 것은 기성세대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자유분방한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난날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내 팔에 새겨진 레터링 문구는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이다. 이름을 갖고 장난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작명의 의미가 그랬다. 늦은 나이에 딸을 얻게 된 아빠가 내 딸 좀 보라며 지어준 이름을 나는 몸에 새겨 넣었다. 엄마의 감상은 '예쁘네, 그래 요즘 젊은 애들이 타투 많이 하더라.'였다.

 

급변하는 시대에 빠르게 멀어지는 자식들의 문화를 수용하지 않을 거라 장담했었다. 당신들은 특별함에 대해 원한 적 없으리라 생각한 게 부끄러웠다. 복사, 붙여넣기도 할 줄 모르는 엄마가 젊은 애들이나 하는 문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무시한 것 역시도. 시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타투와 그로 인해 그가 통찰하는 이야기들은 모든 기성세대를 아우르고 독자인 내게도 새로운 시선을 제시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만큼 간절하게 바라고 믿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몸이 어제와는 달라지기를, 나를 둘러싼 외부 조건이나 상황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를. 먼 옛날의 사람들이 용맹한 영혼을 자기 안에 이식하거나 풍성한 사냥을 바라면서 맹금류를 제 몸에 새겨 넣은 것처럼, 지금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영혼이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한다고 믿으면서 부모님이나 애인을 새겨 넣기도 하니까요.

  

-구병모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타투는 의료 행위로 구분되어 의사면허를 갖춘 사람만이 합법적으로 시술이 가능했다. 불법이라는 규제가 있기에 인식은 여전히 탈선에 머물러있다. 타투숍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거리며 바짝 긴장하고 경계했던 시미처럼. 물론 불법인 만큼 접근성이 쉽고 그만큼 부작용 사례도 많았다. 변화할 준비를 마친 이들은 타투숍을 찾았다. 이제 사회가 두 간극을 좁히고 합의점을 제시할 차례다.

 

 

 

2. 생물학적 여성의 타투


 

풍족한 사냥을 위해 새겨 넣은 맹금류, 자신을 표현하게 위해 타투를 즐긴 갱스터, 미디어에 노출되는 타투는 대개 남성의 과시를 위한 수단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여전히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주체가 여성이었을 때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편견은 분명히 존재한다.

 

희고 깨끗한 피부를 더럽히는 타투. 이는 '순결'을 강요받는 관습적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남성은 약간의 과시가 득이 되었지만 여성은 침묵을 지켜야 했다. 침묵은 곧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공자의 말씀을 이어받은 기성세대는 여전히 그 말씀을 계승했다. 패션의 수단일지언정 여자에게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다.

 

화인의 타투를 목격한 상사의 희롱을 읽어내려가며 지난날 내가 당했던 희롱이 떠올랐다. 면담 중이던 팀장이 내 오른팔에 새겨진 타투를 발견하곤 제대로 보여달라 요청한 것이다. 팀장과 평직원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나는 못마땅하게 타투를 보여주었고, 이내 불쾌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도 은밀한 곳에 하나 해야겠다. 팀장은 그렇게 말했다. 시간이 흘러 그날의 불쾌함은 의문으로 뒤바뀌었다. 내 타투가 멋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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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피부에 왜 굳이 타투를 그렸냐는 물음은 칭찬이 아니다. 이제는 내 몸에 그림 그리는 것조차 가족이 아닌 제3자의 허락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 따라오는 시선은 성별을 나누지 않고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남에게 예쁘게 보이려 피부를 가꾸지 않았고 그들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

 

화인이 관련도 없는 타투에 대하여 꼬치꼬치 묻는 조사관에게 되물었던 말이 있다. ‘여기에 뭘 그렸든 이 일과 무슨 상관인데요?’ 개인의 사생활이 분명한데도 사건의 몽타주가 흐릿하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것이다. 만약 피해자가 남성이었다면. 용의자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의 타투(정확히는 지운 타투의 흔적이다)를 의심하며 사건의 전말을 떡 주무르듯 하여 지레짐작했을까.

 

좋아하는 축구 선수의 타투가 멋있어서 따라 하려고, 반려동물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곧 태어날 딸의 이름을 새기는 그들의 타투처럼 여성에게도 계기가 존재했다. 예쁘게 보이려고,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타투에 개성과 신념을 새기기까지 여느 여자들에게는 지나온 세월이 존재했다. 연약함을 드러내지도 못하면서 그저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로 치부되는 여자들 말이다.

 

샐러맨더 타투는 가정폭력을 견뎌내는 화인이 몸에 새긴 주문이었다. 상사는 그를 날티 나는 여자로 단정 짓고 폄하했지만 시미는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타투를 패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가 피트니스와 요가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요즘 오십 대 여성보다 여러모로 뒤처졌다는 감상을 느꼈기 때문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눈에 띄는 개성이 없다는 것이었고 모두와 병렬로 서서 달리기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나날이었다. 시미는 평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패배감과 회의감에 휩싸이게 만든 것은 용기 없는 지난날 일 테다. 시대가 추구하는 삶에서 한참을 빗겨 나 살아온 날들은 평범하지 않으니까. 세련된 타투를 새기면 세련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가정폭력과 방화사건으로 병원에 입원한 화인은 병문안을 온 시미에게 목뒤에 자그맣게 키워낸 샐러맨더 타투가 저를 지켜줬음을 고백했다. 위태로운 순간에 불을 내뿜었던 샐러맨더를. 작가가 펼쳐낸 환상 같은 이야기에서 단단한 염원이 느껴졌다. 시대착오적인 사회적 관념이 개인의 믿음으로 부분 상쇄되었고 시미처럼 내 가슴속에도 열정이 수놓아졌다.

 

 

 

3.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


 

시미는 평범한 50대 중년 여성이다. 이혼을 한 번 겪었고 자신을 자식에게서 격리 시키려는 전 남편의 감시 아래 살아갔다. 아이와 단절된 시미는 남몰래 심부름센터를 고용해 아이 학교를 찾고 전할 수 없는 꽃다발을 들고 졸업식에 가기도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으나 자신을 거부하는 아이 앞에 좌절하고 말았다.

 

상사에게 무시당하고 열정 가득한 후배들이 치고 들어오는 시미가 처한 상황은 평범하다 못해 죽어있는 삶과 같다. 그런 그가 꿈꾸었던 평범한 삶이란 남들 만큼 사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격을 부여받을 필요 없으며 오직 나만이 일상의 변화를 꿈꿨다.

 

엄마와 다툰 날을 떠올려 보았다. 잘은 아니더라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에게는 문득 좌절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시대가 급변하여 망설임 없이 삶을 개척해나가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랑이며 부러움으로 남았다. 그들이 꽁꽁 품어온 열정을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밖으로 꺼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야 할 것이다. 문득 가슴속을 뜨겁게 울린 충동과 열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충동이 솟는다는 건, 태울 에너지가 생성됐다는 것이었다. 에너지가 소진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과감히 자신의 존재를 빛내기를 소망해본다.

 

 

[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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