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왜 문화예술을 사랑하는가?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5.3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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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화예술을 사랑하는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꼭 챙겨 읽고, 마음에 콕 박힌 영화는 두 번 세 번 보면서 오브제 하나하나를 눈에 담는다. 예술의전당 전시관 한복판에서 코가 시큰해지고, 그림 속 인물과 눈 맞춘다. 나에게 문화예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에게 문화예술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이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 개척해서 얻는 경험임을 깨달았다. 아무도 그들의 경험을 대놓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경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경험의 폭이 세상을 보는 시야각과 비례한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팀 프로젝트 회의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최근 전시회에서 본 작품을 인용하는 사람, 지난 해외여행 경험에서 힌트를 얻은 사람, 작년에 읽은 책에서 본 자료를 인용하는 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인용할 수 있는 자료의 폭이 넓어졌다. 경험은 곧 나의 ‘레퍼런스’를 쌓아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새로운 경험을 찾아 헤맸다.

 

맨땅에 헤딩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곳을 다 가볼 수 없었고, 이 세상 모든 음식을 먹어볼 수 없었고,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시공간적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바로 문화예술이었다. 내가 가지 못하는 장소를 방문한 사람의 사진, 내가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껴본 사람의 그림, 내가 살지 못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글을 보고 느끼며 그들의 감정과 경험을 내 것으로 흡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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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ya Repin/”Ivan the Terribla and His Son Ivan on November 16th, 1581”/1885/Tretyakov Gallery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의 작품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은 아들을 제 손에 잃은 아비의 충격과 회한을 그려내고 있다. 그림에서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러시아 황제 이반 4세는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로, 권력 다툼 때문에 아들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아들의 궁전을 방문한 어느 날, 그는 며느리의 옷차림이 단정치 못하다며 임신 중인 며느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아들 이반이 항의하자,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의심하던 아버지는 한순간 쇠망치로 아들을 때려 쓰러뜨린다. 이 그림은 피투성이가 된 아들이 죽어가자 잘못을 깨달은 아버지의 허망한 순간을 담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들은 이미 죽었고, 자신의 혈통을 끊어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인 것을.

 

제 광기를 못 이겨 아들을 죽여버린 아비의 초점 없이 치뜬 눈을 본다. 그의 눈에는 충격과 공포가 함께 서려 있다. 어딘가 겁에 질려 보이기도 한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광기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 손으로 피붙이를 죽여버린 후, 그의 광기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린 거다. 허공을 헤매는 그의 눈동자가 그 심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내가 살아가며 경험할 수 없고, 경험해서도 안 되는 감정을 이 그림으로부터 흡수한다. 이로써 나의 ‘감정’에 대한 경험은 한층 더 풍부해진다. 내가 느낄 수 없는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주는 회화 작품을 보면서, 그림 속 인물에게 눈 맞추고 그에게 감응한다. 내 감정의 스펙트럼을 한 층 더 넓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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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후각을 타고난 주인공 그르누이의 생을 담은 소설이다. 작은 코를 벌름거리며 이 세상의 모든 향을 기억하고 머릿속으로 조합까지 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체취는 갖고 있지 않은 괴물 같은 주인공은 ‘최고의 향’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름답고 젊은 여성을 살해한다.

 

이 책에서 체취는 결국 정체성과 자기 존재감을 나타낸다. 체취가 없는 그르누이는 한평생을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채 살았다. 악마적 재능을 가졌지만 세상에 존재를 알리지 못한 채, 그는 그 누구보다 세상과의 연결을 갈구했을 것이다.

 

이 책을 세 번째 읽고, 그르누이의 최후는 그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었으리라 짐작했다. 분명히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 같은 존재로 평생을 살다가, 모두가 그를 갈망하고 있는 순간이라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짜릿하면서도 고통스러웠던 순간 아니었을까?

 

이렇게 소설 속 인물과 대화하고 이입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울고 웃을 수 있게 된다. 소설의 장면 장면마다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고 감응한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글을 읽고 어떻게 눈물을 흘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새는 글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도는 일이 예사다.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건과 감정이 풍부해질수록 더 잘 공감하게 되고, 소설 속 상황에 더 잘 이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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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 이미지 사진전》에서는 치열하고 생생하게 담긴 개인의 드라마에 깊이 빠져들어 울고 웃었다. 위인전에서나 보던 인물들, 영화 같은 과거의 일상, 삶이 진하게 묻은 표정에서 드러나는 희로애락. 그 순간의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또한 사진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지구 저편의 일을 생생히 포착해서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총성에 울부짖는 아이와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는 사람들, 내전 상황에서도 학교에 가는 아이들. 이것이 현실이라며, 현실을 똑똑히 바라보고 행동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렇듯 평생을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법한 세계 저편의 이야기, 문서로만 접했던 먼 과거의 이야기를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게 사진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진의 매력은 프레임에서 나온다. 우리는 네모난 프레임 안에 담긴 찰나의 순간만 볼 수 있다. 프레임 바깥의 이야기는 사진을 보는 사람의 상상에 달려있다. 프레임 앞에 서서 이 프레임 바깥에는 무슨 이야기가 일어나고 있을까, 어떤 소리가 들릴까 상상하고 고민하며 사진을 보는 재미가 있다. 사진 속 상황에 푹 빠져드는 것이다.

 

*

 

나는 왜 문화예술을 사랑하는가?

 

경험의 폭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각과 비례한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문화예술로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한다. 그것이 내게 문화예술이 갖는 의미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좋아하는 전시장에 들리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챙겨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지 않을까? 문화예술은 보다 넓은 세상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에 나는 문화예술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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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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