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종로 스케치 3 - 종로3가, 낙원상가

아저씨들과 젊음
글 입력 2022.05.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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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로3가로


오늘도 영화모임을 마치고 나왔다. 장소는 종로3가, 익선동으로 들어가는 송해길의 초입, 피앤티스퀘어이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회로를 다 태워, 2시간 남짓한 시간을 보내고 난 한낮 16시에 내 정신은 녹아 있었다. 연초 한 대를 태우자마자 허물어 어딘가 기대고 싶어지는 정신으로, 그러나 시간이 너무나도 어중간한 한낮 16시였기에, 방황하기로 한다. 종로 스케치가 같은 이름의 두 번째 넘버링으로, 그 시리즈 화를 예고해두었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 집으로 돌아가, 서재에 음악을 틀어놓고 빈백에 누워 낮잠을 잔 다음, 깨인 정신을 안고 벼루던 쓰고픈 글들을 낳는 것도 유익할지 모르지. 그러나 글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씨앗으로 내 머리 안에 잘 뉘여 있고, 종로3가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날이 겨우 적당해서 억지로 걸었다. 


날이 겨우 적당하다는 것은, 이제 두려운 여름이 시작되기 일보 직전이라는 감각이 준 어떤 다급함이다. 벌써부터 마스크 속살에 부딪는 내 숨결에서 벅찬 뜨거움을 느낀다. 인중에는 늘 땀이 맺혀 있었다. 햇볕이 더 뜨거워지고 그것을 식혀줄 기단氣團마저 비어버린 자리에 내가 걸어볼 길은 지워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름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가 너무 쨍한 태양 아래서 정신을 잃어버렸듯, 열기는 나의 그것을 앗아가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작열 속을 걷는 감내의 시간 속에 내 안에 떠오르는 것은 위기의 싸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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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송해길, 낙원상가의 풍경


그래서 걸었다. 송해길은 너무 가까이, 아니 이미 영화모임을 마친 그 순간부터 내 발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급함이 등을 떠미니 송해길이,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낙원상가가 나를 수월히 당겨낸다. 사람이 많았다. 고개 돌린 어디서나, 아직도 타는 젊음을 추억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에서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는 '지옥의 문'을 보는 듯하다. 넘쳐흘러버린 유독 가스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으로서 불을 지핀, 아직도 빨갛게 타고 있는 그 구덩이와 같이… 청춘이라는 이산화질소가 이미 시간의 그릇 너머로 흘러넘쳐버린 이들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거기 아직까지도 젊음을 부르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어르신들이 가득 찬 거리로는 알 수 없는 냄새가 풍긴다. 그것은 정력적이면서도 쇠락한 냄새다, 강렬히 말라 있는 것 같은. 앙상하면서도 힘찬 조각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아니, 굽어진 등 아래로 이어진 어느 힘찬 광부의 손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주름이 가득하면서도 힘줄과 핏줄이 돋아난 손잔등의 이미지. 그러니 응당, 내가 시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 아름다운 쇠락이 다시 나의 젊음을 꺼내 걸어 내 눈앞에 흔들면, 그것이 어떤 감상과 감정을 불러일으켰겠는가. 


그간 내 글이 너무 불친절한 것 같아, 그리고 누군가 내게 의도찮게 가르쳐준 바대로 조금 더 적어보자면, 그것은 젊음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초상이고 내 지금 젊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단초이다. 청춘이 청춘에게 너무 아깝다는 그 말이 가리키는 바로 그것, 그것은 젊음이 그 순간 속에서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고로, 이제 지나버린 것들이자, 여전히 타인의 것들이자, 잃어버린 것들로서의 젊음, 말리어 박제한 젊음을 바라보고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바로 그때완 달리, 공기 같은, 생명 같은, 누군가 거저 주신 은혜 같은, 어버이가 마련한 일용할 양식 같은 지금의 젊음이란 적극적인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지-인부한 말이다. 바라보지 않고 인식되지도 않으면, 낭비되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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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젊음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것, 젊음이 다 지난 후 낭비라는 인식의 태그를 달고서 갈무리되기 위해선 단연 후회가 먼저 서야 한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는, 않을 자에게는 해당 없을 말이다. 나의 역사는 후회로 쌓아올린 탑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후회할 나에게는 이런 생각이 자연하게 솟아난다. 아름다운 쇠락, 이런 것들을 물끄럼 치어다 보고, 또 남몰래 노트에 적는 나에게는 이런 원리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의적 워딩이 결코 그들에 대한 우월의식이나 특권의식의 발로가 아니라는 것을, 읽는 이들께서 먼저 알아두셨으면 한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타인을 바라보는 하나의 짓궂은 방식이라는 것을 밝힌다. 개입할 수도, 긴밀히 관찰할 수도, 파악할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완벽한 타자를 그려본다는 것은 그 시작에서부터 오해가 단단히 자리할 수밖에 없는 어쩜 위험한 일이라지만, 그럼에도 쓰는 것이란 관심의 한가지 얼굴이다. 온유하고 끈질기게 관찰하고 서서히 스며들어 반쪽짜리로나마 충분히 이해해보는 방식이 내 몸엔 맞지 않아, 그럼에도 남몰래 바라보며 적는 이 비약으로 된 스케치에 완전히 말리어 냄새를 휘발시킨 은유를, 우악한 손아귀로 한 움큼 쥐어 가져다 대보는 것이 나의 악취미이다. 그러니까 마실 것을 사드리며 인터뷰를 하고, 다큐3일의 취재진들이 그러했듯, 그들과 충분한 시간을 나누어 그들의 마음속에 조금 스미고 돌아와서 글을 써내기에는 내가 너무 내성적이고 나태해서, 나는 차라리 혼자 데생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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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저씨들과 젊음


골목에 걸치어 담배를 물고선 몰래 아저씨들을 치어다본다. 어떤 아저씨들은 이 시공간에 녹아들지 못하는 나를 인식하고는 똑같은 응시로 응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깊지 않았을 관심은 식어버리곤 고개를 돌린다. 막걸리로 불콰하게 달아오른, 붉은 아저씨들이 뛰어다닌다. 겅중겅중 도로를 건너다니고 멀리 있는 이에게 인사하고, 그가 인사를 보지 못하면 크고 당차게 소리 지른다. "어---!이, 여기야!!!" 또 어디론가 부리나케 뛰어다니고, 마치 소년들이 으레 그랬듯, 사실 그리 대단치도 않은 것들이나 자기네 무리에서는 대단히 중대한 사안인 양, 비장하고 신중한 목소리로 공모하는, 그런 모습들로 송해길이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을 지나다니는 젊은이와 커플들도 참 많았지만, 여기서는 그 누구도 어르신들의 자취와 향기와 취향을 밀어낼 수 없었다. 여기서는 우리가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거리 거리가 '누군가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은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나는 눈과 손으로 스케치해보다간, 그들이 내게 젊음이란 것에 대해 은연중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에 미친다. 아무도 나를 치어다보지 않았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 주변에 어설프게나마 관계를 맺고 있는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내게 젊음에 대해 알려주고자 했었다. 그러니까 젊음이 젊음에게 얼마나 아까운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려고 3시간 동안이나 나를 세워두곤 했었다. 그 이야기들은 귓전을 맴돌다간 퉁기어 나갔지만, 그 훈련이 지금에 와서 이런 방식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저씨들은 각 다른 표정을 하고 나를 스치어 지나간다. 유쾌한 이, 우악스러운 이, 우울해 보이는 이, 무기력한 이, 여전히 내성적인 이들이 거기 다 있었고, 어딘가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 여인을 기다리는 이, 추파를 던지는 이, 술을 마시는 이, 언성 높여 싸우는 이, 약속을 맞이하는 해맑은 이의 표정이 거기 다 있었다. 그 얼굴들은 내 안에서 뭉뚱그려지고 젊음의 역사에 대한 몇 가지 초상을 그리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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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춘과 젊음에 대한 기존의 생각


내 안에서 그려본 사람의 일생을 속성 내지는 비중으로서의 젊음이라는 잣대로 그래프 화해보면, 달리 말해 단순 수치화하여 사람의 일생을 생각해보면, 20대를 수치 100의 '젊음 속성'과 1의 '역사성'으로, 60대를 2의 젊음 속성과 41의 역사성으로 지표화하는 어떤 반비례 그래프 위에서, 그 개인의 역사가 돌아보기 충분해지는 지점인 대략 5~60대 즈음에, 보이게 될 어떤 값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왔다. 2의 젊음과 41의 역사성을 지닌 이는 100의 젊음을 기억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잊을 수 없는 것들로서, 그 해상도만을 달리한 채 박제되는 까닭이다. 그것을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하는 정도가 여기서는 뭉뚱그려져 역사성이라 일컬어지고 그 안에는 추억의 작동원리와 동력이 전제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제된 아름다움은 영영 표정을 지어낸다. 시간에 따라 미묘한 다름을 배태하고선 말이다.


일생이라는 이름과 두 가지 함수를 가지는 평면 좌표계, 그 표준지표인 20대(x의 최솟값 = 20, 20세 이전은 고려치 않기로 한다)로부터 시간이라는 x축을 따라 두 가지 그래프가 교차한다. y(1)=100/(x-19) 그래프는 x값을 증대시킴에 따라 젊음 속성(y1)이 빠르게 줄어들고, 젊음 자체로 대변되는 표준지표 (20,100)의 값으로부터 매우 빠르게 멀어지고, 또 그러는 사이 y(2)=x-19 그래프를 따라 기억할 개인의 역사(y2)가 꾸준한 속도로 증대된다는 것은 탐구할만한 것이다. 아 너무 딱딱하게 써버렸나? 여하간 영영 아름다울 젊은 시절에 대하여 짓는 표정이 시간 축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 대한 호기심, 소실되는 젊음 속성과 증대되는 역사성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으리라는 추정이, 5~60대로 가득 찬 이 드문 거리 위에서, 충분한 표본들이 왈칵 들이치는 바람에 이상스러운 생각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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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 y1은 이산화질소 같은 젊음 속성이 시간에 따라 매우 빠르게 소실된다는 것과 그럼에도 영영 0이 되어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그래프이다. 그리고 y2는 시간의 똑바른 속도에 따라 정비례로 기억할 역사가 늘어나리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래프가 교차하는 지점은 29세이다. 나의 나이가 30이니까 슬슬 젊음을 추억할 때가 되었다는 희한한 논리가 선다. 5~60대일 송해로의 그들은 y2-y1 값만큼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을까? 뺄 값인 y1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 y2 값만 계속 커가는 것은 어떤 괴로움이 되어줄 것인가? y2-y1은 후회값이라고 명명한다. 이 이상한 도식은 시간에 따른 후회값을 계산하던 내 기존의 단순논리를 대변한다. 


뭐, 이미 말할 것도 없이 이 그래프는 심각한 오류를 낳는다. 아저씨들의 여러 가지 표정이 이미 그것을 부정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 그들 대부분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음을 부르짖는다는 것,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것이 반드시 후회의 형태로 화할 리가 없었다는 것, 어쩌면 의미도 없는 생각이었다. 적어도 대부분이 후회의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면, '아아 이 연구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속성을 가리키고 있어요'라고 우겨나 볼 텐데 말이다. 


그래서 아저씨들이 내게 젊음에 대해 가르쳐주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하하 젊은이, 청춘은 그렇게 쉽게 지지 않는다네, 혹은 나이가 들어 추억할 거리가 많고도 멀어진다는 것이 반드시 슬픈 표정을 낳는 것은 아니라네, 하면서. 이것은 한가지 선입견을 다른 한 가지 섣부른 생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기억하는 한,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대단히 모호하고, 아직 증명해낼 수 없는 바로 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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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억하는 한, 존재한다는 명제


빨간 아저씨들은 웃고 떠들고 싸우고 소리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기도 했다. 그건 내가 캠퍼스와 대학가에서 본 것과 닮아서, 기억이 와르르 쏟아진다. 내가 아는 모습들과 너무 닮아서, 또한 아직까지도 거기 살아 있어서… 다른 것은 오직 육체의 젊음과 쇠락함 그리고 약간의 유행 차이 정도뿐이었다. 아름다운 쇠락, 마치 오래된 건물처럼, 산 지 오래된 책처럼, 튼튼했던 추억을 간직한 뼈마디 관절처럼 많은 것들은 쇠락한다. 이런 것들에 먼저 슬픔을 느껴버릴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다행이다. 육체적 젊음이 비어버린 자리엔 하나둘 일상의 고초가 자리 잡긴 하겠지만, 그래도 튼튼해 보이는 마음들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저렇게 정력적일 수가 있다니. 


저들이 씹는 것은 얼핏 들어도, 여러 테이블을 지나치며 들어도 과거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물론 후회를 안주처럼 씹는 아저씨들이야 웬만큼 적잖았지만, 적어도 울상을 지은 이는 없었다. 종로3가가 그것을 막고 있었던지 아닌지 다 모르겠다. 새로움이 결여된 자리는 과거로 가득 차고, 나는 그 상태를 대단히 두려워한다. 그것은 침체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 속에 자리한 것들이 이야기를 통해서 되살아나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또렷해진다고 한다면, 단단히 소유된 것으로서 과거는 점차 부활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되살아난 과거, 그로 인해 다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어떤 경험들을 두고 존재한다고 불러보아도 될까. 그들은 과거 속에서 살아간다고 누군가 핀잔한들, 어떠랴, 저렇게 정력적으로 시간의 풍화작용을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모여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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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상가는 악기를 사는 이들로 조금만 붐빈다. 곳곳에는 노래방기기가 비치되어 있었고 옛날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누군가는 그걸 따라 부르고 한다. 그리고 벽면에는 여러 밴드 동아리의 사진이 밈처럼 걸려 있다. 밴드 이름이 뭐였더라, 아마존인가, 하와이인가, 뭐 그런 이름이었다. 곳곳에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이, 반주장치도 없이 노래를 부르는 이도 있었다. 그러자, 아예 잊고 있던 과거가 되살아난다. 예전에는 노래하는 것도 좋아했고 밴드부 회장도 했었는데, 그걸 아주 까먹고 있었다니. 잊힌 과거는 그것이 되살아날 때까지 아예 그 존재가 지워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 대신 누군가 기억해주는 것으로 그 사람 속에서, 또는 그 사람이 내게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과거는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젊음에 대해 가만 생각해보게 된다. 계속이 새로운 것들이 주어지고, 또 주어질 수가 있는 환경으로서의 젊음. 망각이 두려워 계속 글을 쓰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것들은 살아남을까. 내가 씹어볼 과거들이 넉넉히 남아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여러 번 꺼내 되씹어 삼키고 또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할 나의 과거들을 대신해, 그 존재를 지켜줄 이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꾸준히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젊음에 누려볼 것들에 대해 골몰하는 것 말고도, 젊음과 순간을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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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상가 4층에는 야외정원과 낭만극장이 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알게 되었다. 옛날이라는 단어를 낭만으로 바꿔써 둔 극장, 상영 중인 영화를 알리는 것으로는 전광판을 대신해 그림이 걸려 있다. 사위를 돌며 사진을 찍었다. 세상에 '소돔과 고모라'와 '십계'라니… 눈을 다시 떠보아도 그렇다. 시간에 잔뜩 바래버린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러니까 저 모습은 누군가의 기억을 꺼내어주기 위하여, 옛날 모습 그대로 여기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이지…? 지금에야 그런 생각에 미친다. 마침 이 적막한 곳에 노인 두 사람이 지나간다. 두리번거린다.


사진을 찍고 신기해하는 나보다도 더, 두 사람은 오래 서성거렸다. 저 앞에서 무슨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을까. 만약 그것이 잊힌 기억이었더라면, 다시 살아온 지금 무슨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것일까.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럴 용기도 없거니와, 들은들 공감치 못할 것 같아서. 차라리 30년 후의 이 영화관에 어떤 영화가 걸려줄 것이며, 나를 기다려줄 것인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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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고 지난번에 썼지. 그 생각은 변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어질 따름이다. 쇠락한 곳들 위에 피어오르는 과거의 추억으로서, 여전히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과 이야기로서, 지나버린 것들과 지금 것들의 공존함으로써, 시간은 내 앞에 현현한다. 과거와 지금과 그렇게 다시 그려진 미래로, 감각되는 시간의 품이 확장된다. 넓어진다. 


아저씨들과 쇠락한 공간과 송해길과 낙원상가와 낭만극장이 내게 젊음에 대해 이야기하는듯하다. 과거의 젊음이 지금에게 말해온다. 하하 젊은이, 지금은 지나가는 것이고 지금도 자네의 손 틈 사이로 흐르고 있는 것이라네.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도저히 다 알 수란 없는 것,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요 속으로 물어보았다. 기억해내는 것이지, 그리고 지치지 않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누군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스물아홉에 취직을 했구요, 그 해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구요, 서른에 아트인사이트로 다시 돌아와 좋아하는 글쓰기를 다시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또, 있잖아요. 회사 업무에 적응해가는 즈음에 봄이 찾았고 나는 조금 변한 것 같아요. 변하는 중인 것 같아요. 


아 참, 이태원 밑의 보광동으로 이사해서 우사단길을 많이 갔고, 캠퍼스도 종종 찾았어요. 인촌 기념관 앞의 아무도 찾지 않는 소나무 그늘 아래도 종종 찾았어요. 잊지 않았겠죠? 나는 이때 변하는 중이었다는 것을 적어두고 싶어요. 다 적기는 민망할 정도로 미약한 것들이 대부분이라서, 아마 많은 것들은 저 멀리서 이미 변화한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나는 바로 지금 변하는 중이라는 것을 적어두고 싶어요. 아트인사이트가 있는 한, 내 글의 연월일이 남아있다면 알아볼 수 있을 테지요? 적었듯 종로를 많이 다니고, 이름 없는 카페들도 많이 다니고, 아무튼 집 밖으로 나를 끄집어내는 중이구요, 코로나에 걸려서 미루고 미루던 서재도 만들었고 이쯤 영화모임에 참 많이 참여했고, 또 연월일이 거기 있다면 알아볼 수 있을 테지만, 글을 되게 많이 쓰고 있어요. 


어떻게 변했는지는 다른 글을 찾아보시길, 그럼 이만, 미래에서 만납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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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다음 글 - 종로 스케치4, 인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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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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