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스크 속으로 숨겨버린 감정들에 관하여 [사람]

입안에서만 웅얼거렸던 고백을 밖으로 꺼내 보려 합니다.
글 입력 2022.05.07 14:4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그간 마스크를 통해 필사적으로 감춰왔던 속내를 고백하고자 한다.

 

처음 마스크를 꺼내 들어야만 했던 그 혼돈의 시작점을 떠올려본다. 당시 나는 가족끼리 서로 알 만큼 오래 교류한 친구와, 친구의 동생, 그리고 친동생 이렇게 넷이서 강릉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판데믹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우리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주변에 누가 왔다 갔었는지와 같은 사안이 더더욱 예민하고 중요하게 지각되던 시기였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바이러스가 가까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마스크를 동앗줄처럼 꼭 붙잡았다. 모두가 그랬겠지만 내게 있어서도 이 모든 과정이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건, 마스크라는 게 일종의 피부처럼 죄 달라붙고 더욱이 그 안으로 숨어버리는 게 익숙해지기 전의 일이다.

 

 

우리[포맷변환][크기변환]옥상.jpg


 

공포와 두려움, 불안감으로 점철된 가운데 사람들은 주입된 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이전과는 달라진 삶에 적응해갔다. 나 역시도 그랬다. 오히려 마스크를 쓰는 삶으로 도입하며 편하게 느낀 부분도 있었다. 더 이상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그러했다.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정도가 지나쳤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이전의 나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를 의식하고 그 안에만 매이는 바람에 대화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울 때가 잦은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책을 읽는데 활자를 읽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한 나머지 책의 내용은 전혀 포착하지도, 흐름을 쫓아가지도 못하는 상황과 같다.

 

가장 무서운 상황은 상대가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해줄까?” 하는 말을 꺼낼 때다. 보통은 이런 문장에 설레게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럴 때도 있다. 그런데 상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반응을 보여줘야겠다는 결심이 불쑥 고개를 들면 그대로 경직돼버린다. 그에 합당한 표정을 짓지 않으면 상대가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재밌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지표가 되는 표정들을 지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머릿속이 포화된다.

 

문제는 한 번 표정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곧 관계 전체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혼동된다는 것이다. 단지 그 시기에 특정 주제를 두고 불편함을 느꼈던 것인데, 앞으로도 또 그런 상황을 마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방어본능처럼 일어나 상대방과의 사이에 균열을 일으킨다. 언젠가 이러한 나를 두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내가 대면하는 타인에게는 전부 완충재가 하나씩 달린 것 같다고. 어느 날 그 상대를 대면해 대화하다가 표정이 부자연스럽고 경직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그것은 완충재를 눌린 거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한 번 터진 완충재는 회복 불가하듯, 그 상대방을 대면할 때는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막역한 사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에게도 돌연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면 나는 최대한 빠르게 털어내고자,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았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상실감이 압도할 것이 두려워 고안해낸 방어기제였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이러한 현상이 가족에게까지도 적용됐다. 나는 적어도 엄마에게는 유쾌하고 재밌는 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두 번 다시 그런 식으로는 대할 수가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 날 자꾸만 부자연스럽게 대응하는 나를 두고 농담조로 왜 그러냐고 가볍게 웃음 짓는 엄마에게 내 속사정을 말 했을 때는, 이미 울고 있는 채였다.

 

내 이러한 특성을 사람들에게 말로써 명확히 전하기가 어려웠다. 정상적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복잡한 속내는 뒤로하고, 그저 '낯가림이 심하다'는 단순하고도 쉽게 수용될 만한 문장으로 대체해 내뱉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리뷰를 쓰기 위해 읽은 『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라는 책에서 나를 변호해줄 구절 하나를 찾아냈다. 책에 등장하는 구썬시는 비극적 사건을 겪었으면서도 그 사건을 곧잘 떠올리지 못한다. 이를 두고 그는 다음과 같은 이론을 근거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보려 노력한다.

 

“오늘 생물 시간에 생물의 본능에 대해 배웠어. (중략)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생물이든 해로운 것을 피해 생존에 이로운 것을 찾아가는 본능이 있다고 해. 자연스럽게 자기가 다치지 않을 환경을 선택하고, 자기가 편하게 느끼는 환경, 자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하는 거지.”

 

내 경우도 위와 같은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표정이 경직되면 그 관계를 위험 인자로 인지함으로써 더욱 편하고 유리하게 생활을 이어 나가도록 인체에서 신호를 보낸다는 것. 이것은 일종의 오류이자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본능적 측면에서 보면 비정상적인 현상은 아닐 것 같다. 사람마다 어려워하는 점은 제각기 다른데 나는 위와 같은 상황을 극도로 어려워하는 것이고, 불편한 것을 피해 더 안정된 삶을 영위하려는 건 본능적 특징일 뿐이니까.

 

*

 

이제껏 살면서 내 이러한 특성에 관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챈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W였다. W는 원래도 예리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친구이긴 했다. 내가 극도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도 W였으니. 아주 간단한 예시로 고등학교 때 다 같이 모여 앉아 급식을 먹으려 하면 W는 내가 무의식중에 젓가락과 숟가락의 길이를 자로 잰 듯 맞춰 놓은 것을 포착해냈다. “근데 너는 또 너만의 규칙이 있더라?” W는 내가 늘 정각을 맞추는 게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는 삐뚤어졌을지라도 내 기준에서는 안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각으로 맞춘다는 사실까지도 짚어냈다. W는 내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보인다면 불편해할 것을 염려해,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방향으로 바꿔놓곤 했다. 별거 아닌 행동일 수 있지만 세심한 관찰력과 배려가 아니라면 쉬이 행할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다 W의 완충재도 터진 것만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나는 한 아이돌을 좋아하고 있었다. 잠시 나에 관해 말하자면, 늘 무언가에 꽂히면 깊이 파고들어 속속들이 알아내고 천착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에게 해당 아이돌에 대한 온갖 정보를 흘리곤 했다. 그렇게 W도 나와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게 됐다. 다른 가수의 팬이었던 W에게 열심히 영업해 내가 속해 있는 팬클럽으로 끌어들인 탓이다. 우리는 공식 방송이나 콘서트에도 함께 가고 늘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며 덕질을 해나갔다.

 

문제는 W가 아이돌에 관한 어떤 사실을 내게 말 했을 때 벌어졌다. W의 말에 내가 “그래?”하고 묻자, W로부터 “너 몰랐지!”라는 반문이 돌아왔다. 물론 농담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존심이 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덩달아 표정도 경직됐던 것만 같다. 어쩐지 W에게 해당 주제를 꺼내면 또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해당 주제를 꺼내는 걸 필사적으로 기피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진심으로 해당 아이돌을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아이돌을 좋아하고 속속들이 전부 다 아는 나 자신에 심취해 있던 건지를 모르겠다. 

 

그날 이후 W를 대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W가 해당 주제를 꺼낼까 두려워서 노심초사했다. 평이한 대화를 하거나 장난을 칠 때는 거기에 오롯이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내가 기피하는 어떤 주제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방어기제처럼 팍 고개를 들면 다시금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표정 관리를 잘하는 데만 온 신경을 썼다.

 

그즈음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소식이 돌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로부터 마스크를 꼭 써야 한다는 지령이 내려졌다. 나는 그걸 무시할 수 없다는 듯, 미세먼지를 빌미 삼아 마스크를 썼다. 그렇게 W를 만났다. 눈치가 빠르고 세심하게 상대의 동태를 살피는 W는 내게 왜 마스크를 썼는지를 물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일지 모른다. 그저 내 감정을 W에게 투사해, 그가 모종의 속내를 가지고 물은 것이라고 억측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나는 혹여 W가 또 무언가를 눈치챈 것일까 두려워 재빨리 미세먼지를 핑계 대며 그 애에게도 마스크를 내밀었다. 마스크 속으로 나를 감추면 편안해졌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을 만날 때도 마스크를 쓰고 만날 때가 잦았다.

 

 

우리[포맷변환][크기변환]달력.jpg

고등학교 재학 당시, W는 내 달력에 낙서하기를 즐겼다. 끊임없이 밀어내는 나와 다르게 W는 불도저처럼 끈덕지게 직진해왔다. 우리의 관계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달력을 보자니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글은 특정 주제를 다루는 만큼 W와의 기억에 대해선 단편적으로밖에 접근하지 못 한 게 아쉽다. 내게 있어 W는 단 문장으로 정의하긴 어려울 만큼 재밌고 소중한 친구다.

 


이후에는 반수를 한답시고 자취방을 고시원 삼아 틀어박혀 공부할 때가 잦았기 때문에 사람과 부딪칠 일이 잘 없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더더욱. 이후 나는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고 거기에 적응하느라 바쁜 생활을 보냈다. 내가 뭘 하든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던 생활과는 달리 새로운 환경에 놓이고부터는, 마스크 속으로 나를 감추며 살아갈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방법을 연습했다. 사람을 대면하기 직전에 놓이면 거듭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내 표정이 어떤지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대로 대화에 집중하고 관계에 온전히 집중할 것. 앞선 비유를 다시 끌어오자면, 책을 볼 때 문장에만 꽂혀서 읽는 데만 그치지 않고 내용 전체를 집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거 같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학교에 당도하려면 거쳐야 하는 학교 근처 횡단보도에 앞에 서서 나는 속으로 늘 주문처럼 외친 뒤에 발걸음을 뗐다. 내게 하루하루는 늘 자신 안에만 매몰되려는 나와 타인과 자연스럽게 섞여 들려는 시도 사이에서 벌이는 사투의 연속이었다. 남들에겐 별거 아닌 일일지 몰라도 나는 그랬다. 겉으로는 평온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비쳤을지 몰라도 속에서는 늘 작고도 쟁쟁한 걱정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코로나가 창궐했고 나는 다시 한번 마스크 속으로 나를 숨기게 되었다. 이제는 전과 달리 내 표정에만 정신이 팔릴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과 대면할 때 내 표정에 신경이 쓰이게 되면 그것을 방지하고자 반사적으로 턱을 괴는 자세를 취하면서 불편함을 호소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혹 내 안에서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느라 표정이 경직되어 상대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생활이 길어질수록 나는 여기에 적응해갔다. 동시에 내가 이전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를 망각해갔다.

 

예전의 특성에 대한 염려가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얼마 전 실외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뉴스가 들려온 뒤부터였다. 돌연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나는 이제 누굴 만나든 표정을 신경 쓰고 완충재가 터질까 조마조마한 삶 속으로 다시금 뛰어들어야만 했다.

 


우리[포맷변환][크기변환]djdndl.jpg

 

 

어제는 망연히 창문 밖을 내다봤다. 고층 아파트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어떤 모습을 하고 다니는지 잘 보이질 않았다. 그저 나는 거대한 아파트 모형을 주조해놓고 그 안에 개미만 한 크기로 설치해놓은 사람들을 내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말하자면 거인이었다. 그들과 다르다. 그러니 그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이목이 쏠릴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도 나를 몰라서 내 표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아빠는 최근에 사주를 보고 왔다. 아빠의 말에 의하면 내 사주에는 해외로 나갈 팔자가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의아하기만 했다. 나는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명확해서 도저히 해외로 나갈 생각이 없는데 왜일까. 그런데 어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왜 그런지를 조금은 유추하게 됐다. 길거리에서 걷다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걱정되지 않는 사람들만 있었으면 한다. 망망대해에서 고래는 그 어떤 물고기도 자신의 주파수를 알아듣지 못 해 외롭게 사는 생물이라고 들었다. 나 역시 고래처럼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 파묻혀서 다른 주파수로 살아가고 싶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면 어떤 것도 맞춰주지 않고 기대에 부응할 필요도 없이, 그저 언어를 몰라 그렇다고 가볍고 얕은 웃음으로 화답할 수 있는 낯선 공간으로 가고 싶다. 내가 불쑥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게 된다면 혹 이러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 아니려나.

 


우리[포맷변환][크기변환]KakaoTalk_20220507_151943478_05.jpg

카페 [수산공원]에서, 고래와 나

 


어떻게 하면 내가 조금 더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본다. 대개 이런 상황은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것이라고 손쉽게 결론지어진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도 전부 나 자신을 사랑하라, 라는 조언들이 판을 친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쉬웠으면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쪽이 더 편하고 좋을 텐데 진작에 다들 그쪽을 택하지 않았을까? 그 이전에, 이와 같은 현상의 원인이 과연 그렇게 단편적일까.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그러하듯 단 한 문장으로 갈무리할 수 없을 만큼 각종 원인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혀 있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엇비슷한 대답만 천편일률적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기실 그만큼 답이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나 역시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 고찰하면서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으니.

 

단 한 가지, 나는 방법은 몰라도 생각을 전환해볼 수는 있다. 표정은 감정을 드러내는 가장 투명하고 일차원적인 통로라는 점을 되새겨본다. 나는 내가 지을 표정이 타인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필사적으로 긍정적인 표정만을 짓고자 애를 써왔다. 그런데 표정은 마음껏 불편해하고 그것을 티 내라고, 기꺼이 부자연스러워지라고, 그렇게 자신을 방어하라고 있는 수단이기도 하지 않나. 그런데 너무 타인을 위한 시도에만 매달려왔던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속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은 평판을 얻고 싶다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더욱이 인간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며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하는 입체적인 동물이라는 점을 떠올려본다. 예전에는 밝았다가도 어두워질 수 있고, 또 다시금 밝아질 수도 있다. 또 어제는 해당 주제를 두고 웃었다가도, 오늘은 무표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꾸만 이전의 나를 어떤 기준점으로 삼으며 그 안에 예속되려는 것은 다소 폭력적인 게 아닌가 싶다. 나 자신의 다양성을 나조차 무시한 채 가면만을 쓰고 살아가는 거니까. 게다가 표정은 어떤 감정을 일방향성으로만 나타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즐겁다고 해서 반드시 웃는 게 아닌데, 너무 도식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왔던 것만 같다.

 

무엇보다 내가 상대에게 어떤 표정을 짓는 것이 부정적인 표정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그것은 영구적인 게 아니라 한시적인 반응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해야겠다. 그렇게 일시적인 상황을 잣대로 관계 전체를 좌우하려는 시도 자체가 과하다. 더욱이 나를 가까운 존재로 여기고 있을 누군가를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순간에 단절하고 선을 긋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방식이지 않나.

 

감정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행동을 만든다. 그러니 이 모든 문제는 전부 타인과 외부에는 일절 존재하지 않고, 내 사적인 감정과 생각에서 비롯된 것들일 수 있다. 내가 자의식 과잉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스스로 되새김질해야겠다. 좀 멀리 보고 싶다. 내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어느 한 지점에 꽂혀 있지 말고 시선을 주위로 분산시키고 싶다.

 

지금 내 앞에 닥친 이 상황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돌파해나갈지는 모르겠다. 이전처럼 시달릴 수도 있고, 이전보다는 괜찮아졌을 수도 있다. 그저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아니 사실 도망쳐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안온해졌으면 좋겠다. 혹 나와 닮은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당신의 내일도 조금은 편안해지기를 바란다.


 

 

추예솔 (1).jpg

 

 

[추예솔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55099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