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와의 기억들 [영화]

아직까지 나에게 영화는 온전한 황홀이자 새로운 경험의 통로다
글 입력 2022.03.2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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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아빠가 주말마다 보던 TV 영화채널에서는 총성과 함께 등장한 주인공을 다들 죽이려 달려들고 주인공이 가소롭게 모든 공격을 피하는 광경이 쏟아졌다. 영화 내내 얼굴을 찡그리며 연기하는 배우들이 무서웠고 전반적으로 아빠가 보는 영화는 대부분 어딘가 정신 사나웠기 때문에, 투니버스를 틀어서 짱구나 코난을 보는 편이 훨씬 즐거웠다.


영화를 아예 안 보지는 않았다. 내용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뿐 극장에 갔던 기억만은 분명히 남아있다. 처음으로 영화관에 간 것은 2005년이었는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며 영화관 의자에서 쉴 새 없이 꼼지락대다가 엄마한테 혼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잤다. 같은 해 보러 갔던 <샤크보이와 라바걸의 모험 3D>는 여자 주인공의 머리가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 나도 저런 머리를 하고 싶다 생각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2009년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아바타> 역시 나에게는 그저 검은색 안경 끼고 보는 영화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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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에서 내용이 온전하게 기억나는 첫 영화는 <아바타>와 거의 동시에 개봉했던 <전우치>다. <아바타>를 보고 불과 며칠 뒤에 <전우치>를 보러 갔는데 하나는 전혀 생각이 안 나고 나머지 하나는 기승전결 그리고 마지막 반전까지 뚜렷하게 기억나니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영화의 쉽고 재치 있는 이야기도 한몫했겠지만, 조금 머리가 크고 나서는 강동원과 임수정의 엄청난 아름다움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려도 보는 눈은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나는 <전우치>를 통해 영화도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자주 보러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해리 포터> 시리즈나 <명탐정 코난> 극장판처럼, 좋아하는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보는 정도가 다였다. 투니버스에서 해주는 만화들이 예전보다 재미가 없어진 이후에도 그냥 만화책을 읽었지 굳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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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영화가 좋다고 느낀 것은 2013년의 일이다. 엄마와 언니를 따라 당시 개관한 지 반 년도 안 된 신촌아트레온 CGV에서 재개봉한 <시네마 천국>을 봤다. 눈앞에 펼쳐진 영화 속으로 마음이 빨려 들어갔다. OST 'Love Theme'과 함께 알프레도가 사랑의 순간을 편집한 필름을 나이가 든 토토가 보는 장면은 아직도 나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처음으로 음악이 얼마나 영화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고 영화가 사람에게 어떤 경험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처음으로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상영관을 나선 이후부터는 영화관의 분위기와 공기가 어딘가 이전과는 달랐다.

 

그때부터 나에게 영화는 온전한 황홀이자 새로운 경험의 통로였다.


아는 얼굴의 배우가 나오면 그 배우의 지난 행적을 훑어보는 식으로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옛날에 봤던 <전우치>의 엄청나게 잘생긴 도사가 떠올라 그가 나왔던 <의형제>나 <초능력자>를 찾아보았다. 그 밖에도 당시 인터넷에서 문화상품권으로 다운로드해 볼 수 있는 강동원의 영화라면 모조리 찾아보았고, 이후 <군도:민란의 시대>를 시작으로 영화관에도 열심히 드나들었다.


관심은 끝도 없이 가지를 쳤다. 한 영화의 연출이 마음에 든다면 그 감독의 영화들과 그 감독이 오마주한 다른 영화들까지 모조리 보았다. 학교가 끝나면 영화관에 가서 새로 배치된 영화 포스터를 훑으며 단순히 포스터가 예쁘다는 이유로 볼 영화를 결정하기도 했다. 명절 특선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검색창을 통해 TV 채널들의 주간 편성표를 확인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영화를 해주면 방송시간을 따로 적어두었다. 물론 막상 보고 나니 '이게 대체 무슨 영화야'라는 생각이 들고 경악스러운 영화들도 많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욕을 하면서까지 결말을 봤고 그 안에서 좋았던 점을 찾으려 애썼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 정도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건지, 무언가에 무조건으로 빠진 사람의 추진력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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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옛날만큼 열정적으로 영화를 찾아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봤던 영화를 보고 또 보는 편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양을 봤을 때 막상 영화를 많이 본 편도 아닐 것이다. "너 아직 그 영화도 안 봤냐"라는 소리를 종종 들을뿐더러, 아직 '영화를 좋아한다면 꼭 봐야 하는 엄청난 명작' 같은 수식이 붙는 영화 중 안 본 게 수두룩하다. 고전 중 고전이라는 <라쇼몽>은 보다 졸았고, 많은 사람들의 인생작이라는 <대부>는 교양수업 발표 준비를 위해 줄거리 요약본만 봤을 뿐 딱히 끌리지 않아 아직까지 보지 않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시네필'은 한참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건, 나는 영화가 좋다. 각각의 영화를 보면 각각의 감정을 느낀다. 같은 영화를 다시 볼 때도 처음 봤을 때와 지금의 감상이 달라진다. 영화의 흐름을 타는 2시간은 나를 잠시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 세상에서 나는 온갖 부정부패로 민란이 일어나는 과거에 있기도, 해수면이 상승해 많은 나라가 잠겨버린 미래에 있기도 하다. 대체 왜 옛날에는 영화를 별로 안 좋아했지? 이렇게 좋은 걸.

 

영화를 언제까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구독 중인 수많은 OTT 서비스에서 찜해둔 영화들을 다 보기 전까지는 좋아할 것 같다. 아직까지 나에게 영화는 온전한 황홀이자 새로운 경험의 통로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여서. 어릴 적의 나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요즘 나는 가끔 아빠가 보던 '정신 사나운' <본> 시리즈나 <007> 시리즈도 본다. 생각보다 꽤 재미있고 액션은 멋있어서 눈이 즐겁다. 크고 나서 자세히 보니 배우들의 인상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도 않다.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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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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