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환상의 나라 - 테레사 프레이타스 사진 展

파스텔 핑크로 된 환상의 나라로
글 입력 2022.02.1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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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위해 집을 나섰다. 봄인가 보다. 겨우내 나의 방은 문자 그대로 추웠다. 새로 이사 온 전셋집에 도시가스가 안 들어오다니... LPG 난방은 정말이지 비쌌다. 어릴 때야 가끔씩 배달 온 가스통 굴리는 소리를 낭만쯤으로 여겼으나, 현실의 겨울은 이래저래 사정이 복잡하다. 이런 전처로 어버이가 어린아이에게 내복을 입히던 그 복잡한 심경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현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 한편 낭만도 이렇게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려나.

 

여하간 이런 실 없는 생각도 끝이다. 차가운 북동풍이 멎고, 비교적 따순 바람, 북서풍은 먼지를 몰고 오지만, 일단 따뜻한 게 제일이다. 뿐만이랴, 하늘은 신비하게도 계절마다 낯빛을 달리한다. 창백한 겨울빛에 조금씩의 생기가 찾기 시작한다. 아직은 봄빛의 전조, 그래도 이런 예감은 날 다시 설레게 한다. 간직하고 있던 그리운 봄들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자연이 순환하듯, 내 마음도 순환한다. 무엇보다도 온도에 따라, 그리고 계절의 낯빛에 따라, 나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것들에 휩쓸리어 살아가고 있었다. 겨울은 창백한 시기, 그때 마음의 색은 눈 내리는 하늘의 색깔인 페일블루그레이이다. 그래서 다시 사람들이 한강 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둔치에 돗자리를 깔고, 꽃이 피고, 천지가 연둣빛 춘곤증에 물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내 감정도 딱 그 색과 닮기에.

 

 

테레사 프레이타스 사진전_공식 포스터.jpg

 

 

프레이타스 사진전 팸플릿을 보자마자, 고민도 하지 않았다. 결정장애가 있는 나로서는 놀라운 일, 그만큼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렷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색감, 가서 내가 무얼 보고 무얼 느끼고 올지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훤하다. 매마른 망막에 따스운 색감을 마구 퍼넣어, 겨우내 황량해진 심상의 팔레트를 꾹꾹 채워와야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여의도 '더 현대'의 맨 위층에 위치한 전시관, 굳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구경을 했다. 곳곳의 녹색 조경이 눈에 띄고, 5층 즈음엔 머물고픈 정원이 있다. 관람을 마치면 저기서 커피 한잔하며 감상을 갈무리해야겠다는 들뜬 생각, 어쩌면 관람은 에스컬레이터가 2층을 지날 즈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맨 위층에 도착해 매표하는 줄에 서서 내려다보자니, 공간은 더욱 사랑스럽다.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관람 인원은 지난번의 '살바도르 달리 展'보다 훨씬 적었다. 토요일 오후라 굉장히 걱정하며 왔는데, 의외의 수확이다. 전시회를 관람하기에 딱 적당한 정도의 무리, 섹션마다 4~5팀 정도가 머물러 있다. 입구의 작가 소개를 가벼이 넘어 첫 번째 정원에 들어선다.

 

 

Rothko Spring, 2018.jpg

ⓒ Teresa Freitas, Subject Matter Art, and Artemios/CCOC - Rothko Spring, 2018

 

 

관람 횟수가 늘어날수록, 전시회란 특정 주제의 사진을 제재로 구성한 공간예술이라는 감상이 굳어간다. 특정 작가나 화풍으로 큰 틀의 주제를 잡고, 공간 곳곳에 제재인 그림들을 배치해두는 것은 기본. 나아가, 그 공간마다 섹션을 나누어 각각의 테마를 설정하고, 제재들에 걸맞은 분위기로 공간을 꾸며 놓는다. 그로써 그림을 보다 입체적으로 감상케 하고,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을 넘어 공간 전체를 음미케 하는 것이다. 뿐 아니라 섹션 사이 사이에는 작가의 말이나, 설명 등의 글귀를 배치해두어, 자연스레 다음의 공간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섹션과 섹션 사이에 가상의 통로를 형성해, 이 공간 전체를 하나로 이어진 것, 유기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게끔 한다.

 

섹션 1엔 꽃의 사진들을 모아두었다. 이 인공정원의 꽃 중 단연 으뜸은 위의 'Rothko Spring'. 다시 보아도 황홀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실물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핑크뮬리의 사진들과 조화로 된 오솔길을 지나 중앙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이 다홍빛 양귀비 앞에 서서, 충분히 호흡을 골랐다.

 

설레는 다홍을 한껏 머금고, 호흡을 고른 다음 그의 사진들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작가는 파스텔 핑크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그의 사진 세계 안에는 언덕의 둔치 위로부터 저 끝까지, 바다와 하늘과 그림자를 제외하고 모두 핑크색에 젖어 있다. 한참을 뜯어보다가 이건 상상의 세계라는 결론을 내린다. 현실의 피조물 위에 심상의 색상을 입힌 가상, 평야와 나무까지 모조리 분홍빛에 물들어 있는 그 세계를 상상하며, 장차 전시회가 내게 어떤 가상의 현실을 보여줄지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Neighbourhood Layers, 2018.jpg

ⓒ Teresa Freitas, Subject Matter Art, and Artemios/CCOC - Neighbourhood Layers, 2018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사진은 분명 현실의 복제, 작가의 의도가 잔뜩 담긴 채로 형성되는 현실의 파편이다. 거기에 몇 가지 요소들이 더해져 형성되는 것. 대표적으로는 구도, 그것은 일상의 시간과 안목으로는 발견하기 힘든 현실을 포착해, 현실을 새로이 바라보게 하는 힘. 그리고 영원성은 스러질 찰나를 영원으로 만들어, 현실을 보다 소상하고 다정하게 관찰할 수 있게끔 한다. 스러지는 포말을 멈추어두면, 우리는 비로소 그 안의 수많은 거품을 세어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진은, 현실을 상상하게 한다. 프레임은 작가가 수없이 고민한 끝에 결정된 현실과 여백의 경계, 나는 언제고 사진에 매료된 다음이면 프레임 너머를 상상하곤 한다. 일종의 '무지개다리 너머' 같은 것, 이건 내게 흥미로운 현상이다. 현실의 제한된 복제를 통해 실재하는 현실을 상상으로 재구성하게끔 만든다니. 나는 이러한 관찰의 방법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일상을 조금 더 다채로이 바라보게 한다고 믿고 있다.

 

예컨대 위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여긴 어딜까'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이런 낭만적인 공간이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비판의식, '만약 바다 건너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프레임 바깥에는 어떠한 건물, 어떠한 마을, 어떠한 도시가 형성되어 있을까'. 마침내는 이곳을 거니는 나에 대한 상상에까지 도달해 있는 것이다.

 

빈약한 내 상상력으로는 곧 한계에 부딪히지만, 건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넘어서, 좌측 편, 왠지 바다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곳을 향해 고개 돌리면, 즉 다른 구도에서 바라볼 때엔 이 사랑스러운 마을이 어떻게 새로이 다가올지에 대해서 상상력을 전개해보다간 머리에 쥐가 나서 이내 그만두었다.

 

 

Inside the Maze, 2019.jpg

ⓒ Teresa Freitas, Subject Matter Art, and Artemios/CCOC - Inside the Maze, 2019

 

 

본 사진전에는 위에서 언급한 사진의 보편적 요소 외에 한가지 요소가 더 마련되어 있다. 색상이다. 아무래도 이 사진들을 구성하는 색상 중 일부는 작가의 의도로 읽힌다. 이것은 세상을 새로이 바라보는 한가지 방식이다. 같은 공간도 계절마다의 볕이 입히면 제 각 다르게 보이듯, 다른 색상이 입히면 세상은 아주 다른 형태로 다가온다.

 

앞서, 핑크색 나무가 있는 상상의 들판에 대한 소개를 잠깐 했다. 이미 그때부터 나는 이 사진전의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환상인지에 대해 구분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핑크색 미로로 된 건축물이 실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느새 분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인식의 보편 기준이 사라지면, 의식은 갖가지 자유로운 방식으로 대상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까닭이다.

 

여기서 색상은 작가의 대상에 대한 인식을 엿보인다. 파스텔 핑크, 얼마나 상냥하고 다정한 감각인지. 그녀의 눈에 감각된 파스텔 톤의 세계, 그 파편들로 구성된 이 공간은 점점 내 인식 속에서 암막 바깥의 실 세계와 분리되기 시작한다. 봄을 찾아 무작정 들어온 이 미로는 어느새 환상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Pink Palm Springs III, 2018.jpg

ⓒ Teresa Freitas, Subject Matter Art, and Artemios/CCOC - Pink Palm Springs III, 2018

 

 

이 체험은 백일몽, 눈을 뜨고 꾸는 꿈 같다. 시각예술의 여러 의미 중 하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확장에 있다고 믿는바, 예술가들의 눈에 비친 다른 관점의 세계를 음미하며 인식관을 넓히는 것이야말로 내가 전시회를 찾아오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바쁜 날 대신하여 새로운 관점을 모색해 선사해 보이는 것, 이것이 내가 시각예술인들에 대해 느끼는 감사의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 '그렇게 해서 무엇이 남는가' 질문한 기억이 난다. 나는 이에 익숙함에 지루해져 버린 회색빛 세상에 상상의 물감을 칠해,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아보는 것이라고 답했다. 환상의 나라, 이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을 지금 느낀다는 것... 본 전시회는 예상보다 훨 갚진 것을 안기어주었다.

 

전시회는 내가 심상 속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색상, 파스텔 핑크를 기억 깊숙이 밀어 넣는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그녀의 세계를 모작하며 연습해볼 생각이다. 사진은 현실, 제한된 현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매일 바라보는 세계를 파편화하여 기억 속에 인화해 두곤 한다. 각자의 기억 속에도 사진들이 존재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 끊임없이 이끌리는 이유도, 결국 심상 속의 사진들을 더욱이 간직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리고 심상의 사진 위에 의미나, 색채를 입히어보는 것이 내 가끔의 소일거리. 아마 환상의 나라는 곧 희미해지겠지만, 기다린 봄이 오면, 나의 출근길에도 채 피지 않은 진달래를 수놓아야겠다. 오는 봄에는 조금 더 행복한 출근길을 걸어야지.

 


Daydream, 2018.jpg

ⓒ Teresa Freitas, Subject Matter Art, and Artémios/CCOC - Daydream,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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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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