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녀는 울지 않는다, 단지 상처받을 뿐 - 비올레타 [영화]

글 입력 2022.01.0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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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출연한 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는 실제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녀가 이런 특수한 상황을 이해한다는 게 내겐 매우 중요했다. 그것이 나의 한계였다.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는 곳에서 거리를 유지했다."

 

'에바 이오네스코' 감독

 


야심한 밤, 한 소녀가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절실한 소원에 부응이라도 하듯, 얼마 안 있어 소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눈 앞에 등장한다. 화려한 치장과 함께 강렬한 개성을 표출하는 어머니는 자신을 그린 소녀의 그림에 눈길을 슬쩍 주더니 가벼운 입맞춤으로 딸에게 화답한다. 하지만, 딸과 어머니의 입술은 닿을락 말락한 상태에서 끝내 완벽한 합일을 이루지 못한다. 아주 미세하지만 두 모녀 사이를 끝내 갈라놓고야 마는 자그마한 간극.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두 모녀의 비극이 서막을 올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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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 이오네스코'(1930.09.30 ~ ), 출처: wikipedia



예로부터 예술과 외설, 미세한 한 끗 차이를 논하는 과정에서 숱한 공방들이 가열차게 불거졌다. 때로는 인간의 새로운 가치 탐색이라는 미명을 방패 삼아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사로잡는 자극적인 이미지들로 교란시키는 사기꾼들이 등장했는가하면, 스스로를 향한 온갖 비난의 화살을 감수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신념을 프레임을 통해 표출시키려는 극소수의 전사들이 예술계에서 나름의 방식대로 고군분투했다. 뚜렷한 확신과 함께 자신의 가치관을 주저없이 밀어붙인 소수의 인간들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되는 이가 바로 '이리나 이오네스코'다.


탈장르화와 비역사성을 주창하며 새롭게 태동 중이던 포스트 모더니즘계의 대표 사진작가인 이리나 이오네스코는 초현실주의와 에로티시즘이 접목된 작품들을 통해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며 유럽 예술계의 큰 파장을 일으켰다. 흑백의 강렬한 조화가 돋보이는 그녀의 누드 사진은 에로티시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자극적인 이미지로 관심을 만들어내기 급급했다는 세간의 인식 또한 언제나 꼬리표 마냥 뒤따랐다. 예술에 얼마큼 윤리적 잣대를 개입할 수 있는 가에 관한 끊임없는 공방을 지속시킨 그녀의 작업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술계의 뜨거운 감자로 자리매김 중이다.


다만, 아티스트로서 그녀의 행보를 향한 극단적인 반응을 유발한 주된 원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의 딸 '에바'를 누드 모델로 기용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예술가였던 한 여인과, 누군가의 딸이기 이전에 모델로 취급받은 한 소녀. 영화 <비올레타>는 혈연에서 갑을 관계로 전락한 두 여성의 굴곡진 서사가 내재된 작품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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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올레타>는 어머니를 향한 애증어린 시선이 투영된 '에바 이오네스코' 감독의 자전적 작품이다. 영화는 어머니보다 예술가로서의 에고가 훨씬 강한 '한나'(이자벨 위페르)의 행보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은 자신의 경험을 비올레타라는 캐릭터에 투영시키며 그녀의 급격한 심리 변화에 주목한다. 순진한 소녀였던 '비올레타'(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는 쉽게 마주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빈자리를 애타게 찾으며 모성을 향한 애정을 애타게 갈구한다.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행복했던 비올레타는 어머니의 뮤즈 역할을 자처하지만, 한나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비올레타라는 피사체를 통한 이미지 구현이다. 공주로 만들어주겠다는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한나는 비올레타를' 자신의 카메라 프레임 한 가운데에 위치시킨다. 그 순간 한나는 말한다, "우수에 찬 눈으로 허공을 바라봐, 그리고 등을 조금 더 굽히고. 마치 디트리히처럼!" 제2의 셜리 템플을 꿈꾸며 어머니의 요청대로 비올레타는 포즈를 취한다. 안타깝게도 소녀의 순수한 염원은 원치 않는 지점에서 다소 상반된 형태로 발현된다.


자신의 딸을 전문 피사체로 취급하는 한나의 무자비한 고집은 혈연지간임에도 끝내 서로를 도달하지 못하게끔 가로막는 자장을 발생시킨다. 정작 프레임에 담긴 육체의 실소유자인 비올레타는 자신의 권리를 미처 주장하기도 전에 잡지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자신의 적나라한 나체를 마주한다. 자신의 소유권을 철저히 묵인한 채 잡지 매체에 사진을 판매한 한나의 선택은 모성이 결여된 개인의 비윤리성과 이를 기반으로 자행된 또 하나의 폭력 행위임을 은유한다. 대중의 상식 선에서 철저히 벗어난 한나의 영화 속 행보는 혈연임에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서로간의 거리를 유발한다. 영화 <비올레타>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 기인한 한계를 분명하게 내포하고 이를 서사의 주된 동력으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예술과 외설의 미묘한 차이라는 화두를 제시함과 동시에 그로 인하여 맞이한 비올레타의 극적인 심경변화를 치열하게 뒤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변화는 어머니의 영향 아래로부터 철저히 구속 당한 자신의 처지를 방증한다. 이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냉랭한 와중에도 또래 아이들이 입기에는 다소 적나라한 옷을 고수하는 그녀의 옷차림을 통해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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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올레타> 스틸컷



영화의 비극은 서로의 우선순위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부터 촉발된다. 비올레타는 어머니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순수한 심성의 소유자이자 당시 인기리에 활동 중인 펑크락 밴드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10대 소녀다("런던으로 가면 시드 비셔스 만나게 해줄게"). 반면, 한나는 고루한 것들을 철저히 배척한 채 예술계가 자신을 주목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오로지 열정적인 아티스트로서의 모습에 치중한다. 평소 하교 길을 함께하지 못했던 어머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한 비올레타는 반갑게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런 딸 아이를 잠시 반겨주던 한나는 그녀의 옷 차림이 너무 평범하다고 지적함과 동시에 자신이 가져온 드레스를 꺼내며 갑작스레 비올레타에게 환복을 요구한다. 어머니의 당황스런 요청에도 불구하고 비올레타는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건네 받은 드레스로 묵묵히 환복한다. 딸이 느낄법한 부끄러움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완성시키는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한나의 심리는 서사가 진행 될수록 점점 더 극심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로서 딸에게 차마 요구하기 힘든 내용을 서슴없이 강요하는 그녀의 행보는 무조건적이었던 비올레타의 어머니를 향한 애정을 배반하는 과정들이 끊임없이 답습된다. 그 과정에서, 두 모녀의 관계는 서서히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붕괴된다.


두 모녀의 서로 다른 신념은 인물을 둘러싼 주변 미장센과 공간 활용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부각된다. 당시 가정집의 풍경을 고스란히 탑재한 공간으로서 거실은 신을 섬기는 증조 할머니의 신앙(성화)과 10대 문화를 동경하는 비올레타의 관심사(TV)가 각기 다른 형태의 미장센들을 통해 표출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거실 위층에 위치한 한나의 작업실은 암막커튼을 통해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어둠으로 가득하지만,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그녀의 예술관이 집약된 스산한 분위기의 사물들(모형 해골)로 공간이 구성되있다. 현실과 초현실이 공존하는 비올레타의 집은 공존하기 어려운 두 신념의 아슬아슬한 동거를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서서히 균열이 가해지는 가운데 두 모녀의 관계를 미약하게나마 균형을 맞춰주는 존재는 증조 할머니 '마미'다. 신앙심이 투철한 그녀는 매일밤 자신의 증손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기도를 건네며 그녀의 미래를 끊임없이 걱정하지만, 철없는 두 손녀 딸들의 갈등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관망할 따름이다. 그녀가 끝내 노쇠한 기운을 극복하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한 순간 비올레타와 한나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녀의 물건을 처분하고 텅빈 집 안에서 허무하게 앉아있는 모습은 두 여인이 마미를 무의식적으로 얼마큼 의지했는가를 방증해준다. 미약하게나마 집 안의 질서를 유지해주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지는 순간, 두 모녀의 목전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수순만 남겨진다.


감독의 말을 빌려, 영화는 자신을 소유물로 다뤘던 어머니와의 기억 가운데 이해 가능한 몇 몇 상황들을 중심으로 서사를 구축한다. 영화의 거친 카메라워크는 굴곡진 환경 속에서 피치 못하게 급변한 비올레타의 심리 상태를 대변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과거는 가차없이 재현하지 않았다는 감독의 의지는 자신의 아픈 기억을 영상으로 단순히 재현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얄팍한 수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사건 당사자의 진심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접근 불가능한 존재로서 영화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한나와, 그녀로부터 속박된 삶을 벗어나려는 비올레타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관객은 이들을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없는 찰나의 거리감을 그런 의미에서 맞이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영화는 그러한 거리를 되려 관객의 자유로운 상상과 논리 형성 과정을 가능케끔 이끌어주는 요소로 승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감독의 의도를 명확하게 구현한 두 배우의 호연은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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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올레타> 스틸컷



스스로의 욕망에 누구보다도 솔직한 여성을 '이자벨 위페르'만큼 강렬하게 체화해내는 배우는 전 세계 통틀어 몇 없다. 오랜기간 유명 시네아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해 입증한 그녀의 관록은 <비올레타>에서도 빛을 발휘하며 관객이 배역에 완벽히 조응할 수 없는 작고 미세한 거리를 유지해낸다. 특히, 상대 남자 모델과 포즈를 취하는 과정에서 어린 딸에게 다리를 더 벌리라고 요청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 연기는 상식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한 인물의 차마 수긍하기 어려운 캐릭터성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연기적 측면에서 감탄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은 이자벨 위페르와 앙상블 연기를 펼치는 와중에도 꿋꿋이 아우라를 뿜어내는 '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의 뚜렷한 존재감이다. 2021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해프닝>의 주연을 맡으며 유럽 영화계의 초신성으로 등장한 그녀는 아역임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개성을 발휘하며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쉽게 체화하기 어려운 영화의 서사를 굳건하게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축을 담당한다.


영화는 종국에 이르러 극심한 대비를 바탕으로 회복 불가능한 두 모녀의 안타까운 말로를 드러낸다. 자신의 의사는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채 예술가로서의 욕심을 곧이 곧대로 밀어붙인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증오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진채 어미니와 완벽한 의절을 선언한다. 그녀의 심리적 변화는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던 도입부에서 장발의 이미지와 극명하게 상반된 달라진 숏컷 스타일을 통해서 그녀의 급격한 심리적 변화를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와 함께 살수 없는 불운한 소녀들과 함께 보호소에 체류 중이던 그녀를 어느 날 한나가 방문한다. 이제까지 보여준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요사러운 복장이 아닌, 고급 의류들로 우아하게 중무장한 그녀의 외관은 다시한번 비올레타의 그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영화의 비극성을 심화시킨다. 자신을 무자비하게 이용한 어머니를 마주하고 싶지 않던 비올레타는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을 무시한 채 어디론가 도주한다. 성장영화의 가장 가슴 아픈 사례인 '프랑수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연상시키는 비올레타의 마지막 뒷모습. 위선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발악했던 감독의 당시 처절했던 심정을 대변하는 영화 속 단 하나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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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올레타> 스틸컷



아동 포르노를 환기시키는 영화의 모티브는 피사체가 유아라는 점에서 감독이 겪었을 상처의 심각성을 추측 가능케 한다. 만약 성인 여자의 누드였다면 애초부터 논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감독의 말은 스스로가 당사자였기에 꺼낼 수 있는 묵직한 근거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시간 예술과 외설 사이를 가로지르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영화 <비올레타>에서 사실상 그 역할이 유명무실하다. 어머니와 유사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는 관객을 주목시키기 위해 가슴 아픈 기억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단순한 재현극으로서 자신의 기억을 서사에 온전히 투영하지 않는다. 영화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의 순간들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의도적으로 작품 내 한계를 배치하는 대담한 연출을 선보인다. 배역과 관객 사이의 작은 거리두기는 보는 이에게 작품과 일체할 수 있는 기회를 단절시키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시선을 고취시킬 수 있는 무한한 여지 또한 제공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전적으로 후자를 지지한 채 관객의 자유로운 판단이 가능한 서사로 새롭게 자신의 기억을 해체하고 조립해낸다.


물론, 이미지를 착취하는 갑과 을이 혈연으로 묶인 관계라는 점은 배역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참혹함을 증폭시킨다. 다만,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시선을 분노로 일관하지 않는다. 때로는 누구보다 애틋하게 여긴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어머니를 향한 자신의 애정이 사실이었음을 암암리에 드러낸다. 상반된 감정들이 시종 투쟁하는 듯한 감독의 들끓는 시선은 거친 카메라 질감과 조화를 이루며 영화의 생동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어머니의 복잡한 정체성을 배가시킨다. 영화는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맞다고 믿는 관객들의 상식을 철저히 괴리시키며 관객의 머릿 속을 끊임없이 헤집는다. 그 과정에서, 두 배우의 격렬한 대립 연기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극대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차마 받아 들이기 힘든 두 모녀의 실화는 관객들에게 지울 수 없는 자국 하나를 남긴다.


그렇게, 소녀는 상처받았다. 단지, 울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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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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