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긴게 뭐가 중요하냐 [공간]

책만 많음 됐지.
글 입력 2021.10.1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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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도서관은 외관이라 할 것이 따로 없다. 도서관 건물이 독립적으로 있지 않고 다른 건물들 속에 깊숙이 파묻혀 학생회관 뒤편에 붙어있는 탓에 입학했을 때는 크게 실망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신입생들도 거대한 규모와 지식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그런 도서관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외관이 구린 것도 아니고, 외관이 아예 없다니.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그랬는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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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운데 시커먼 계단으로 올라가면 중앙 도서관으로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다행인 점은 금방 익숙해진다는 것. 악플은 그게 불가능하지만 무플은 익숙해질 수 있듯이.

 

*

 

학교 전체가 엄청난 용적률을 자랑하며 좁은 부지에 건물들을 욱여넣듯이 지어진 탓에 동과 동들은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사이를 잇는 샛길이나 통로들이 즐비하다. 학생들은 장난삼아 우리 학교 캠퍼스를 홍그와트라 부르기도 한다. 중앙 도서관 역시 만만치 않다. 우선 도서관에 이르는 길 자체가 다양하고, 그 내부 구조 역시 바깥을 닮아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표현은 복잡하다는 점을 넘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뜻이다.

 

중앙 도서관 계단 2층부터 5층까지의 층계참마다 각 층의 자료실 안으로 향하는 철문이 달려있는데도, 다른 문들은 모두 잠겨 있고 3층 문만이 출입구로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2층에 있는 책을 빌리려면 1층부터 2층을 거쳐 3층으로 올라가 자료실에 들어간 후 자료실 내부의 계단을 통해 다시 2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어마어마한 동선 낭비이자 엄청난 부조리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20세기의 부조리극 작가들을 데리고 우리 학교 중앙 도서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도록 시켜보고 싶다. 그럼 진짜 부조리가 뭔 줄 알겠지. 그 중 ‘Cette absurdite n`est pas cette absurdite!’ 하고 항변하는 자는 나와 함께 수원에서 부천으로 가기 위해 1호선을 타고 구로역으로 상행한 뒤 다시 인천행 1호선으로 갈아타 하행하는 짓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스타일의 도서관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매력도 없지는 않다. 일단 원체 가는 길이 귀찮고 시설도 구려서 이용자가 적다. 공간이 협소하고 이리저리 엉킨 탓에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는 장소들도 있는데, 그곳에 당신만의 스팟을 만들기도 좋다. 예를 들면 내 친구처럼.

 

*


오늘도 좋아하는 친구가 학교 도서관에 자기만 아는 공부하기 좋은 자리가 있다며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계단을 통해 4층에 올라가면 정면에 문학 서가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틀어 중간 문으로 들어간 뒤 한 번 더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아무도 보지 않는 듯한 응용과학 책 코너가 나온다. 사람들이 거의 없고 있어도 한두 명이다. 서가보다는 서고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이곳의 책장들 뒤편에 창틀과 맞닿아 있는 길게 뻗은 테이블들이 있고, 거기가 친구의 스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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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그곳으로 갈 때마다 공부하기 위해 학교 자료실로 향한다는 느낌보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창가 자리, 움직이는 것은 밀려들어 온 햇살에 반응하는 나의 그림자밖에 없는 곳으로 향한다는 사적인 감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긴장감은 다른 사람들도 함께 사용하는 공적인 공간에서만 온다. 자신의 방이나 화장실같이 아무도 자신을 바라볼 일 없이 완전히 개인적인 곳은 이미 공간이 아니라 배경/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의 구석진 자리는 묘한 의미를 가진다. 분명히 학생 15,801명 모두를 위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15,801명 중 유일하게 자신만이 존재를 안다는 느낌과 언제든 다른 개척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침범해 들어올 수 있다는 적당히 기분 좋은 긴장감이 공존한다. 덕분에 도서관 구석 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잠을 자는 침실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 사적인 기록이 가능해진다. 완전히 구름 위로 올라간 비행기보다는 전봇대 높이에 떠 있는 가오리연이 하늘을 나는 감각을 더 잘 전달해주는 것처럼.

 

오랫동안 무언가를 보고 있다가 다음 순간 그것이 사라져도 눈에는 잔상이 남듯이, 그 아이는 창가 자리에 갈 때마다 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잔상을, 그동안 더해왔고 앞으로도 더할 자신의 잔상들을 환등기에서 넘어가는 오래된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투사해 보았을 것이다. 단순히 ‘좋은 자리’를 넘어 그 자리가 가지는 은밀한 의미와 즐거움까지 알려준 친구를 바라보며 학교 괴담에 나오는 도서관 귀신이라는 것이 사실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수없이 지식의 방주를 들락날락한 수많은 사람의 정신적 자국. 캔버스 위에 반복해서 물로 그린 그림처럼 아무리 약하고 연한 것이라도 반복되면 강한 자국을 남긴다. 서가 사이를 방황하는 발 없는 귀신들은 결국 학교가 1946년 개교한 이래 밤새 시험공부를 한 공대생의 공학 수학 문제 풀이, 온종일 존 치버의 단편들을 탐독한 영문학도의 상상력 따위가 지나다닌 경로가 70년 동안 누적된 흔적들 아닐까. 그것들은 유원지 관람차에 하는 낙서보다도 훨씬 강력할 수밖에 없다. 기록하는 것보다 기록되는 것이 훨씬 오래 가는 법이니까.


학교 도서관 사진을 몇 장 찍어봤는데 안 쓰긴 아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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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중도로 가는 또 다른 계단이다. 지금은 비대면 수업 기간에다가 휴학 중이기도 해서 캠퍼스를 거닐 일이 없지만 18, 19년도만 해도 점심 먹으러 이 계단으로 많이 내려갔다. 이상하게 올라간 적은 거의 없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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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도서관 5층에는 꽤 괜찮은 옥상도 있다. 해 지는 모습을 보기 좋은 곳. 문제는 애연가들도 이곳에서 해 지는 걸 보기 좋아한다.


*


생각해보니 학생회관의 뒤편에 기생하고 있는 듯한 중앙 도서관의 위치 선정도 참으로 절묘하다. 지식의 보고도 결국 학생회 활동과 학사지원팀의 행정 처리에 기생할 수밖에 없음을, 즉 학생들의 학업보다 교직원들의 편의성을 더 중요시하는 듯한 자교의 저질스러운 행정 처리에 대한 셀프풍자였을까? 새삼, 풍자와 악담의 거리는 우리 학교와 취업학원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가깝다.

 

생긴게 뭐가 중요한가? 속이 중요하지. 장서는 많으니까 그걸로 됐다.

 

그래도 겉도 이쁘면 좋긴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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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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