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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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세기의 삶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많았다. 20세기에 태어났으나 막상 자라온 환경은 MZ세대가 공감하기 어렵고, 특히 Z세대와 알파 세대는 더욱이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MZ의 부모인 586세대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은 부모를 두었고, 격변의 시대를 성장기로 보냈다. 어려서는 식민지배와 전쟁의 잔재에 휩쓸렸고 그들이 성인이 되어 대학교에 다닐 때는 민주화 운동으로 나라가 복잡했다. 자식을 '잘' 키우는 것보다 '열심히' 키우는 것의 의의를 두었고 애초에 자신의 정서를 돌보기도 어려웠으니 올바른 양육의 개념조차 없었다고 보면 된다. 시대의 성장과 다르게 우리들의 의식과 수준은 그만큼 따라가지 못했고, 외부 환경에 떠밀려 무작정 '생존'에 사활을 걸었던 막바지 세대라 생각한다.
지금은 그때와 확연히 다르다. 물론 갈수록 사는 게 어렵지만,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그때와 다르다. '생존' 이상의 것을 좇는다. TV프로만 보아도 그렇다. 국민 육아 멘토이자 소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가 진행하는 <금쪽같은 내 새끼>는 성인이 보아도 순식간에 빠져든다. 남의 가정 이야기인데도, MZ세대는 오은영 박사가 말하는 훈육 솔루션과 흉터가 남은 우리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말 한마디에 홀린 듯 공감을 한다.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방치했던 우리는 '건강한' 정서에 본능적으로 관심을 쏟는다. 아마도 그건 스스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우리의 무의식에서 들려오는 구조 요청을 본인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맥락에서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라는 책을 집었다. 물론 '엄마'라고 콕 집어놓은 제목이 완벽하다고 느끼진 못했지만 - 엄마, 아빠 가릴 것 없이 '가족'이나 '부모'라고 칭하면 더 베스트가 됐을 거라 생각한다 - 완독한 상태로 글을 기고하는 현재, 본인은 선진화되지 못했던 양육 환경에서 자란 MZ로서, 지금도 옳지 못한 양육 환경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서적으로써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벗어날 수 있는 how까지 적힌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당연 자식의 입장인 MZ 말고도 부모님께도 권유하고 싶다. 그들 또한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온 세대가 아닌가?
오은영 박사가 직접 발언하는 영상 콘텐츠 형태가 아니라 이름 모를 외국인 박사가 쓴 텍스트 콘텐츠로 가슴에 와닿는 그런 전달력이 부족할지언정, 천천히 곱씹고, 이런 점검 자체가 수월하지 못한 환경에 있는 상태에서 굉장히 도움 되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저자는 '부모의 아동 학대 및 방치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아동 학대와 방치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는 법, 회복 훈련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는 법 세 가지를 핵심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이 글은, 상처받은 한 사람의 고백이자, 책이 권유한 치유의 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고백
개인적으로 '너도 괜찮아질 거야'라는 뉘앙스를 가진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책을 처음부터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같고 쓸데없는 감성만 자극하며 결국엔 안주하길 권하거나 '심리'에 가까운 주제를 뾰족하게 담았다면, 본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그런 맥락을 말하는 수많은 책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이런 주제를 소비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여겼던 사람 중 하나다. 어떻게 보면, 나는 강인한 '척'을 했을 수도 있고 애초에 자가 치료 자체가 불가능했던 아주 우울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은 누구보다 가득했다. 어린 날부터 독립 전까지 인생의 최대 목표가 '독립'이었고 '혼자'만의 공간을 온전히 '내 힘'으로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굳이 필요 이상의 지출을 감안하고 내 공간을 가졌다. 불안정하지만, 정신적 안도감을 주는 내 집이 생겼고, 다른 이의 간섭과 의도를 배제한 나만의 선택이 가능했다는 점과 결과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 행복했다. 처음으로 실패해도 괜찮다는 안정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지 못했고 결국엔 내가 회피하고자 했던 심리적 문제로부터 완벽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
여전히 다른 이의 쓴소리가 무서워 눈치를 보며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닌, 남을 위한 선택을 했다. 이것이 맞는 선택이라며 나를 속였다. 다른 이와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두렵거나 혹은 원만하지 못했고, 사람을 피해 다니거나 소심하고 낯가리는 점을 바뀌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외면하거나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여긴다는 점과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적이니 사람을 믿지 못하고 관계에 대해 일말의 기대감도 없다는 것이 큰 문제점이었다. 아니면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해 급히 결론을 내려는 성향도 있다. 타고난 기질이 내향적인 것도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제대로 깨우칠 정도로 나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가짜 자아'에 의해 가려진 나의 '내면 아이(child within)'에 대해 인정하고 알아가는 것이 두려웠고 가치 없는 일처럼 치부하는 버릇을 스스로 고치기란 매우 어려웠다.
치료를 받으면서 마커스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어했고, 그 감정들을 표현할 말조차 찾지 못했다. 그는 분노를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못 느끼는가 하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느끼게 돼요."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중 9쪽
또한 사회생활을 병행하며 내면 문제를 마주하는 것은 매우 고역이었다. 인간을 믿지 못해 건강하게 관계를 맺을 줄 모르니 고립되길 자처했고, 고립감이 주는 안정감에 안주하다가 다시 벗어나기 위한 시도와 노력하는 것을 되풀이하다 보니 이는 스트레스로 쌓여 업무에도 방해였다. 끊지 못하는 악순환이 삶의 질을 저하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독립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는 이상, 탈출은 불가능했고 스스로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환경을 버려야 했다. 이 길은 어렵고 남들보다 더 늦을 수밖에 없고 멀리 돌아가야 하며 한 발자국 전진하기도 벅차다. 그런데도 해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여러 서적을 읽어봤지만, 진심으로 공감해본 적도 없다. 무엇보다 책이 말하는 사례와 내가 겪은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대다수였고 실행방안 없이 결론만 가지고 나를 설득하는 기분이었다. 나의 독립과 같이 일시적인 안정감을 주고 끝난 책이 많았다. 아니면 내가 고치길 원하는 문제점에 대한 포인트를 건들지도 못했다.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도 누군가에겐 how가 없는 책일 수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제야 내가 '내면 아이'의 존재를 인지하고 인정하며, 동시에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중인 것 같다.
첫째, 참 자아를 찾고 그렇게 되는 연습을 한다.
둘째,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신체적 정서적 영적인 욕구를 확인한다.
그리고 안전하고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법을 연습한다.
셋째, 지지해 주는 안전한 사람들 앞에서,
슬퍼하지 못하고 묻어둔 상실이나 트라우마의 고통을 다시 인식하고
충분히 슬퍼한다.
넷째, 자신의 핵심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 나간다.
이 네 가지 활동은 특별히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를 해결하면 순환을 하듯이 자연스럽게 다른 문제로 이어지며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내면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말이 쉽지 생존은 그 자체로 치열한 전투나 다름없다.
(중략)
이런 방어 수단은 역기능 가정에서 살아남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는 해롭다.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고 싶어도 자신의 관심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132-3쪽
이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성인이 되고 십 년이 가까운 시간을 사용했다. 느린 속도로 차차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 안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지금도 겪고 있다. 시행착오 중 소모되어 버리고 당하는 인간관계도 많았고 그로 인해 상처도 주었고, 받았다. 견뎌야 하는 목적이 있어 지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분명한 문제점 중 하나는 내 안에서 감정을 캐치해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고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현재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크고 작은 문제점은 '역기능 가정(Dysfunctional family)'에서 자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순전히 기능의 문제일 수도 있고 현재 글과 어울리지 않지만, 세상에 상처 없이 자란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제대로 기능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하여도 모두에게 작은 상처 정도는 존재한다. 그런 상처를 얼마나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하는지, 고통을 건강하게 마주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노력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주는 역할을 담당한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를, 역기능 가정의 소속원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차원으로 추천해 본다.
모두의 상처를 담은
저자 찰스 화이트 필드(Charles Whitfield, 1938 ~ )는 트라우마 치료의 세계적인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이자 심리치료사이다.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는 1986년 처음 출간되었고 지금까지 문제 가정으로부터 진정한 참 자아를 억누르고 자란 어른 아이에게 울고 있는 내면 아이(child within)를 치유하고 '궁극적으로 살아 있고, 열정적이며, 창의적이고, 완전한 자신의 일부'를 일깨울 수 있도록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 사담이지만 이런 수준의 책이 1986년에 나왔다는 것이 시대를 앞서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
살아가며 본인이 고통받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 정도면 견딜 수 있다거나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간다고 치부하며 낙관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여길 때도 있다. 작은 생채기들이 모여 얼룩 덜룩 흉터로 남은 지난날들을 그저 덮어놓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할 때가 됐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길게 남았는가, 남은 시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건 인간의 당연한 욕구다. 당신의 그런 욕구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면 아이(child within)를 아프게 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144쪽, 9장)에서는 핵심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흑과 백만 있는 사고방식, 고통과 혼란을 만드는 통제, 거짓 자아가 만드는 과도한 책임감,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사람, '나' , 옳지 않은 행동을 지나치게 참는 것,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갈등의 해결을 어려워하는 것. 사람이 살아가며 마주할 고통들이다. 신체적인 건강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건강도 그만큼 강조되고 있는 요즘에, 건강한 정서를 가진 사람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고 해결하는 모습은 일상뿐만 아니라 업무 환경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문제를 무서워하나 두려워하지 않고 숨지 않는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퇴행하지 않고 앞으로 발전해나가는 비전을 갖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자신감과 당당함, 그리고 건강한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의 특징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벽을 세운다. 몇 년 전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정만 듣고 자란 나의 성장기와 다르게 상대적으로 긍정만 가득한 - 분명 부정도 있을 것이다 - 그들의 삶이 이질적이고 태생부터가 달리 느껴지니 융화하기도 어려웠고 나의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도 없을뿐더러 나의 방식 자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문제 가정의 부모나 다른 가족들이 지지하고, 돌보고, 수용하고,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감정을 나눌 사람을 찾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때 받는 정서적인 고통이 너무나 커서 여러 가지 건전하지 못한 방어 기제를 사용해 자신을 방어하려 든다. 그러고는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감정을 차단시켜 버린다. 그렇게 하면 비록 대가는 따르더라도 살아남을 수는 있기 때문에 무감각해지고, 주위와 담을 쌓으며, 거짓된 자아로 살게 된다. 참 자아로 살지 못하면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감과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상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161-2쪽
가끔 사람을 대할 때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발견한다. 나의 지레짐작일 수도 있고 쓸데없는 참견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호전적인 태도나 혹은 비약적인 의견에도 언제나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문에 지체되는 일이 생기거나 나를 만만하게 여기는 나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사회에서 이런 부분을 챙겨줄 이유도 없다. 굳이 어렵게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어찌어찌해도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런 그들을 외면하기엔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테니, 스스로를 부정하는 기분도 들고 양심상 뭔가 찔리더라.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제3자가 보기엔 나도 그들을 외면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다 보니 나는 기업적으로 리더감이 되기엔 틀렸구나 싶었다. 이런 표현으로 간단히 말하고 싶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상이 되기엔 '비'정상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고 이 깊이는 개별마다 차원이 달라 함부로 말하거나 정의할 수도 없다. 또한 자칫 잘못하다간 누구의 불행이 더 불행한가와 같은 의미 없는 대화로 흘러가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이 부분은 정상이 느끼는 그런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확실한 것 중 하나는 알게 모르게 우리는 사람에게 상처 입는다는 것이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성인이 된 우리는 스스로 치유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이 기능 자체가 탑재되지 않아 힘들다. 바른 관계와 과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것이 당연한 일이라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만, 핑계가 아니라 의지가 있어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자로서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면 읽어보는 것도 추천해 보고 싶다.
사실 이 글을 쓰며 내가 느낀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how를 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기승전결을 글에 모두 담아내기엔 어려울 것 같고 짧게 핵심만 뽑아 정리하자니 그것은 또 결론 없는 결론으로 전달될 것 같아 덜어내기로 했다. 보통 '문제 가정' 만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내담자의 사례 중 '역기능 가정'의 사례도 담아내 위로의 기능도 한다. 이런 주제를 담은 모든 책 중에 나에게 핏(fit)이 맞아 고백하는 글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표현으로 이 글을 마무리 보도록 하겠다. 숱하고 흔한 위로 중에 나를 위한 진정한 위로를 발견했다. 내가 표현하기 어려웠던 감정을 남이 정리한 글로써 마주한 기분은 응어리진 어딘가를 살살 어루만져준다.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가 당신에게 알맞은 위로와 솔루션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아빠', '가족'이나 더 나아가 '친구'일 수도 있고 모든 세상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무엇이든 작게라도 시도해 봤으면 좋겠다.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서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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