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디에도 남지 못한 기록, 사라진 소녀들 [도서]

글 입력 2021.08.03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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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누구에게나 아픈 역사이다. 일으킨 입장이든 당한 입장이든 좋지 않은 이익과 손해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수많은 희생과 피해를 낳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보는 것 같은 이 무미건조한 기술은 그러나 생생한 고통을 우리에게 전하지는 못한다. 짐작으로 힘들고 고생스러웠겠거니, 혹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하며 우리는 다음 챕터의 역사로 넘어간다.


가끔 울리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에도 흠칫하며 놀라지만 이내 소음이 사라지는 지금과 달리, 그 소음의 끝에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은 아마 직접 겪어보지 않는다면 절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그와 같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에 사는 우리는 뉴스를 통해 때때로 그를 실감하고, 아픈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또는 그 후손을 통해 전쟁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이 책은 역사에 남지 못하고 사라져간 여성 비밀요원들에 관한 상상이지만 동시에 전후의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뛰어든 이름 없는 영웅들의 숨겨진 미스터리. 미스터리한 운명을 남긴 채 사라진 소녀들. 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서서히 드러나는 거짓과 배신.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1946년, 뉴욕. 출근길에 오른 그레이스는 자동차 사고로 앞뒤가 꽉 막힌 도로를 피해 그랜드센트럴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기차역 벤치 아래에서 '엘레노어 트리그'라는 이름이 적힌 갈색 여행 가방을 발견한다. 그레이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가방을 열었다가 레이스로 가지런히 묶어 놓은 사진 한 묶음을 찾아낸다. 10여 장에 가까운 사진은 전부 젊은 여자들의 독사진으로 스물다섯 살이 채 넘지 않은 앳된 모습이다. 바로 그때 기차역 바깥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그레이스는 충동적으로 사진을 챙겨 역을 빠져나온다.


얼마 후 그레이스는 사진을 돌려놓기 위해 다시 역을 찾지만 이미 가방은 사라진 후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된 영국 특수작전국 소속 엘레노어 트리그의 가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 속 열두 명의 젊은 여성은 엘레노어가 직접 뽑고 훈련한 비밀요원이며 프랑스 파리에서 무선통신원으로 활동했는데, 그 중 한 명이 홀로 어린 딸을 키우는 마리였다. 프랑스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발탁되어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이미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에 침투하는데…….




용감한 여성들의 서사



첫장부터 여성요원 파견을 제안하는 엘레노어의 등장은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전쟁 소설에서 전선 가까이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엘레노어는 폴란드계이지만 고국을 떠나 영국에서 살아가는 영국 특수작전국 소속의 비서였다. 잇따른 영국 요원들의 실종과 작전 실패로 묘수를 내놓은 것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여성요원 채용이었다.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엘레노어는 묵묵히 여성 요원 파견을 위해 채용과 훈련, 작전배치까지 전 과정을 전담하기로 한다.

 

그가 채용한 요원들은 실제로 작전에 투입되었고 배운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듯했다. 훈련과정에서 놀랍게 성장하였고 무수한 훈련들을 어떻게든 소화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딸을 위해, 형제를 위해, 후대를 위한다는 각자의 이유들로 뭉친 그들은 전례없는 여성요원으로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니, 스스로 그 위험한 운명을 택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겠다.


실제로도 세계대전에 출전한 여성들은 존재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스파이를 포함하여 무선통신원, 비밀요원, 항공기 조종사 등으로 다양하게 활약한 여성들이 있었다. 전쟁에 나가지 않은 더 많은 여성들은 남성들의 빈자리를 대신해 군수공장의 노동자로 물자 생산 및 공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부각되지 않았을 뿐, 전쟁에서 활약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분명 존재한다. 소설 속의 이야기도 그렇게 보면 충분히 존재했을 법한 이야기이다.




전쟁의 파편들



파견된 여성요원들의 끝은 좋지 않았다. 독일군의 무선 통신망 교란과 이를 작전에 이용하려던 영국의 묵인으로 여성뿐 아니라 다수 남성 요원들의 실종이 계속되었다. 실종은 곧 죽음이었다. 즉사하거나 수용소에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어쨌든 죽음 뿐이었다.

 

그레이스는 2년 후의 시점에서 이들의 죽음을 좇고, 엘레노어는 소녀들의 죽음을 2년전에서부터 좇으며, 마리는 그 시간을 관통하는 인물이다. 세 명의 만남은 책의 끝에 가서야 작전 실패와 요원 실종의 이유가 영국의 묵인이었음을 알게 되며 이뤄진다. 그들이 만나 알게 된 진실은 배신과 실패였지만 결국엔 부딪혀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사라진 기록처럼, 처음부터 없었다고 지워져버릴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것은 앞으로 남은 이들이 해야할 일이었다.


배신과 사랑, 옅은 희망과 위로는 모두 전쟁이 남긴 씁쓸한 조각으로 남으며 이를 잘 맞춰야만 현재를 새로이 살아갈 수 있음을 저자는 전한다. 전쟁이 바닷물을 뒤집어 커다란 피해와 동시에 순환을 태풍과도 같은 것이라기인 전쟁 후에 남는 것들은 모두 애달픈 것들 뿐이다. 전쟁은 중요한 역사로 남고 전쟁 권력의 흐름을 바꾸지만, 너무나 많은 희생을 야기한다.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비뚤게 하기도 한다.

 

비난과 처벌이 두려워 고개돌린 이들과 마땅한 죗값을 치르지 못한 전범들을 떠올리고, 이름을 새기지 못한 영웅들이 얼마나 많을지 감히 헤아려본다. 나이답게, 제명대로 살지못한 이름들은 여전히 아프고 또다른 희생을 낳지 말라 말한다. 사라진 이들이 남긴 건 이런 것이 아닐까.



[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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