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코로나 시대도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수록 우리가 예술을 향유해야 하는 이유
글 입력 2021.06.2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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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간은 그럴지 몰라도 우리의 시간감각은 절대 시계에 묶여 있지 않다. 뒤엉켜 있는 뇌 속의 주름들처럼 우리 안에는 우리가 경험한 시간대들이 서로 이리저리 겹쳐져 맞닿아 있고, 덕분에 우리는 늙어 죽기 전에 충분히 회고하고 상상할 수 있다. 뇌 속의 시간은 단선적이지 않고 산발적으로 흐른다. 때문에 우리의 몸은 특정 시간대에 묶여 있으나 우리의 정신은 항상 여러 타임라인을 동시에 통과한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의 몸은 분명히 2021년 6월 19일 밤 11시 53분을 통과하고 있지만, 나의 정신은 동시에 엊그저께 다녀온 북한산 정상에서의 아침과 한 주 뒤 친구와 함께 드라이브를 떠날 인천 앞바다의 고즈넉한 저녁 또한 상상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항상 머릿속에서 여러 겹의 삶을 살아간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은 이러한 인간의 비선형적인 시간감각을 아예 기본 구조와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 미군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던 저자의 전쟁 경험을 SF소설화한 반전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작가의 페르소나로 보네거트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에게 붙잡혀 드레스덴에 위치한 공장에 인력으로 차출되었으며, 그곳에서 독일에 대한 연합군 최대 규모의 공습이었던 드레스덴 폭격을 목도하게 된다. 빌리는 몇 안되는 드레스덴 폭격의 생존자였고, 미국으로 돌아오고 십 여년 뒤 외계인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트랄파마도어라는 행성에서 온 미지와의 조우로 인해 빌리는 외계인들의 시간관을 전수받는다. 그는 시간에서 해방되어(이 소설은”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전쟁 중이었던 과거, 딸이 결혼하는 현재, 죽음을 맞이하는 미래 등을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오가는 시간여행자 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야기 또한 빌리의 체험을 따라가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에피소드가 뒤죽박죽 뒤섞인 순서로 진행되고, 이야기가 전개되며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어떤 것이 죽음을 맞이할 때 마다(트랄파마도어 식으로 말하면 특정 타임라인에서 퇴장할 때 마다) ‘So it goes.(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이 소설의 반전주의적 내용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소설의 구조적인 측면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나는 제5도살장의 구조를 읽어내며 우리가 예술을 향유해야 하는 이유, 코로나 시국과도 같은 힘든 시기 일수록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들 들어야 할 이유를 다시 한번 느낀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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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는 종전 후 3년째인 1948년의 봄에 재향군인들을 위한 병원에서 지내게 된다. 병동의 침대에 누워 빌리는 킬고어 트라우트라는 SF작가의 소설들을 탐독하게 되는데, 이는 빌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소설들은 대게 구취증을 치료하고자 하는 입 냄새 나는 로봇이나 4차원의 불가해한 원인 때문에 미쳐가는 3차원의 인간들처럼 황당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적으로 정교한 공상과학 소설 보다는 과학이라는 컨셉을 빌려온 비현실적인 펄프픽션에 가깝다. 킬고어 트라우트는 보네거트의 작품 세계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의 소설가로, 빌리와 마찬가지로 소설가로서 보네거트의 모습을 투영한 페르소나이다. 트라우트가 쓴 황당한 망상에 가까운 작품 내용은 보네거트 본인이 생각하는 자기 작품에 대한 우스꽝스런 패러디로 보이는데, 실제로 작가는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에서 ‘누군가 나에게 소위 SF소설가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단지 내가 과학기술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며, 최고의 미국 작가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라며 스스로를 SF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제5도살장>의 후반부 빌리 필그림은 킬고어 트라우트와 조우하게 된다. 이것은 전쟁 생존자로서의 보네거트의 페르소나와 소설가로서의 보네거트의 페르소나가 만나는 장면이자 생존자의 실제 경험과 소설가의 상상력이 만나는 순간에 대한 은유다. 이 조우의 지대에서 <제5도살장>이 기획된 것이고, 모든 예술 또한 이 중간 지대에서 피어난다.

 

소설의 1부는 보네거트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와 책을 쓰기 위해 함께 드레스덴 폭격을 겪은 전우를 찾아 다니는 사전작업 등 사실상 서문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나에게는 비선형적 시간 구성이라는 독특한 구조, 1부의 서문으로서의 기능(당연히 이것도 픽션일 확률이 높다.), 빌리와 트라우트의 만남 등의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았을 때 이 작품이 반전소설일 뿐만 아니라 소설에 대한 소설, 그러니까 예술 창작 과정에 대한 소설처럼 느껴진다. 보네거트 개인이 겪었던 전쟁의 기억들을 무작위로 회고하는 과정과 그 재료들을 나열해 소설화 하는  작업 자체를 구조로 채택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는 작업과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은 상당 부분 유사하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연결 지어 곧잘 하나로 묶는다. 이것이 반복되면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없었던 의미가 생겨난다. 이 구슬 꾀는 작업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위해 김연수 작가의 문장을 인용하겠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 김연수, <파도가 바람의 일이라면>중

 

<제5도살장>은 독자의 입장에서 뒤죽박죽인 에피소드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이 퍼즐들을 어떤 순서로 짜 맞출 것인지 고민하고 우리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까지가 작품의 완성이고 제대로 된 감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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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랄파마도어에서 내가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을 때 그는 죽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과거 속에서 펄펄 살아있고, 그러므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중략) 트랄파마도어 인들은 각각의 모든 순간을, 예를 들어 우리가 로키 산맥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볼 수 있습니다.”

 

위 대목은 소설 전체의 구조와 핵심을 잘 보여주는 빌리의 대사이다.


등산을 자주 다니는 내가 최근에 느끼는 것은 로키 산맥의 비유처럼 산을 오르는 일은 무엇보다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높이와 풍경은 달라지고 나의 시간감각 또한 내가 지금 서있는 지대 고저와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의 각도를 기준으로 삼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을 물리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산의 능선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인생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는 식의 비유가 뻔하고 아주 낡은 것일지라도 그토록 자주 쓰이는 이유는 그만큼 정확한 비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등산과도 같은 측면, 즉 로키 산맥 전체의 그림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예술이다. 예술은 인간의 삶을 확장 시켜준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영화에는 ‘영화가 인간의 수명을 세배로 늘렸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 영화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예술에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예술은 인생의 여러 영역에서 확장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적 기능(‘우리’라는 범주의 확장)이나 가본적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모험적 기능(공간의 확장)을 수행하기도 하며,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가게 해주는 타임머신(시간의 확장)이 되기도 한다. 예술은 그러한 간접체험의 제공을 통해 중층적 시간감각에 대한 훌륭한 촉매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제5도살장>을 읽으며 나는 소설의 독특한 구조를 통해 첫 번째 단락에서 거론 했듯 인간의 정신적 삶이 애초부터 여러 겹의 삶을 살고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인간의 예술활동과 기억 복기 활동에는 독립적인 에피소드들의 연결을 통한 총체적인 의미화라는 커다란 공통분모가 있음을 깨달았고, 예술을 통해 기억의 힘을 현실을 살아갈 에너지로 바꾸어 나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느끼기에 예술을 통해 인간의 중층적 시간감각을 인지하고 되살리는 일은 현재의 고통과 다가올 미래에 대항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수단이다.. 아주 단순하고 거칠게 말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될 것이고, 커트 보네거트 식으로 말하면 ‘So it goes.(그렇게 가는 거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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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 소설을 보고 트랄파마도어나 뒤엉킨 타임라인 같은 것은 모두 전쟁의 충격으로 인해 빌리 필그림이 그려낸 정신착란적 망상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트랄파마도어인들과 그들의 시간관이 실재한다는 설정으로 이 공상과학소설을 받아들일 것이다. 또 누군가는 빌리의 시간에서 해방된 상태를 조난으로 이해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자유로 이해할 것이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원래 자유와 조난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이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전쟁의 충격과 그 충격의 여파에 대한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로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모든 것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조난에서 자유로 넘어가는 순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상과학이야기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안 그래도 너무 가벼움이 없어진 코로나 시대에 굳이 안 좋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최소한 우리에게 이 정도의 선택권은 있다. 나는 제5도살장을 읽으며 가벼움을 느끼기로 선택했고, 그렇게 마음을 먹자 가벼움을 느꼈다.

 

이 길고도 지루한 전염병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빌리처럼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시간관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친구와 마음껏 만나지도 못하고 맘놓고 여행을 갈 수도 없는 지금이지만, 과거에 당신은 꽉 찬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았고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 시간들은 과거라 해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엄연히 당신의 안에 살아있다. 트랄파마도어인들에 의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순간은 항상 존재했으며, 항상 존재할 것이다.

 

작품의 구성과도 같이 예술은 어느 특정한 시공간에 속박되지 않는다. 월남전이 진행되던 60년대에 쓴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소설이 코로나 시국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영어로 필그림(pilgrim)은 순례자를 의미한다. 예술을 향유할 때 우리는 모두 시간의 순례자들이다. 이 지난한 시기를 버티려면 최대한 많은 글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들 들어서 최대한 많은 순례를 다니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시간에서 해방될 것이다.

 

 

[노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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