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따 박성빈] 할배 외로움을 모르는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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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티 안에 흰 티를 받쳐 입고 출근했다. 밑단이 허리통만큼 넓어서 펄럭거리는 바지도 입었다. 할아버지는 신문을 보며 옷을 뭐 그렇게 입었냐고 말했다. ‘레이어드’라고 불리는 옷 모양의 일환이라고 설명하려다가 말았다. 이렇게 입어도 되는 회사라고 얼버무리고 집을 나섰다.(취재가 없는 날이면 그렇게 입어도 됐다. 국장까지 동석하는 인터뷰에 후드티를 입고 갔다가 혼난 뒤부터 취재일정에 맞춰 옷을 입었다) 할아버지는 상의를 바지에 넣고 바지춤을 가슴팍까지 올려 입는 사내였다. 나는 바지 밑위가 남아있지 않도록 엉덩이까지 추켜 입는 할아버지의 옷 입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레이어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단정한 구색’을 갖추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외출하거나 가게에 나설 때 항상 정장바지와 셔츠를 입었다. 여름에도 복사뼈 위까지 올라오는 목 긴 양말을 신었다. 발목을 비롯한 살갗을 보이는 일은 할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추리했다’ 단정한 구색은 삶에서도 작동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가정을 이루고, 돈 잘 버는 직장에 다니고, 입신양명 하는 삶이 가장 단정한 삶이라고 주억거렸다. 거기서 비껴간 삶은 추리한 거였다.
어렸을 때는 그 말을 신앙처럼 여겼다. 정말로 그렇게 믿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잘 따르는 손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똑똑했고 멋있어 보였고, 아침마다 신문을 정독했고, 늘 근엄해 보이는 태도였으니까. 술 취해 주사부리는 할아버지를 겪고 난 이후에는 할아버지가 멋져 보이지 않았다. 그 말도 내게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말하기대회에 나가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대상을 타면 권역별 대회에 출전할 기회가 주어졌고 할아버지와 나는 그걸 노렸다. 할아버지는 톤을 잡아주고 설명문 작성을 도와주고 아무튼 간에 깊이 관여했는데, 우수상 상장을 가져오니 술기운에 성미가 뒤틀려버렸다. 생각해보면 입상한 것 자체가 성과였다. 할아버지가 알려준 말하기 방식은 웅변이었다. 개발독재 시대에 유효했던, 이 연사 힘차게 소리칩니다, 같은 건데 지금도 유효한 말하기일 리 없었다.
태어나서 어른에게 뺨을 제대로 맞아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애들 싸움과 어른의 폭력이 천지차이란 것도 느꼈다. 책상을 엎고 의자를 부수고 상장을 얼굴에 들이밀면서 이따위 걸 성취랍시고 가져온 거면 그냥 공부 같은 거 때려치워, 따위의 말을 들었다. 거기에 압도돼 울기만 했다. 눈물 콧물 모든 신체 구멍에서 물을 짜내며 빌었다. 할아버지는 한시간 가량 그러다가 지쳐서 잤다.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깽판 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마음에 남았다. 고이고 고여서 할아버지를, 할아버지의 말들을 의심하게 했다. 동시에 중학교, 고등학교 더 어려운 교육과정의 시험을 거칠 때마다 내가 입신양명과 거리가 먼 것을 확인했기에 할아버지의 ‘단정함 이론’은 진즉에 무너졌다. 입신양명은커녕 밥벌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할아버지 자신은 단정한 궤도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입신양명에 성공한 자녀는커녕 비슷하게 이룬 친척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밑바닥에서 이만큼 이뤘다는 자기 서사를 달고 살았다. 6·25를 거치며 손에 쥔 게 없었기에 돈 벌기 위해 안 해본 일 없다는 당신. 이발소 보조, 구두닦이, 세신사, 군대에서는 간부에게 일머리를 인정받아 비교적 고생을 덜했다는 당신. 그렇게 악착 같이 돈 벌어서 자기 가게를 일군 당신. 한창 가게가 잘 됐을 때는 사탕 발린 소리들을 늘어놓으며 달라붙는 이들이 많았고 그 치들을 떨궈내 결국은 자기 것을 지켰다는 당신. 스타티드 프롬 바텀 정신을 실천했던 당신. 늘 비슷한 흐름으로 전개되는 성공신화였다. 그것이 증명하는 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였다. 귀에 딱지가 달라붙도록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혹시 내가 물어봤냐는 문장이 튀어나오는 걸 애써 눌렀다.
구태여 누군가에게 자기증명을 하는 이유가 뭘까. 자기가 ‘단정한 인간’임을 왜 남에게 설명하려 드는 걸까. 오히려 구구절절 늘어놓는 자기증명은 자신이 그 증명과 무관함을 보여주는 거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겠다고 느끼다가 종국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멈췄다. 대학에 오면서 할아버지와 마주칠 일도 줄었다.
세달 만에 집에 왔다가 학교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식구들은 일하느라 집에 없었다. 할아버지만 볕을 쐬러 공원에 앉아 있었다. 인사하고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이 앞이고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테니 얼굴이나 비춰야겠다는 심상으로 할아버지를 찾았다. 다녀오겠다, 다음에는 언제 올지 모르겠다, 잘 지내시라 따위의 말을 남겼다. 그 뒤부터 2주가량 할아버지가 문자를 보내는 일이 잦았다. 집에서 매번 듣던 나이키 광고 같은 문장들이었다. 하면 된다, 열심히 해라, 포기하지 마라.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건지 모르겠다고 여기며 하나마나한 답장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외로웠다. 그래서 감동받은 거였다. 구태여 자신을 찾아와 인사를 하는 손자에게. 그 감동을 표현하고 싶고 내게 말을 걸고 싶은데 할 말은 없으니 자신이 아는 문장 중에 가장 그럴듯한 걸 골라 문자를 보냈던 거라고 생각한다. 이전부터 떠들었던 자신의 성공서사도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내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다. 그건 그냥 타인에게 말을 걸 때마다 작동하는 할아버지의 화법이었다.
내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나서야 그 마음을 알았다.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느끼며 나는 불행하다, 따위를 매일 의식하며 살았을 때, 내게 괜찮냐고, 궁금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모두에게 불행서사를 다 쏟았다. 특별한 관계도 아닌데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감동 받아서 내 인생의 불행을 다 벗겨내 그들에게 갖다 바쳤다. 당연히 그들과 멀어졌다. 아마 그들은 ‘뭐 어쩌라는 거지’ 같은 마음이었을 테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느꼈던 것처럼. 할아버지의 화법이 ‘자기증명 서사’ 라면 내 화법은 ‘불행 서사’였다.
여전히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는 순간이 있다. 레이어드를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지레 대화를 포기하는 순간도 많다. 그러니 나는 연습을 한다. 주변을 산책하면 길을 묻는 노인들이 많다. 나는 네이버를 지도를 키고 마치 내 길인 양 찾아서 그들에게 친절히 일러준다. 조심히 가라는 당부도 빼먹지 않는다. 아무 관계없는 타인에게 그렇게 친절해지면서 당신에겐 퉁명스러워진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남의 말에 살갑게 응답하며 당신에게 부드럽게 대꾸하는 일을 연습한다.
[박성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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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백강
- 2021.05.23 00: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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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깊이 공감해서, 그리고 아직 이해 못하던 것을 덕분에 배워서 댓글을 남깁니다. 저의 조모님또한 항상 불행과 자기증명을 말씀하십니다. 들리는 이야기는 눈물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한평생 열심히 살아왔다는 삶에 대한 열변이었죠. 항상 이해 못했습니다. 그래서 참 나쁜 손녀였구요. 당신이 그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저 남는 것 없는 삶에 대한 현실부정과 반발심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의 제목과 요약문을 읽고 홀린 듯 들어왔습니다. 글을 읽고 나니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맞습니다. 외로우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뿐인 손녀에게 변명하고 싶으셨을거고, 그럼에도 멋있게 살아왔음을 알아줬으면 하셨던 것일테지요. 결국 말을 걸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글에 적으신 것처럼 저 또한 일말의 관심에 저의 불행을 토해낼 때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저는 왜 여지껏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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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
- 2021.05.23 16: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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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강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관계 없는 남의 맥락은 헤아리려 시도하면서 왜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은 외면하고 말까요... 같이 연습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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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푸른 아우성
- 2021.07.03 21: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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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이네요. 솔직하면 조심스러운 글이라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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