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여전히 성장물을 보는 이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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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전히 성장물을 보는 이유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시기가 유독 불안정하고 아프게 느껴지는 건 그 시절의 우린 경계선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경계선에 선 나이.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이 어색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고, 어른의 세계는 한없이 속물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답답한 건 이 감정의 발원을 본인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떤 어른이 돼야 할지 나에게 맞는 일은 무엇일지 모르겠다(지금도). 나를 옭아매는 구속을 벗어나 어른이 되고 싶기도 하지만 속물적인 어른의 세계로 편입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끝나지 않을것 같던 학창 시절도 끝을 향하고, 우리는 무한하게 펼쳐져서 있지만 앞날은 모르기에 막막한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을 해야 한다.
성장물은 시종일관 어리석은 짓을 일삼는 그들의 모습에서 부끄러워 묻어두었던 그때의 나를 다시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지금은 느끼기 힘든, 너무 찬란하고 완벽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도, 삶의 문턱까지 밀고 갔던, 스치기만 해도 아팠던 상처들도, 끝나지 않는 터널 안을 걷는 것만 같았던 어두움도, 추억이라고 포장하기엔 엄청났던 무엇인 그 시절을, 그저 치기 어린 때라고 하고 싶진 않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시절을 묘사할 완벽한 수식어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대답을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성장통을 요란하게 겪어내는 이들이 있다.
'나' 보다 '우리'가 더 중요한.
<미드 90>
왜 십 대 때는 유독 친구와 또래 무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여겨질까? 어디에도 끼어있지 않다는 소외감은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이끈다. 십 대는 극단적이고 극단적이기에 십 대이다. 청소년기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는 친구를 사귀고 무리의 일원이 되는 일일 것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교육 못지않게 우리는 또래 무리에서 그 시기에만 겪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경험들을 하고 세계의 작은 모형인 그룹에서 세상과 교류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 처음 부모품을 벗어나 절대적인 애정만을 주는 것이 아닌, 완전한 타자로써 나를 대하는 누군가를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운다.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하는지 많이 봐왔다. 내가 원하는 무리에서 일원이 되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아는척하고 자신이 얼마나 쿨한 사람인지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소속감에 예민한 이 나이는 역으로, 그룹 외의 아이들에게는 철저하게 배타적이다. 그룹에서의 점유된 나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그것을 빼앗기고 싶지않고, 그때문에 외부요인에 의한 변화에 저항감이 크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그룹 멤버의 수가 홀수가 되지 않게 신경을 쓰고, 본인을 제외하고 친구들끼리 놀러 갔다는 걸 알면 매우 상심한다. 연인과의 관계 이전에 더 강렬하게 겪은 ‘질투’를 이 무리에서 느낀다. 어쩔 때는 나의 정체성은 나로 대변되는 나의 무리인 것 같다.
조나 힐 감독의 <미드 90>은 청소년기의 친구와 방황이라는 소재를 마치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것처럼, 90년대의 풍경을 통해서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13살 스티비는 스케이트보드라는 연결점으로 쿨해 보이는 친구들 무리에 끼게 되고. 그들과 좌충우돌 시끄러운 한때를 보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족에 대한 서사, 우정에 대한 서사 그리고 성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조나 힐은 코믹한 연기 전문 배우로만 알고 있었는데 감독으로서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영화는 무척 리얼하고 9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장면들로 그 시절의 청춘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레트로 한 감성을 듬뿍 담은 영상들은 기억나지 않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나를 성장시킨 소녀의 죽음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인간관계라는 게 부질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한 시절 내내 붙어 다녔던 죽고 못살았던 친구와 어느 순간 소원해지고, 상대가 아무런 통보 없이 연락을 끊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서로의 시간과 돈을 같이 탕진했는데, 결국은 내가 아닌 다른 친구와 지낼 때. 그때 그 시간들은 서로에게 뭐였을까 반문해 보게 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멀어진 친구가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어쩌다가 그 친구가 등장하는 꿈을 꾸면,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지면서도 이내 그 생각을 접는다. 내가 만나고 싶은 것은 지금의 내가 모르는 친구의 모습이 아니라, 그 시절의 같은 시간을 공유한 친구인 것이고,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절의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나와 과거의 친구로도 성립되지 않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친구로도 성립되지 않는, 과거의 나와 과거의 친구와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빙글빙글 도는 원형의 시간을 계속 되새김질하면서 산다. 당연히 나만큼이나 많이 달라졌을 친구를 만나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가닿을 수 없는, 흘러버린 시간의 간극을 느낄 것이고 현재의 모습 속에서 과거의 얼굴을 계속 찾을 것이다. 결국 사람은 실체 없는 기억 속의 존재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닐까. 그 시절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기억 속의 우리는 언제까지고 남아있고, 그렇다면 그 시절의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라, 부재로써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 미성숙한 소년이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소녀의 흔적으로부터 자신을 성장시키는 영화가 있다. 이영화는 타인의 부재로부터 우리가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아프지만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아름다운 관계 맺기에 관해 말한다.
그렉은 자존감이 낮은 전형적인 미국 너드(nerd)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 목표다. 친구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고 두루두루 원만하게 지내며 학교를 하나의 정글로 묘사한다 본인은 그 생태계에서 하층에 위치한 연약한 토끼일 뿐이다. 어느 날 그는 백혈병에 걸린 소녀 레이첼과 친하게 지내라는 엄마의 특명을 받고 그녀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얼과 같이 지내게 된다. 그렉과 얼은 고전영화들을 패러디해 영화를 찍곤 한다. 레이첼과 친해질수록 그녀의 병세는 악화되고 약물 치료로도 병세가 완화되지 않자 그렉은 레이첼에게 화를 내고, 설상가상으로 성적은 바닥을 치면서 대학 합격은 취소된다. 레이첼을 위해 영화를 만든 그렉을 그것을 레이첼의 마지막 순간 직전에 보여주고 레이첼은 혼수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레이첼의 장례식 이후 그녀의 방을 둘러보면서 그녀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그녀의 어린 시절들을 짚어나가면서 레이첼의 짧았던 인생은 아름다운 추억들로 가득했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생애는 안타까웠던 것이 아닌, 멋지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렉은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떤 방어기제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레이첼과 관계가 깊어질수록 헤어짐의 슬픔을 예감하고 그것에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과의 우정을 되돌아보면서, 아무리 아파도 서로가 맺는 진실된 관계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임을,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의미라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자존감을 찾지 않았을까. 레이첼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레이첼의 죽음으로 그렉은 한 발짝 더 성장하게 된다.
‘죽어가는 소녀가 죽어가는 영혼을 살렸다.’라는 리뷰가 기억난다.
그렉은 계속해서 레이첼을 알아갈 것이기에 레이첼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독과 외로움은 어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인간의 고독과 내면의 고통을 잘 그려낸 감독이 있다. 그가 제작한 발랄한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성장영화 <하나와 앨리스>를 생각하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하 릴리 슈슈)은 사뭇 결이 다르다.
하나와 앨리스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 나이이기에 서툴지만 그렇기에 반짝반짝한 젊음을 보여준다. 코에 모기를 물려도 예쁘고 발레슈즈 대신 종이컵을 끼워서 춤을 춰도, 오히려 그런 어설픔이 그들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는 이런 것만이 십 대의 전부는 아니라는 듯이 또 다른 성장물을 만들었다.
어떤 성장통은 지독하다. 발끝으로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것 같다. 유충이 성충이 되는 과정은 아름답지 못하다. 일단 성체가 된 아름다운 나비를 보면 우리는 유충이었을 나비의 과거는 쉽게 떠올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너무 가혹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면 유충은 영원히 성충이 되지 못한다.
사회는 십 대의 그늘을 외면한다. 그것은 그저 한 시절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그들이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십 대의 모습은 우울과 고독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다. 이들을 학생이 아니라 단독자로서의 인간으로 보면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게, 혹은 더 고독하고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나이는 자력으로 돈을 벌 수도, 집을 나갈 수도 없기 때문에 무기력하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진창이라서 그 낙차에서 오는 절망감은 크다. 한껏 예민한 감수성은 약간의 스크래치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다.
굳이 꺼내서 들추고 싶지 않은 어두운 십 대의 그림자들을 영화는 태연히 보여준다. 어딘가 익숙한 찌질하고 위악적인 청소년 남자아이들 특유의 허세와 폭력성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기에 조금은 불편하다. 마치 숨겨놓은 폐부를 완전히 까발리는 느낌이다.
영화는 '릴리'라는 신비스러운 가수와 그녀 노래의 '에테르'라는 것을 신봉하는 주인공 유이치와 그의 옛 친구이자 지금은 아이들을 조종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호시노의 관계, 그리고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의 복잡한 갈등과 아이들의 심리를 잘 담아낸다. 그리고 특유의 암울하고 유약한 청소년의 감수성과 세기말의 감성이(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 멸망 예언) 겹쳐지며 특유의 암울함을 자아낸다. 후에 이 영화에 관해 더 자세히 다뤄보고 싶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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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이 영화들을 살펴보며 저렇게까지 요란한 십 대를 보내지 않았음에 아쉬우면서도, 무사히 그 시기를 통과해온 것에 대한 안도감과 놀라움을 느낀다. 정말 연약했던 나는 조그만 상처에도 주눅 들고 아파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느 정도 그런 일에 무던한 어른이 되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혹은 지금 이 시기를 유독 아프게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무리 어둡고 끝이 안 보이는 터널도 끝은 있다고.
[박정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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