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 - 레이디버드 [영화]

글 입력 2021.05.09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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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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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너의 인생을 괴롭게 만든 것이 무엇이냐 물었다면, 당장 몇 년 전만 해도 나의 대답은 아마 책 한 권을 넘어갔을 것이다.


마냥 못 한다고 단정하기엔 애매하지만 잘한다고 자신하기엔 턱도 없었던 학교 성적, 입학 첫날부터 집요하게 나를 놀려먹었던 몇몇 덩치 큰 동급생들, 가져본 적 없는 방과 침대, 남들도 다 가졌다는 이유로 핸드폰이나 MP3를 욕심내기엔 늘 눈치가 보였던 집 안 사정, 살짝만 건드려도 다리가 구부러지던 접이식 식탁, 알 수 없는 이유로 겨울마다 물이 샜던 천장, 받아본 적 없는 용돈 등등.


그런 것들은 종종, 아니 사실은 거의 항상 내 삶이 나아가게 될 방향을 미리 가리키는 화살표처럼 느껴졌고, 그 때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주문처럼 되뇌어야 했다.


“나는 특별하다.”


그 생각이 나를 조금은 달라지게 해준다고 믿었다. 길지 않았던 사춘기는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빈틈없이 꽉 채우고 있을 때 왔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반항이나 방황은 나를 가둬놓은 이 인생의 초라함을 외면하고 싶을 때 생기는 반작용 같은 것이란 걸, 그때가 지나서야 알았다. 내 주변의 어른들도 대부분 그런 시절을 거친 끝에 어른이 된 것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이것이 영화 <레이디 버드>가 감독 개인의 자전적 회고록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원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레이디 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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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이 스스로 지어 붙인 미들 네임 “레이디 버드”는 특별해지고 싶다는 그녀의 갈망 그 자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양말을 받아야 하는 가정형편. 나에게 늘 너그럽지 않은 엄마. 재취업이 힘든 시기에 실직을 해버린 아빠. 사사건건 부딪치는 인종이 다른 오빠. 그 모든 지긋지긋한 것들이 한 데 모여있는 새크라멘토라는 촌구석.


그곳에서 유독 하얀 피부를 가진 크리스틴은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거울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내가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생겼어?” 크리스틴은 자신이 새크라멘토의 크리스틴이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은 것이다.


그녀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내걸고 하는 모든 기행과 맺게 되는 관계, 몇몇 어른들에게 뱉는 악독한 말들은 모두 자신이 세크라멘토의 크리스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발버둥이다. 그것은 그녀를 아꼈던 주변 지인들에게도 상처를 줬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상처 입혔다.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사귄 첫 남자친구는 남들과 다른 성 정체성을 숨기고 있었고, 서로 순결을 주고받았다고 믿었던 두 번째 남자친구에게 그녀는 그의 숱한 경험 중에 한 번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소중한 절친을 멀리하면서까지 사귄 퀸카 친구에게 크리스틴은 전혀 소중하지 않았다.


그런 크리스틴에게 뉴욕행은 레이디 버드로서 살아가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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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 크리스틴은 깨닫고 만다. 내가 사실은 새크라멘토라는 장소를 너무나 사랑했다는 걸. 그곳에서 함께 했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정말 특별한 사랑을 넘치게 받았다는 것도.


삶에는 그렇게 한, 두 걸음 정도 떨어져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이후 크리스틴은 뉴욕에서 새크라멘토를 돌아보며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고, 처음으로 스스로를 크리스틴이라 부른다. “레이디 버드”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그 시절과 결별하며 “저한테 참 예쁜 이름을 지어주셨더라고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이렇게 말한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모두 무엇 하나 덧붙일 필요 없이 아름답다고.

 


[임현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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