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리 동네

글 입력 2021.03.1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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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했던 동네를 떠났다.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아서인지, 기억에 묻은 그곳의 여러 사람들 때문인지 같은 나라 안에서도 향수를 느끼는 신세다. 어제는 각종 지도 앱에서 공개하고 있는 실시간 CCTV 영상을 들여다 보기도 했다. 떠난 이후 고작 다섯 밤 잤는데, 변함없는 모습에 안도를 한다.


우리 동네는 시끄럽고, 많은 사람이 살고,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나는 번화가의 끄트머리에 살아서, 또 땅과 가장 가까운 일 층 같은 이 층에 살았었고, 덕분에 그들의 소리를 모조리 들어야 했다. 싸우다 우는 소리, 술에 취해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 심지어 새벽에 쓰레기차가 삐 삐 소리를 내며 들렀다 가는 소리까지. 새벽녘 와앙 울리는 오토바이 소리나 취객의 노랫소리가 들릴 때면 부스스 깨서 창문을 닫곤 했다. 그러지 말걸.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모든 학창 시절은 우리 동네에 머물러 있다. 자주 가던 떡볶이집이 사라졌다가 자리를 옮긴 일, 세탁소 아주머니가 내 코트를 꼼꼼히 여며준 일 따위가 자꾸만 나를 붙잡는다. 친구와 싸우고 집으로 향하던 길, 수능을 친 날 길거리에서 냅다 내 손을 잡던 아빠의 모습, 처음 술을 마시고 들어오던 날의 빙글빙글 돌아대던 사거리.


적지 않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기에, 기숙사나 자취를 하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본가에 가서 화려한 끼니를 얻어먹곤 했기에 동네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의도치 않게 각종 가게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복권방 아주머니는 ‘쪼끄만 게. 그만 사.’라고 나무라곤 했고, 번호가 잘 나오라고 기계를 똑똑 두드리기도 했다. 자주 가던 횟집 주인아저씨는 이사 전날 찾아간 나에게 커다란 두꺼비 모형 저금통을 선물했다. 만만치 않았던 첫 아르바이트가 서러워 집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날, 모르는 할머니들이 다가와 다정치 않은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가스나, 일어나라. 하며.


해외로 나가는 것도 아닌데 유난을 떤다고 누군가는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처음이라서, 어디가 동쪽인지 서쪽인지도 잘 모르겠는 공간 자체가 처음이라서. 한 시간이면 서울 곳곳을 누빌 수 있었던 특권 때문도, 삼십 분 만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던 접근성도, 온갖 프랜차이즈를 집에서 삼 분만 걸어가면 마주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움의 이유는 아니다. 단지, 어딜 가든 모르는 길이라, 그 기분조차 너무나 모르겠어서.


지금 우리는 14층에 산다. 바깥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나를 깨우는 건 짧은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햇빛뿐이다. 오늘 아침에 깨달았다. 아, 이쪽이 동쪽이구나. 짜증스럽게 느껴지던 소란이 그립다. 빨리 와아! 늘 건물 입구에서 소리치던 아이도 언젠가 그 동네를 떠날까. 상스러운 말을 뱉으며, 건물 지붕이 들썩거릴 만큼 심하게 싸우던 윗집 부부는 곧 단단해질까.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우리 동네의 변화를 함께하고 싶고, 그 변화의 일원이고 싶다. 이사를 하며 희망과 용기가 아닌 그들에 대한, 그곳에 대한 관심을 거두기를 배워야 한다니.


지금은 낯선 이 동네, 언젠가는 ‘우리 동네’라고 말할 날이 올까. 그때는 나의 취업부터 결혼(혹은 비혼), 이직과 퇴직을 함께했던 동네라고 소개하게 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동쪽과 서쪽이 어디인지 알았으니, 당장 오늘부터는 걷고 또 걸어 보려 한다. 취객이 없는 동네, 살기 좋고 깨끗하며 인프라가 좋은 데다가, 도시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에서 흡연하는 사람도 없고,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지 않는 동네. 다른 사람 일에 쉽게 참견하지 않는 동네. 새로운 ‘우리 동네’의 첫인상은 그렇다. 채도가 낮은 도시.

 

 

[이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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