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세랑의 세계로 성큼 [도서/문학]

좋은 입문작,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그리는 정세랑의 세계
글 입력 2021.03.0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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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보건 교사 안은영>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제작, 유통되면서 정세랑의 작품세계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물론 드라마가 제작되기 이전에도 국내 문학을 즐기는 독자들에게 정세랑의 세계는 독특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유명했다.

 

여성 SF 작가들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책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느껴질 만큼 거대한 흐름이다. SF 장르가 어색한 이들에게도 정세랑의 세계는 장르적 문턱이 느껴지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정세랑의 어느 작품으로 정세랑 세계로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 좋을까? 개인적으로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추천하고자 한다.

 

 

 

정세랑의 세계로 성큼

좋은 입문작,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그리는 정세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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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는 단편집으로 총 8편의 작품이 하나로 묶인 소설집이다. 지루하지 않은 단편의 호흡이기 때문에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물론 한동안 책을 손에서 놓았던 사람들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미래 도시, 우주, 환경, 외계의 존재, 몸의 변형, 좀비 등 SF 장르의 핵심적인 요소가 각기 다른 글 속에 심겨 있다. 추천의 이유는 이 다양성에 있다. 장르적으로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렵거나 새로운 기술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설계하고 이를 지루하게 설명하거나 혹은 인색하게 묘사하고 독자의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글은 SF 장르가 어색한 독자들에게는 난관이 될 수 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실린 단편은 우리가 아주 짧게라도 상상해 본 적이 있는 일들로부터 출발한다. 나에게 돈이 많다면, 세상 어딘가에서 미지의 연구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면, 지구가 이대로 망한다면, 좀비가 나타난다면… 등등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고갈되어도 괜찮다. 이제 정세랑의 세계에서 이 상상에 상쾌하고 풍부한 호흡을 실어줄 기회가 생겼으니.

 

『목소리를 드릴게요』 속 다양한 이야기들은 힘찬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가장 부드럽게 우리의 살결을 어루만지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장르적 특성을 거친 상상들임에도 불구하고 정세랑의 글은 도착적으로 불행을 쫓는 류가 아니다. 또한 고루하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고정적인 인간성을 강조하는 SF 문학도 아니다.

 

존재와 세계를 확장하고 넓혀나가는 일. 부연할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가장 소중한 가치로의 집중. 이 양방향의 움직임이 정세랑의 세계에서는 동시에 일어난다. 많고 많은 인간의 관습 중에서 어떤 것이 인간성인지를 질문하는 동시에, 기존의 세상이 구성하던 배제적 인간성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확장과 소거가 이루어지는 정세랑의 세계는 상쾌하다. 그러나 소위 유행하는 ‘사이다’ 식의 통쾌함은 아니다. 과잉된 감정과 과잉된 표현이 일상화되어 가는 풍경 속에서 정세랑이 만든 세계는 잔인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잔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잔인하지 않은 방법으로 생을 발굴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표제작인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책에 첫 번째 작품으로 실린 <11분의 1>과 매우 비슷한 속내를 가진다. 정세랑 식의 로맨스는 이런 모양새인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한다. 우리는 과학이 발달한 세상을 낙관할 때에 상실을 대체할 물질이나 기술을 이유로 대곤 한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상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SF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복제인간이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와 소설 속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테마라는 점이 그 증거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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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세랑의 세상은 상실의 고통을 수용하고(<좀비 시대의 메달리스트>), 상실을 위해 용기 내고(<목소리를 드릴게요>), 상실에 대해 속죄한다. (<리셋>, <7교시>) 기술만능주의로 가득 찬 즐거운 상상도 매력적일 때가 있으나 정세랑 세계의 미덕은 그와 무관하다. <리셋>을 비롯해서 <베이비 블루필>과 <7교시>는 환경과 인간에 대한 동일한 심지를 줄곧 보여준다.

 

환경 위기에 대한 이상적인 해결법을 상상하고 책을 펼쳤다면 상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 자초한 세계의 상실에 대해 정세랑의 세계는 매우 단호하다. 지구를 망친 인간에게 쉽고 간단한 해결법과 함께 쾌감을 선사하는 이야기는 이 세계에서는 의미가 없다. 정세랑의 세계가 가진 원칙들이 있기에 독자들은 오히려 안전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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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단편들은 글이 세계를 보여줄 때 얼마나 즐거운지, 이야기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상기시키는 글들이다. 생생하고 사랑스러운 문장 하나를 붙잡고 칼칼한 심정으로 읽게 되는 구간도 있다. 특히, 세상이 변한 순간에 주인공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감정을 꺼내 놓는 기점들은 독자들에게도 진공의 느낌을 전달한다. 오직 그 문장하고 독자만이 진공 상태에서 대면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생기는 것이다.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문장들이 특히나 그런 점에서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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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메달리스트의 좀비시대>인데, 지금과도 같은 혹세에 여러 차례 읽고 싶은 글이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싱그러운 미나리를 먹고 싶어 하는 정윤의 마음을 우리는 어쩌면 매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담담하지만 무감하지 않은 정윤의 모습은 사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주인공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절박함만 남기고 모든 것은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을 때 무엇을 소중히 하게 될지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메달리스트의 좀비시대>는 그 부분을 다루면서도 지겹지 않다. '인간'의 존엄이니 하는 텁텁한 말은 뒤로 넘기고 승훈의 웃음을 떠올리면서, 그와의 여름이 마지막 여름이라 다행이라는 말을 꺼내놓는 주인공의 세상은 소박하고도 대담하기 때문이다. 망해가는 것만 같은 세상에 사는 독자인 우리들도 각자의 계절을 소중히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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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좋았던 것은 <리셋>에서 종교적 믿음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었던 점이다. 운명론적인 귀결, 신탁을 받아온 자의 분위기를 풍기는 타임리프 소재 등은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매혹적인 주제일 것이다. 더불어, 환경주의적인 맥락으로 세상의 자정 혹은 징벌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뒤이어는 그 운명이 결국 자전적 결정에 대한 징벌이라는 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의도적 신성모독이 떠오르는 서사 구조를 지닌 글이라고 소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서사적 존재감을 인식하는 감각은 장르 문학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이나 <리셋>이 보여주는 거대한 회귀에 대한 각기 다른 가능성 역시도 거대한 굴레를 상정한다. 따라서 정세랑의 세계는 매우 독창적인 동시에 SF라는 장르문학으로서도 충실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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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것만 같은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조금 더 상냥하게 살아가는 상상을 하는 모든 이들은 정세랑의 세계에서 위로를 받곤 한다. 도대체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할지, 혼자서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가늠이 안 될 때, 그래서 양심도 없이 무력감을 느낄 때. 그 순간에 다시금 읽고 싶은 것이 『목소리를 드릴게요』이다.

 

교조적이지도 않고 신파도 아닌데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SF 소설들이 여기에 모여있다. 무리하지 않는 담백한 마음으로 디스토피아와 생존(인간의 생존만 말하는 것이 아닌 생존)을 그려보게 하는 소설집이 주는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철저하고, 처절하게 반성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믿음도 남긴다.

 

정세랑의 세계는 그렇게 통통 튀고, 담담하고, 마구 확장되었다가도 아주 조그맣게 굴러간다. 처음 당도한 독자들에게도 쉽게 자리를 내어주는 설득력의 내러티브가 강한 장점이기 때문이다. 정세랑의 세계에 온 모두에게 환대를!

 

 

책 원문 인용 RIDI BOOKS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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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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