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시 태어나도, 독어독문 [사람]

글 입력 2021.02.2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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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동도 사고도 느린 편이지만 확실하고 단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나 자신을 믿으며, 하고 싶다고 여겨지는 일에는 나만의 단단한 이유를 가지고 꾸준히 이어 나갔다. 언어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한결같았다. 사람,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면 늘 끼는 편이었다. 혼자 있는 것보다 불균질한 여럿이 모여 이루는 다채로운 대화가 참 즐거웠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는 대화 끝에는 항상 여운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곳에 소속되든, 사람들 사이 나의 모습은 참 다양했다. 언어를 계속해서 배우고자 하는 나의 단단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언어를 배우고,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만나며 나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다양하게 변화했다. 마치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력의 한계를 깨부수는 느낌이었다.

 

대학 4년 내내, 단 한순간도 독어독문을 전공으로 배운 것에 대한 회의감은 없었다. 오로지 언어에 대한 나의 열정과 관심으로 인한 자발적인 선택과 의지였기 때문에 흔들림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이 대학 생활 동안 나를 괴롭혔다.

 

 

독문과면 독일어 할 줄 알겠네요?

독일어 한 마디만 해 주세요!

 

 

독어독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후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과 부탁 중 하나다. 어느 정도 질문과 부탁에 대한 의도가 이해는 간다. 궁금하면 충분히 물어볼 수 있다. 단지, 질문을 하기 전 '독문과면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겠네' 하면서 '보편적'이라고 일컫는 개인적인 단상, 이미지들을 늘어놓는 말들이 늘 불편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다 부끄러웠다. 괜히 말하고 싶다가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나는 독문과 학생으로서 무엇을 배웠다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 자리에서 제대로 답하지 못한 순간들이 떠오를 때면 아쉽고 후회된 적이 많았다.

 

그 질문에 대해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 제대로 답하기 위해 4학년 막학기만 남겨둔 채 1년 휴학을 결정하고, 혼자 독일 프리무버(유학과 비슷하다)의 길을 나섰다. 언젠가 꼭 혼자서 독일로 가보겠다 한 다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배운 독일어, 독일 문화를 현실 독일 생활에서 써먹을 때가 온 것이다. 유학 과정 중 필요한 모든 행정 업무(비자, 숙소, 은행, 보험, 독일 교수님 연락) 모두 혼자서 감내하였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내내 오로지 '독일어'로만 소통을 하였다. 그것은 독문과 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강한 소신이었으며, 개인적으로는 큰 용기와 다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내가 잠깐 몸담았던 독일 학교는 기센대학교로, 꽤 외국인 유학생들이 많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난 운이 좋게도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기꺼이 시간을 내어 기분 좋게 대화를 이어준 외국인 친구들을 참 많이 만났다. 내가 한국에서도 독문과 학생임을 말하니, 그들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

 

 

왜 독문학을 공부하니?

졸업하면 뭘 하고 싶어?

 

 

여전히 난 이 질문에 대해 고뇌 중이며, 사실은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무작정 떠나왔다고 덧붙였다. 그럼 넌 어때? 되물으면, 본인이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였다. 그 대답들을 들으며 난 적잖이 놀랐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지금 기센대학교에서 왜 공부를 하며, 독일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러하였다. 한 명 한 명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며 점점 더 확신이 느껴졌다. 자신에 대해,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하는 친구들임을.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그 친구들의 고민의 깊이를.

 

*

 

아쉽게도 예기치 못한 펜데믹으로 인해 계획한 학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되돌아왔지만 6개월의 독일 유학 생활로 깨달은 점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만민의 공통어라고 불리는 영어가 아닌 굳이 그 나라의 고유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 나라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짐을 의미한다. 특히, 구체적인 상황이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의 상황이나 요구를 정확히 말함으로써 언어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중 결제 문제로 서비스 센터에 빠르게 문의를 넣어야 할 때, 정육점에서 원하는 부위의 고기를 어느 정도의 두께로 썰어 달라 부탁할 때, 도서관에서 어느 특정한 독일 사례를 찾고자 할 때. 이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서 독일어 구사는 분명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평등한 상황에 대해 발 빠르게 대응하여 돈을 되받았으며, 원하는 두께의 고기를 얻어 굳이 힘을 들여 고기를 얇게 썰지 않아도 됐고, 독일어본 원서를 통해 보다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 습득이 가능했다. 그것들로 조금은 삶의 질이 풍요로워졌다. 그렇게 몇 번의 짜릿함을 맛보니, 언어의 힘을 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늘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일들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독일어를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언어의 힘을 빌어 필요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었다.

 

두 번째, 나에게 문학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문화와 정신을 배우는 통로였다. 한국에서는 대학 내 독어독문학 커리큘럼은 늘 일관적이었다. 1학년 때는 독일어 종합 능력을 다지며, 2~3학년 때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독일 문학 작품(시, 소설, 희곡, 동화)을 깊게 다룬다. 예를 들어, 하나의 작품도 그 안에 시대상, 문화, 작품 속 특이한 장치, 작가에 대해 살펴보고, 더 생각해 볼 만한 내용(철학적 문제 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토론을 이어 나간다. 이런 식으로 문학 세계 안에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를 마음껏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 방식이 더 자유로웠다. 독일에서 듣게 된 수업 대개는 5-6명 정도 소수 정원의 세미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당당히 손을 들고 적극적으로 발언을 하였고, 서로 간 의견이 덧붙여지며 자연스럽게 토론의 장이 이루어졌다. 교수님과 학생들 간 즉각적인 피드백 교류도 가능했다. 그야말로 수업이라는 느낌보다 아낌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주어진 작품 읽기를 넘어서 함께 사유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으로부터 그제서야 현실과 맞닿아 있는 실질적인 토론의 장을 맛보는 셈이다. 사람과 이야기가 담긴 문학 수업은 늘 살아 숨쉬는 문화와 정신의 현장이었다.

 

모든 것을 통틀어 내가 독어독문학에서 느낀 것은 언어, 사람, 이야기의 힘이었으며, 이를 통해 배운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였다. 좋은 글을 통해, 좋은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통해, 현장에서의 뼈아프지만 가치 있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삶의 교훈을 얻고 갈고 닦았다. 낯선 것도 기꺼이 배우고자 했고, 새로운 사람에게 기꺼이 먼저 다가가 친해졌으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끈으로 삼아 좋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부지런히 나의 삶을 꾸려 나갔다. 그리고 지금의 단단하고 강한 나의 내면의 삶을 만들었으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존중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앞으로도 오래 지키고 싶은 나의 삶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난 다시 태어나도, 수많은 언어들 중 독일어를 만날 것이며,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렇게 늘 사시사철 단단한 마음으로 글도 쓰고 말도 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양한 사람들과 '오래'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고 싶다.

 

 

[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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