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군가에겐 현실이기에 더욱 두려운 [영화]

글 입력 2021.01.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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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국으로 떠난 14살 캄보디아 소년 차크라(삼 행). 브로커의 사기 행각으로 불법 어선에 끌려간 그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하루 22시간의 강제 노역을 시작한다.


영화는 배가 바다 위를 가르는 광경을 30초 정도의 긴 시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줌 아웃한다. 배에서 멀어지고 또 멀어져도 화면에 펼쳐지는 것은 오로지 망망대해뿐이다. 이러한 기법은 방대함, 아득함과 동시에 마치 온 세상에 바다와 배 한 척밖에 남지 않은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타고 있던 배가 제 세상의 전부였을 차크라의 막막함으로의 이입을 돕는 장면이다.

 

생각보다 무섭고, 무거운 영화 <부력>은 어린 소년 차크라의 시선을 통해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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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물을 걷어 올리다 수면을 떠다니던 사체와 마주하자 차크라는 멈칫한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껏 바다 위로 던져졌던 여러 동료가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손을 멈춘 것도 잠시, 차크라는 다시 일에 몰두한다. 한 공기도 채 되지 않는 밥과 썩은 물, 비인간적인 폭언과 폭행을 견디면서도 차크라는 묵묵히 노동을 이어간다.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신념 하나로.


그런 차크라가 다른 사람이 되기를 택한 변곡점은 아마 처음으로 조종간을 잡은 때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캄보디아산’을 실으러 항구에 도착하면 배에서 내릴 수 있으리라, 일을 마치면 정당한 봉급을 받아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던 소년의 실낱같은 희망은 그 순간 완전히 전소된다. “그렇게 당해놓고 아직도 몰라?” 동료가 절규하듯 물었던 것들을 조종 레버를 손에 쥔 순간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비인간적 횡포에도 불구하고 선장을 벌할 존재는 이 세상에 없고, 자신이 직접 이 레버를 당기지 않는 한 이 배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러한 각성의 순간, 마치 그 변화를 읽어내는 듯이 선장은 오묘한 얼굴로 차크라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정말 홀로 남았다는 고독은 그의 절망에 불을 지피고, 차크라는 마침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두 삶의 경계를 나타내는 장치는 꿈이다. 고향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아버지조차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꿈은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차크라의 각성을 보여준다.

 

과연 선장의 서랍에서 꺼낸 돈을 만지작대던 차크라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죄책감? 아니면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 엔딩씬에서 가족을 택하는 대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차크라의 얼굴 위 미소에서 관객은 그 답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악의 대물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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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선장 역 타나웃 카스로 배우 역시 유년시절 실제로 어업 노동에 시달렸다는 인터뷰는 영화에 현실감을 더한다.

 

 

차크라는 순조롭게 태국을 벗어나 귀환에 성공하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졸이곤 한다. 타인이 건넨 순수한 호의였던 음료수에 무언가 타있는 건 아닐까, 배에 남게 된 동료 선인들이 따라와 해코지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관객의 걱정과는 달리 그대로 엔딩크레딧은 올라가고 영화는 끝난다.

 

이 과정에서 마치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고 끝난 듯한 찝찝함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권선징악이라는 결말에 대한 무의식적인 집착 때문이다. 성공하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 사회가 끊임없이 인간에게 주입하는 사상이자 신념 말이다.

 

물론 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러한 공정함은 조금도 등장하지 않는다. 설마 저렇게 사기를 치는 건 아니겠지, 곧 있으면 조금이라도 봉급을 주겠지, 저렇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한다고? 그러한 관객의 윤리적인 기대를 하나하나 친절하게 꺾어 버리는 게 이 영화다.

 

그럼에도 관객은 마지막까지 무심코 ‘걸맞는 전개’를 기대한다. 영화 내내 차크라가 당했던 가혹행위를 알고 있음에도, 소년의 악행에 대해 어떠한 형식으로든 처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무사귀환을 보며 관객은 그가 겪었던 바로 그것, 공정함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일그러지는 것을 경험함과 동시에 소름끼치는 현실감을 느낄 수 있다.


단지 영화일 뿐이라는 이유로 관객이 둘 수 있는 일말의 거리감까지 깨부수는 <부력>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관람하는 당신과는 달리 누군가에게는 현실로 닥칠 이야기를 전한다. 공정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도, 악한 자에게 내려질 벌도 없을 그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물고기와 함께 바다 아래로 버려지고 있다.

 

관객을 무겁게 잠식시키는 영화 <부력>을 통해 그들의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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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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