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생에 독일과 나는 무슨 사이였을까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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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넘게 연락이 없던 친구에게 오랜만에 메시지가 왔다.
“호연아, 너 지금 유럽이야?”
순간 웃음이 났다. 하긴 주기적으로 바뀌는 내 카카오톡 프로필 이미지가 온통 유럽 여행 사진이니,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당연히 한국이지!”
벌써 네덜란드 교환학생을 다녀온 지 1년이 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에도 교환학생 시절이 꿈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정말 신기루 같다.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어서 몇 년 동안은 유럽에 다시 못 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코로나19’라는 더 커다란 장벽이 생길 줄이야. 마스크 없이 수많은 사람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유럽을 누볐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유럽 15개국을 여행했지만 그중 가장 자주 방문한 나라는 독일이다. 프랑크푸르트와 쾰른, 본, 베를린, 드레스덴, 이렇게 무려 네 번을 갔다. 독일은 네덜란드와 가까워서 비행기가 아닌 기차나 버스로도 쉽게 다닐 수 있어 편했다. 하지만 독일과 나는 잘 맞지 않았다. 독일에 갈 때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겼다.
첫 번째 독일: 프랑크푸르트 & 쾰른
네덜란드를 벗어나 처음으로 여행을 간 곳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쾰른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구경을 마치고 쾰른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쳤다. 사람들이 아무도 안 내리고 버스 기사님도 별 안내 없이 잠깐 내렸다가 다시 타길래 당연히 쾰른이 아닌 줄 알았다.
다음 정류장은 다행히 다른 나라가 아닌, 독일 뒤셀도르프였다. 뒤셀도르프에 잘 내렸지만 쾰른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는 것도 일이었다. 티켓 기계가 작동하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려 말을 걸었는데 다들 들은 척도 하지 않아 화가 났다. 다른 티켓 기계를 찾아 겨우 표를 끊을 수 있었고, 쾰른에 무사히 도착했다. 버스에서 잘 내리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초보 여행자의 서러움을 느꼈다.
여행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려는 기차를 타러 갔는데 역 사정으로 인해 모든 기차가 취소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가 택시 바우처를 받았고, 네덜란드로 가는 사람 다섯 명이 모여 세 시간 동안 택시를 타고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택시로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다니. 누군가 교환학생 시절을 궁금해하면 가장 먼저 푸는 이야기보따리가 되었다.
파란만장했던 여행이지만, 그래도 정말 즐거웠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쾰른 대성당이었다. TV나 책에서만 봤던 쾰른 대성당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충격적인 자태였고, 너무나도 웅장했다. 카메라 화면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낮에 봐도, 밤에 봐도 아름다웠다. 비바람 부는 날씨에 우산도 망가지고 대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게 한 장도 없지만, 그래도 대성당의 아름다움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두 번째 독일: 베를린
독일에 다녀온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옆 방 친구의 설득에 넘어가 충동적으로 베를린 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이번에는 평탄한 독일 여행이 되길 간절히 바랐지만 문제는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발생했다. 숙소 체크인을 하려는데 친구가 여권을 안 가져왔음을 깨달았다. 버스에서 여권 검사를 하지 않아 미리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교환학생 지원할 때 여권 사본을 제출했던 게 기억나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는 등 정신없이 여권을 대체할 방법을 찾았고, 다행히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월요일 수업이 있어 친구보다 하루 일찍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 내가 탈 버스가 취소되어 한 시간 늦은 버스를 타야 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독일과 나는 정말 맞지 않는 것 같아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택시를 타고 돌아와야 했던 지난 여행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을 온전히 즐기기에 이틀은 부족했다. 하지만 이때가 아니었으면 베를린에 가지 못했을 것 같아서 짧게라도 베를린을 둘러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베를린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콕 집어 한 곳을 말하기가 참 어렵다. 그냥 그 도시의 분위기가 참 매력적이었다. 베를린은 굉장히 ‘힙’한 도시였다. 자유로웠고, 여유로웠고, 열정이 넘쳤다. 사장님이 대충 만들어주는 듯했지만 정말 맛있었던 핫도그도,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로 가득했던 마우어파크 플리마켓도 기억에 남는다.
세 번째 독일: 본
벚꽃을 보러 본에 가기 위해 기차표를 예매했다. 하지만 여행의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를 타러 가야 했는데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머리도 못 감은 채 보이는 옷을 아무거나 입고 나갔다. 급하게 우버를 잡았고 다행히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는데 기차가 지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간에 환승을 두 번이나 해야 했는데 첫 번째 기차가 늦어져 전부 못 타게 된 것이다. 역무실은 항의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암스테르담으로 갈 수 있는 표를 받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독일에만 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구나.
여행의 시작과 끝은 정신없었지만, 본의 벚꽃은 정말 아름다웠다. 벚꽃을 마주하자마자 이곳이 왜 이렇게 유명한지 알 수 있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벚꽃은 절정이었다. 여의도가 아닌 본에서 벚꽃을 보고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구경할 곳이 많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본을 여행할 이유는 '벚꽃'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네 번째 독일: 드레스덴
엄마와 동생과 함께 여행 중이었다. 프라하에 숙소를 두고 하루는 체스키, 하루는 독일 드레스덴에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드레스덴을 구경하고 프라하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는 오지 않았고, 버스가 지연된다는 앱 알림이 왔다. 엄마와 동생은 처음 겪는 지연에 당황했지만, 나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여기는 독일이니까.
버스 정류장에 앉아 두 시간 넘게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했다면 버스에서 자느라 노을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게 또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드레스덴은 사실 일정이 너무 바쁠 것 같아서 가지 않으려 했던 곳인데 안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정말 좋았다. 긴 여행으로 지친 상태였고, 유럽에 머무른 지 5개월째라 아름다운 건물과 풍경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드레스덴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거대한 ‘군주의 행렬’ 벽화, 고풍스러운 츠빙거 궁전과 프라우엔 교회가 기억에 남는다.
다음 독일은 어디일까
독일에 갈 때마다 곤란한 일이 생겨서 다시는 독일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쩌다 보니 네 번이나 다녀온 걸 보면 참 신기하다. 싸우면서 정들 듯이 그렇게 독일의 매력에 빠져버린 걸까. 다음엔 독일의 어떤 도시를 여행하게 될지,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타는 기차마다 지연돼도 좋으니 독일을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얼른 다가왔으면 좋겠다.
[채호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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