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발레가 된 아름답지 않고 현실적인 동화 [공연]

국립발레단의 신작, 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
글 입력 2024.05.0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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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국립발레단의 200회 정기공연 <인어공주>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한국 라이선스 초연의 막이 올랐다. 발레 <인어공주>는 레라 아우어바흐의 음악을 바탕으로 존 노이마이어가 안무와 의상을 포함하여 많은 부분을 창작한 작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신데렐라> 같은 유명한 동화를 각색한 다른 발레 작품들에 비해서, 존 노이마이어의 각색은 권선징악이라는 구도 속에서 용서와 사랑의 성취라는 결말을 맞이하고 인간의 선량함과 따뜻함을 믿는 일반적인 동화의 특징 대신 현실적이고 어두운 면에 주목했으며, 낭만보다는 환멸과 냉소에 집중하고 있다. 2막으로 구성된 <인어공주>는 인어공주와 왕자, 왕자의 결혼 상대인 공주, 바다마녀라는 기존 동화의 줄거리를 비슷하게 따라가면서, 시인의 이야기인 1막을 시작하는 프롤로그와, 2막을 끝내며 시인과 인어공주의 성장을 다루는 에필로그를 삽입했다.

 

 


발레로 구현된 현대적이고 새로운 표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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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는 감정 혹은 정동의 ‘분출’과도 같은 표현이 극대화되는 드라마 발레다. 고전 발레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이나 동작, 형식에서 자유로운 드라마 발레는 서사의 흐름과 그 과정 속에서 무용수들의 연기를 통해 한 인간이 낱낱이 까발려질 정도의 깊은 내면 세계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 중점이 된다. 케네스 맥밀란의 <마농>이나 존 크랑코의 <오네긴> 같은 초기 근대 시대를 다룬 유명한 드라마 발레와 달리 현대적인 연출과 복식을 가미하고, 바닷 속 같은 환상적인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드라마 발레 중에서도 특이하다. 미니멀리즘 같은 배경과 모던한 무대 세트, 메타적인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상되기도 한다.


존 노이마이어의 발레 <인어공주>에서 1막의 바다 속의 모습은 통통 튀는 생물들이 가득한 디즈니 식의 ‘바다’가 아니라 묘하게 신비하고 기괴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인어공주를 포함한 바다 생물들의 움직임은 우아하거나 경쾌하다기보다 비대칭과 불균형이 줄 수 있는 위태로운 신비함을 준다. 인어공주와 인어공주의 다섯 언니들의 지느러미를 표현하는 길다란 푸른색 의상은 무용수의 발을 가리며 지느러미처럼 무대 바닥 위에 끌린다. 음악 역시 전통적인 조화의 선율이라기보다 전자 악기 테레민을 사용해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며 인어공주의 심리와 긴장의 서사를 음악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 외에도 대사는 없지만 무용수들의 함성 같은 의성어가 등장하기도 하고, 왕자가 다소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골프를 치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신선한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시인과 인어공주라는 두 자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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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사랑하던 남자 사람 친구인 에드바드가 결혼하고, 가 닿지 않았던 사랑에 시인은 눈물을 흘리며 <인어공주>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인의 눈물은 비유적인 의미로도 연극의 물리적인 장치로서도 인어공주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비극적인 운명을 마주해야 하는 인어공주를 지켜보며 마음 아파한다. 그 이야기를 쓰는 시인은 인어공주가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이 자신이 겪은 것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끝을 다 알고 있지만, 창작의 과정 속에서 모든 고통을 인어공주와 같이 겪는 수밖에 없다. 예술적인 승화는 경험을 되짚는 것에 대한 고통을 수반한다. 에드바드는 왕자를 맡은 발레리노가, 에드바드의 신부 헨리에타는 공주를 맡은 발레리나가 맡을 정도로 인어공주의 신비한 이야기는 곧 시인이 겪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다. 처음 면사포를 연상시키는 투명한 천 속에서 등장한 시인의 모습은 왕자의 결혼식에서 공주의 기나긴 면사포를 써 보는 인어공주의 모습과 닮아 있다. 작가를 아버지로, 작품을 자식에 비유한 고전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미학적 전통 속에서 자신이 만든 캐릭터인 인어공주에 ‘모성애’를 느끼는 듯한 시인의 모습은 전통이 굴절된 탈전형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인어공주는 바다에 떨어진 왕자에게 반해 인간이 되기로 결심하고 바다마녀에 의해 지느러미가 해체되고 지느러미가 있던 자리에는 다리와 발이 된다. 일종의 ‘수술’의 후유증일까,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일까? 인어공주에게 발로 땅을 디디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을 감수했음에도 왕자는 자신이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공주와 사랑에 빠졌고, 인어공주를 발견해 데려오지만 공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단지 ‘희망고문’이 될 뿐이다. 인간 세상에 온 인어공주는 인간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실제 바닷속 세계에서 인어공주가 어떠한 경험을 했고 바다의 속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인어공주는 사람들에게 어리고 철없는 멍청한 아이로 인식된다. 인간 세계에 필요한 ‘언어’를 숙지하지 못했고, 다리를 방금 얻은 탓에 우아하게 걷기는 고사하고 ‘평범하게’ 걷는 것조차 불가능한 인어는 1막 후반부에 사람이 된 상태로 왕자에게 발견되어 배 위에 태워진 이후 휠체어에 앉히거나*, 소년 선원의 옷이 주어지기도 한다. 2막의 인어공주가 귀족 소녀들과 같은 옷을 입고 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신부 들러리로 결혼식에 참여한 인어공주가 자꾸 튀는 행동을 하자 같은 들러리들이 그를 단속하기도 한다. 희고 좁은 방 같이 생긴 무대 세트 안에서 인어공주가 손으로 벽을 두드리는 장면은 그러한 귀족 여성으로 동화되는 것이 인어공주에게 주는 압박감과 왕자의 사랑을 얻고 싶지만 불가능한 절박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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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순수한 인어공주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말 자신과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 단지 어린아이로 인식한다. 자신을 향해 관심을 보이는 인어공주를 귀여워하지만, 자신을 욕망할 것이라는 상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이러한 인어공주를 어리게 인식하는 인간 세계의 시간성은 왕자의 결혼 상대인 공주마저 왕자 앞에 계속 나타는 인어공주를 라이벌로도 인식하지 않게 한다. 또한 왕자를 죽여야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게 되는 인어공주가 칼을 들고 있어도 왕자는 인어공주를 위협적으로 인식하지 않은 채 칼을 가지고 죽은 척 장난을 치며 절규하는 인어공주를 놀래키기도 한다. 인어공주의 자신을 향한 관심을 어린 친척동생 대하듯 장난을 치고 귀여워하는 모습으로 답하는 왕자의 모습은 프롤로그의 시인이 결혼을 하는 친구 에드바드를 붙잡지만, 에드바드가 시인의 사랑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친구를 대하듯 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인식되지 못하는 사랑의 슬픔, 고백조차 못하고 끝나버린 사랑의 비참함을 통해 시인과 시인의 눈물로 시작된 캐릭터인 인어공주는 연결된다.

 

존 노이마이어의 발레 <인어공주>가 퀴어 서사로 읽히는 이유는 단지 바이섹슈얼이었던 원작자 안데르센을 모티브로 한 시인 캐릭터가 짝사랑하던 남성이 결혼한 후 느끼는 비참함과 슬픔을 통해 ‘인어공주’라는 캐릭터를 탄생시켰다는 것, 즉 인어공주를 만든 시인의 정체성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이를 퀴어 서사로 독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인어가 ‘바다’라는 공간에서 ‘땅’으로 이행(‘trans’)하면서 고통을 감수한 채 지느러미를 포기하고 인간의 다리를 택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경계 넘기를 시도하며, 온전한 인간도 온전한 인어도 되지 못하는 변신 후의 인어공주가 바다와 땅 모두의 규범과 불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두가지의 이유, 시인의 정체성과 시인이 만든 이야기는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서로가 서로의 연장선상에 있다. 신체 변형, 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고통의 서사는 직접적으로 트랜스젠더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특정한 신체를 자연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류 사회에 대한 동화로 귀결되는 퀴어 담론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사실 인어에서 인간으로의 이행, 그리고 그 전환과 이행이 주는 ‘덜컹거림’의 순간들에 주목하는 것은 안데르센의 원작 동화 <인어공주>가 퀴어 비평 측면에서 많이 해석되어 온 방식이기도 하다. 성소수자이기도 한 안무가인 존 노이마이어는 어쩌면 안데르센에게 시대를 뛰어 넘는 퀴어로서의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해피 엔딩이 아니기 때문에 더 희망적인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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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부분은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사랑과 인간 세계에서의 적응 모두 실패한 인어공주는 왕자를 죽이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다시 인어로, 바다로 돌아가는 것 모두 실패했다. 옷과 토슈즈를 벗어던지고 오열하며 절망 속에 빠진 인어공주를 시인이 다시 살려낸다. 인어공주와 시인은 같은 움직임을 하고 이는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설명된다. (맥락은 아주 많이 다르지만) 국립발레단의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의 <백조의 호수> 속 지그프리드 왕자와 로드바르트가 ‘쉐도우 안무’를 통해 한 존재의 두 자아라는 면이 부각되었듯, 인어공주와 시인이 서로의 그림자라는 것은 비슷하게 사실 두 캐릭터가 한 존재임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라는 것은 원본과 그림자의 위계성, 즉 창작물이 창작자에게 예속되는 관계 대신 서로가 서로를 보충할 수 있는 대안적인 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는 동화를 아름답고 낭만적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다만 그 감정을 가공하지 않는 표현 방식과 원작을 따르는 결말에 있어서 동화를 차가운 현실의 렌즈로 해석함으로써 오히려 살아갈 힘을 주었다. 인어공주가 거품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초월적인 존재인 정령이 되어 영원해지는 안데르센의 원작을 살펴보면, 캐릭터인 인어공주와 창조자인 시인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상처를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 상처를 마주하고 계속 살아가기를 다짐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해피엔딩보다 더 희망적인 결말이다.


* 휠체어라는 소재는 이 작품이 장애 서사, 규범적 시간성과 대비되는 장애의 시간성으로 읽을 가능성을 직설적으로 제시하는 하나의 장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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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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