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위대한 역사인가, 잔인한 범죄인가 - 과학 잔혹사

과학자들은 언제 어떻게 인간성을 망각하는가
글 입력 2024.05.1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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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스릴러 영화를 보거나 누군가의 실제 비극을 재연한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가끔은 재미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찝찝할 때가 있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몰두한다는 건 분명 그만큼 그 콘텐츠가 잘 만들어졌다는 방증이겠지만, 그게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 실제 겪었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특히 사건이 비극적일수록 더욱더, 타인의 불행을 나의 재미로 소비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회의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낯설지 않은 감정을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느꼈다. 마치 잔혹동화의 표지와 제목을 연상시키는 듯, 어쩌면 나란히 놓이기에는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한 ‘과학’과 ‘잔혹사’라는 익숙지 않은 두 단어의 조화가 평소 잘 즐기지 않던 과학 분야 서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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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생인 내게 이공계열 서적은 어쩔 수 없는 뇌의 피로를 선사하곤 한다. 배경지식이 한참 부족하기에 쏟아지는 정보량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 보니 해당 서적을 읽는 행위는 취미 생활이나 스트레스 해소용 독서라기보다는 지식과 교양 축적을 위한 의식적 활동에 가깝게 된다. 하지만 시작부터 굉장한 구미를 자아내던 <과학 잔혹사>라는 제목의 책은 꽤나 공격적인 두께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마치 범죄 소설을 읽는 마냥 비문학 서적이라는 장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몰입감을 선사했다. 

 

수업의 핵심 내용보다는 시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교수님의 농담이나, 지적 탐구와는 거리가 먼 비화와 야담이 훨씬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되는 것처럼, ‘윌리엄 댐피어’의 항해 일화에 영감을 받아 <로빈슨 크루소>와 <걸리버 여행기>가 창작되었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모델이 해부학자 ‘존 헌터’였다는 과학 역사의 여담에 도파민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념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는 순간 과연 이 이야기들을 단순히 재미나 흥미의 대상으로 소비해도 죄는가 하는 윤리적 각성을 했다. 

 

세상을 향한 인식의 확장을 일으킨 모험과 발견, 의학 기술을 대단히 발전시키고 신체 작동과 기능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킨 해부학의 역사, 인류 문명을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시킨 ‘전기’ 발명의 혁명적인 역사 등은, 그 과정에서의 추악한 범죄나 끔찍한 희생이 그저 가상의 이야기에만 불과하다면 흥미로운 소재나 재미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가짜보다 훨씬 잔인한 실제 역사라고 인식하는 순간 절대 웃음으로 소비할 수는 없게 된다.

 

훌륭한 과학자의 업적이 세상을 바꾸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 덕에 당장 오늘의 내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편의와 혜택을 누리고 산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식수준과 접근성이 발달한 시대에 사는 내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발명과 발견을, 한계와 제약이 넘쳐나는 시대에 일궈낸 그들의 노력이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또 그만큼 쉽게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단하고 장엄한 결과 뒤에 숨어 있는 추악하고 끔찍한 과정을 알게 된 지금, 그들을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을 느낀다. 

 

위대한 과학자이기 이전에 결국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그들이기에, 시대 앞에 놓인 현실적인 장벽이나 그런 그들에게 주어진 유혹의 손길을 상상한다면 그 심정을 전혀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 입장이었을 때, 나 역시 그러지 않았으리라고는 쉽게 장담할 수 없을 법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기도 한다. 타협과 편법의 결과는 결국 참담한 실질적인 희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좀 더 빠르고 쉽게 알기 위한 욕심이 노예제도를 발전시켰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린다는 명분에 묵인한 시신 도굴이 연쇄 살인을 파생시켰으며, 전기라는 위대한 과학 업적의 그늘에는 무고한 생명의 죽음이 놓여있었다. 중요한 건 이 인류사의 지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은 생명을 결코 되살리 수는 없으며, 희생자가 그 발전의 혜택을 누릴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혜의 숫자가 희생의 수보다 훨씬 많이 축적되겠지만, 그 수혜의 양이 희생의 양을 추월할 수 없는 것은 하나의 존엄한 생명의 가치는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들을 되살릴 수 없는 한 우리는 그 희생의 값을 치를 수가 없다. 위대한 과학 및 의학적 성취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모든 인류와, 그 토대 하에 끊임없이 발전 중인 문명은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고, 결과론은 과정을 책임질 수 없는 법이다.


 

“자신의 인간성을 버리는 대가로 ...... 무엇을 배우는 사람은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지식을 얻는 셈이다.” - 새뮤얼 존슨 

 

171p.

 

 

실체를 지닌 과학 앞에서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도덕이나 윤리는 쉽게 힘을 잃곤 한다. 특히 기술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하는 시대는 때론 인문사회학적 가치를 촌스럽게 느끼게도 만든다. 

 

하지만 과학의 진보가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시대에 고리타분한 도덕적 잣대를 꿋꿋이 요구하는 것은, 과학의 합리성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적인 과학자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가끔 고지식할 정도로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을 조롱하곤 한다. 조금만 양심을 내려놓으면 쉽고 편안한 길이 있는데도 우직하게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그런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 일에 혼자 괜한 힘을 뺀다며 속으로 무시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원리와 원칙의 힘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느끼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원리원칙이 무너질 때 세상은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법이고, 그 단순 명쾌한 원리원칙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마치 과학의 역사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존경해야 하는 것은 한 과학자의 위대한 업적뿐만 아니라, 그 또는 그녀의 훌륭한 인간성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은 훌륭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훌륭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원칙으로 하는 공리주의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타당한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하라”는 칸트의 복잡한 정언명령 등에 비하면 훨씬 명쾌하고 편리하다. 다수결을 판단과 결정의 기준으로 삼는 현대사회에서는 특히 이러한 공리주의 원칙이 대체로 유용하고 꽤 합리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리주의는 내게 찝찝한 기분을 웃돌게 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과학 잔혹사>를 읽고 나서 오래전 공리주의를 배울 때 내 찝찝함의 근원을 일깨워준 ‘트롤리 딜레마’가 다시 떠올랐다. 철도의 방향을 바꾼다면 분명 더 많은 희생을 방지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아무리 슬픔의 양을 줄인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희생된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은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 한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어쩌면 과학 발전의 역사는 이러한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당장 우리는 해부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의술의 힘에 기대 역사상 가장 긴 수명을 얻게 되었고, 전기 없이는 단 1분도 견디기 힘들 만큼 기술에 종속돼 살아간다, 그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수반했는지에 상관없이. 그렇기에 우리가 이렇게 과학 및 의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한, 심각한 악행을 저지르는 과학자는 우리 사회에서 완벽한 악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범죄를 저지른 많은 과학자들이 처음부터 악인이었던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과학과 의학 기술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실수를 범하기도 하며, 작은 비행이 무뎌져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기도 했을 테다. 

 

그리고 때로는 완벽히 선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발명이 과학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용되기도 하고, 그 발전 과정에서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실수와 피해를 낳기도 한다. 그건 과학자의 인간성과는 별개의 일이며, 모든 폐해를 예측할 수는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다. 그러니 우리는 과학이 지니는 수많은 딜레마들 속에서 어떤 과학자가 영웅인지 범죄자인지 쉽게 속단할 수는 없다.

 

다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나 당연한 도리는 있기 마련이다. 에디슨의 전류 전쟁은 인류로 하여금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형 집행 과정을 겪게 했다. 비록 그 사형수는 사람을 죽인 악인이었고 그로 인해 이미 죽을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다른 사형수들에 비해 더 잔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형법상의 원칙을 위반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교류의 위험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에디슨의 광기 어린 집착은 개 44마리, 송아지 6마리, 말 2마리의 죽음을 희생을 종용했다. 물론 이 동물들은 사형수와는 달리 인류 사회에 해악을 끼치거나 하다못해 실수로 인간을 죽인 적도 없는 무고한 생명이었다. 그렇기에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영웅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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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수혜를 입어 세상은 점점 더 진보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어떤 희생도 뒤따르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역사가 늘 그랬듯 누군가는 업적을 위해 비행을 저지를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한들 기술이 예견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더 엄격한 체계로 감시하고 더 까다로운 기준으로 예방하는,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귀찮고 고지식한, 전혀 세련되지 않은 방법뿐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과거의 비행 일지라도, 그 수혜를 누리고 사는 한 우리는 인류의 과거를 반성해야 하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미 지나친 과학의 잔혹한 역사를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이며, 이 책이 담고 있는 가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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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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