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을 뜨면 죽는 세상 - 버드 박스 [영화]

보이지 않기에 무엇이든 볼 수 있다
글 입력 2024.02.0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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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드 박스>는 인류의 종말 속에서의 처절한 생존, 희망, 그리고 가족애를 다루고 있는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2018년에 개봉한 스릴러 영화이다. 이 영화는 조쉬 말러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감독은 수잔 비어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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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드 박스> 원작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갑자기 인류를 위협하는 괴현상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만약 눈을 떠서 괴현상에 노출된 사람들은 자살을 하거나 극도의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환경 속에서 주인공 맬로리는 자신과 두 아이들 '보이'와 '걸'을 데리고 괴현상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장소로 가기 위한 여정을 담은 영화이다.

 

 

 

원인불명의 괴현상에 대한 답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 <버드 박스>를 보고 난 후 제기하는 의문점은 '과연 괴현상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일까?'이다.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인류의 종말을 가져온 괴현상의 비밀이 풀릴 줄 알았지만 영화는 주인공과 그녀의 자녀들이 시각장애인 학교에 가까스로 도착하면서 끝나버린다.


버드 박스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는 사람들은 바로 괴현상의 원인에 대한 설명 없이 맺어져 버린 결말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실존주의 작가로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중 하나인 <변신>이 떠올랐다.


프란츠 카프카는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끊임없이 추구한 실존주의 소설가이다. 무력한 인물들과 그들에게 닥치는 기이한 사건들을 통해 20세기에 만연한 불안과 인간소외를 폭넓게 다루는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무력한 인물에게 기이한 사건이 닥치는 것은 바로 소설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이다. 그레고리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버리는 기이한 사건을 겪게 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도대체 왜 그레고리가 벌레로 변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 버드 박스도 갑자기 원인을 모른 채 발생된 괴현상에 의해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괴현상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고 등장인물들의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괴현상으로 종말을 맞은 세상 속에서 생존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만이 보일 뿐이다.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들도 한순간의 소행성 충돌로 멸종을 해버렸다. 버드 박스 속 인류를 보면 한 순간에 아무 이유 없이 사라져 버린 공룡들을 보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원인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운명이란 바람에 한 없이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영원히 두 눈을 가리고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과 비정상, 장애인에 대한 관점


 

버드 박스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바로 최후의 인간 공동체가 이루어진 곳이 시각장애인학교였다는 점이다. 인류가 종말을 맞이했을 때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각장애인들이 역설적이게도 살아남아 인류 최후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 기준은 무엇일까? 만약 명확한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은 누가, 아니면 어떤 집단이 만든 것일까? 그리고 기준은 과연 정당하게 만들어진 것일까?


버드 박스를 보면 가까스로 살아남은 인물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모든 유리창을 덮고 외출을 할 때 시야를 차단하는 것이다. 즉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시각'을 포기해야 하지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 뜻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시각'이 없는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생존에 유리한 무기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평소의 사회였다면 사회적인 약자로 '강제로' 분류당했을 시각장애인들이 버드 박스 안에 묘사된 인류의 종말 앞에서는 가장 높은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는 집단이 된 것이다.


환경에 따라 인간은 변하고 환경에 적응을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이 된다. 즉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는 뜻이다.

 

 

 

새가 담긴 박스


 

과거의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들고 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간보다 예민한 카나리아가 가스오염의 지표로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거나 쓰러지기 시작하면 광부들은 재빨리 대피를 했다고 한다. 가스에 매우 취약한 카나리아는 인간이 느낄 수 없는 소량의 가스에도 반응을 하기 때문에 광부들이 보다 안전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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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와 카나리아

 

 

버드 박스에서의 새들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본다. 정체불명의 어떤 것이 나타날 때의 새들의 행동을 통해 주인공은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다. 새들이 강하게 짖어 될수록 영화의 긴장감을 높여주는 효과도 톡톡히 보여주었다.


앞을 볼 수 없는 주인공에게 미지의 장소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찬 동굴 속을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동굴 속을 어느 정도 믿고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횃불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새장 속 새들이라 할 수 있다. 마치 광부들이 카나리아를 들고 깊은 탄광으로 내려가듯이 말이다.

 

 

 

모성애, 가족이란?


 

버드 박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아본다면 바로 주인공이 '보이'와 '걸'사이에서 급류의 위치를 확인할 사람을 고르는 장면이다. 급류의 위치를 확인한다는 건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즉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행위이다. 이 같은 끔찍한 결정으로 갈등을 하던 주인공이 결국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는 선택을 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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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걸'은 주인공의 친딸이 아니다. '걸'은 같이 살아남았던 여자 동료의 아이이다. 어떻게 보면 '보이'와 '걸'중에서 만약 선택을 했다면 '걸'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초반에 출산과 가족을 이룬다는 것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모습과는 달리 '보이'와 '걸'중 아무도 선택하지 않고 지키려고 하는 강한 모성애를 보여준다. 


여기서 또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인 <변신>이 떠올랐다. 앞서 말했듯이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리가 벌레로 변해버리자 가족들은 결국 그레고리를 죽게 만든다. 그레고리가 벌레가 됨으로 한 집안의 장남이자 경제적 가장이 한순간에 집안의 골칫덩어리가 된 것이다. 오히려 그레고리가 죽게 되자 가족들은 슬퍼하기보다는 후련해한다.


소설 <변신>은 이처럼 가족이라는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뭇 불편한 시선을 내비친다. 가족에 관한 냉혹한 진실을 품고 있는 소설 <변신>은 가장 순수하다고 볼 수 있는 가족 간의 사랑조차 경제적인 관계를 토대로 하고 있다고 봤다.


이러한 <변신>의 관점에서 주인공을 본다면 더욱이 주인공의 위대한 모성애가 빛을 발한다. 자신의 혈연관계조차 아닌 '걸'까지 자신의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와 엄마이기에 가질 수 있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뜻


 

다들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건이다. 잠을 자던 중 정체불명의 소리에 공포에 떨었던 경험 말이다. 설령 그 소리의 정체가 바람에 의해 부딪히는 블라인드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떠한 것들도 머릿속으로 볼 수 있다.


버드 박스에서 가려진 시야로 인해 주는 공포감은 상당하다. 모든 유리가 까맣게 칠해진 자동차를 타고 가다 마주치는 공포와 헝겊으로 시야를 차단한 상태로 이동을 할 때 소리로 전해지는 공포는 시각적인 공포와는 다른 느낌의 공포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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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주는 공포감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은 직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벽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가 없다. 벽 뒤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벽 뒤에서 나는 소리와 머릿속의 상상에 의존해서 볼 수밖에 없다. 


시각을 배제한다는 것은 편견 또한 배제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다른 감각들을 더욱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들은 꿈을 꿀 때 시각적인 감각보다 다른 감각을 더 많이 사용하는 꿈을 꾼다고 한다. 후천적인 시각장애인이어도 마찬가지라 한다. 즉 시각 장애인들은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지만 반대로 그 이외의 감각들을 통해 좀 더 다양하게 세상을 본다고 할 수가 있다.

 

 

 

색이 다른 영화


 

버드 박스는 오랜만에 본 '색이 다른' 영화였다. 영화 요소 중 일부분이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덮을 정도로 많은 의미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지 못했을 때의 공포를 알기가 어렵다. 또한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두 눈을 가려서 앞은 보지 못하지만 가려진 헝겊 뒤로 보이는 희망을 보며 살아남은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에게서 따뜻하고 여운이 남는 감동을 '보게 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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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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