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가 누구보고 가엽대 - 가여운 것들 [영화]

삶이라는 레이어, 그 위를 겉도는 판타지성
글 입력 2024.04.0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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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닮은 바다 위로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뛰어든다. 삶에 비관한 그녀의 끝은 영화의 시작이 되고, 한 여성의 죽음을 통해 한 여성이 다시 태어난다.


‘천재적이지만 특이한 과학자 갓윈 백스터에 의해 뱃속 태아의 뇌를 이식받아 새롭게 되살아난 벨라 백스터. 벨라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떠난다.’


짧다면 짧을 이 두 문장.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가여운 것들>을 소개하는 문장이다. 이 파격적인 문장 중, 어느 부분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니, 결국 이 두 문장이 이어져야 설명할 수 있는 영화로구나. 판단했다. 나 자신의 어머니이자 아이인 주인공, 그리고 그녀가 겪어 내는 삶과 성장의 이야기. 예측할 수 없는 벨라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종국엔 이토록 완벽한 성장 서사가 있을까. 하는 감탄과 동시에 공허함이 남는다. 총천연색인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허함, 왜인지 그 공허함이 마음속에 남았다.


‘그래서 영화는 어땠어, 좋았어?’


영화를 보고 난 뒤, 상영관을 나오며 휴대폰 팝업에 뜬 친구의 문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수 분간 고민했다. 결국 ‘좋았던 부분도 있었어.’ 라는 애매한 답신을 남기곤 답답함을 느꼈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러니 어디에서 경탄을 느끼고, 어디에서 공허함을 느꼈는지, 그래서 결국 이 영화가 나에게 어떤 감각을 남기고 떠났는지를 명확히 정립하지 못한 채 글을 쓰게 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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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백스터가 캐릭터적으로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단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에겐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주저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다. 겁이 없는 그녀에겐 모험을 시작하기 전 으레 겪는 주저함이 없고, 모험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영혼의 부서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유아기의 상황, 부재할 수밖에 없는 자아 덕분일까. 두려움이 없는 그녀의 모든 행위는 사회 안에 속한 타인들의 호기심과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큼 자유롭다. 벨라의 이러한 매혹적인 캐릭터성은 타인으로 하여금 그녀를 체제에 굴복시키고, 규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진정 몰두하는 것은, 감각이다. 자아가 본격적으로 생성되기 이전, 감각에만 몰두하게 되는 지점에서의 벨라는 과거와 미래, 혹은 세상과 연결되지 않은 채 매 순간만을 살아낸다. 하지만 감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가. 오로지 감각으로 시작된 그녀의 성장담은 세계와 만나지 못하고 그녀 안에서만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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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도 세상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모험은 아니지만, 벨라는 덩컨 웨더번과의 유람선 여행을 통해 지성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통해 언어와 세상을 배우게 된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방문을 통해 경험한 벨라의 죄책감(혹은, 연민)이다. 이제껏 평생을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속해 살았던 벨라는 상류사회의 예법이나 질서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며 자유롭게 행위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에게 있어 지위 혹은 배경이란,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마주한 세상의 잔혹함은 벨라 본인이 가진 것들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그를 통해 벨라가 자선 행위를 하게 만들지만 결국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 지점에서 벨라가 느낀 죄책감은 세상 안에서의 벨라와 타인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자아 성장의 경험 중 하나가 된다. 이 경험을 통해 벨라는 뱃삯을 내지 못하게 되어 유람선에서 쫓겨나게 되어, 빈털터리 신분으로 전락해 매음굴에 들어가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이 부분에 <가여운 것들>의 경탄이 있다. 벨라의 하느님이자 아버지인 갓윈 백스터는 삶에 비관한 여인인 빅토리아를 벨라로 재탄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빅토리아, 혹은 벨라의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할 것이, 생의 시작은 누군가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뿐더러, 우리 중 그 누구도 나의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은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 빅토리아 또한 자신의 의지로 생을 마감하기 위한 주체적인 선택을 했으나, 결국 그 선택마저 갓윈 백스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생의 시작과 끝, 그 사이의 과정들은 모두 벨라의 선택으로 정해진다. 상류사회에 속하는 벨라의 신분은 벨라의 선택에 의해 수직 하강한다. 자유의지의 빛나는 승리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그래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진 힘에 대해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계기가 영화 안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나의 모체이자 태아로, 나의 자아를 성장시키며 동시에 보살피는, 그 자기 안의 분투가 경탄을 자아낸다. 피조물이었던 괴물(혹은 아이)이 자아와 내면세계를 갖춘 인격체가 되는 과정, 그 과정에 존재하는 벨라의 ‘완벽함’이 경탄을 자아낸다.

 

또한, 빅토리아(모체)의 신체에 깃든 벨라(태아)의 영혼의 설정은 내가 나를 살리는, 일종의 구원서사라고 볼 수도 있다. 자아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장의 요소들이 피양육자와 양육자의 동질화와 결합되어 벨라 안에서 진행되는 '자기 안의 분투'는 심화된다. 내가 나의 양육자이면서 피양육자라는 것은, 세상과의 연결을 통한 성장을 전제로 하는 성장담에 있어서 조금은 위험한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벨라는 결국 시대의 체제와 권력이 억압하던 본인의 위치를 자기화하고, 자유의지에 의거한 주체성을 기반으로 '스스로' 삶을 살아내었다는 점에서 완벽한 성장담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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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여운 것들>엔 이러한 ‘완벽함’이 주는 공허함 또한 존재한다. <가여운 것들>의 성장담에는 좌절이 없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를 생각해보자. 은희는 영화의 시간 안에서 수없이 부서지고, 깨어진다. 그렇게 부서진 파편들이 모여 삶을 만들고, 은희라는 한 인격체를 만든다. 성장 앞에서 무력해지고, 좌절하고, 그래서 단단해지는. 그 일련의 고통의 과정이 여기엔 없다.


벨라는 주체적이고, 당당하며, 시련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직 ‘인간’ 같지가 않다. 인격을 가진 개체인 것 같긴 하나, 그토록 완벽한 인간을 인간으로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너무나 완벽한 그녀의 '캐릭터성 ' 때문일까. 그렇기에 나에게 <가여운 것들>은 판타지 영화 같기도 하다. 단지 영화가 두른 화려한 잔혹동화의 외피만을 이유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뭐랄까, 삶이라는 레이어 위를 겉도는 하나의 막 같다고나 할까. 둘은 비슷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지만 결코 만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감상은 그렇다. <가여운 것들>은 삶과 맞닿지 못한다. 그렇기에 공허함이 남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들었던 첫 번째 감상은, ‘이토록 완벽한 성장서사가 있을까.’ 였다. 완벽하기 때문에 감동은 없는, 완벽하기 때문에 나와는 조금 다른. 삶은 주체성 싸움이라는 어디선가 본 문장이 생각났다. 삶이라는 끊임없는 주체성 싸움에서 벨라는 승리했다. 그래서 성장했다. 하지만.... 점에 숨겨진 모호한 공허함이 자꾸 감상의 뒷맛을 찝찝하게 만드는 것은 나뿐일까. 벨라가 전혀 가엽지 않았다. 벨라는 주체성 싸움에서 성공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대체 누가 누구를 가여워 하는 건지, 마치 누군가 거리감을 두고 벨라를 판단하는 듯한 제목에 의문이 들었다.

 

 

[차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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