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른이를 위한 동화 -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

우리에게도 마나롤라가 있다면
글 입력 2024.02.0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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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심사'와 '공감대'이다. 유대감을 형성하고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꼭 필요하다. 자연스러움이랄까, 그런 것들이 내겐 오히려 더 이질적이다. 자연스럽기를 바라지만 실은 그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던 환경에 새로이 끼워 넣게 되는 '요소'에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그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우리라고 솔직한 심정으론 말할 수가 없다. 낯선 요소에 비슷한 점조차 없다면 동화될 수가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그런 내게 있어 신기할 수밖에 없는 특징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꼽자면 아래의 세 가지다.


첫째, 한 번 정해진 관계의 뒤바뀜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둘째, 멀어져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점.

셋째, 접점이 없는-또는 아예 다른- 사람끼리도 한 차원 더 아래의 깊은 공감을 나눌 수 있다는 점.


감상을 털어놓자면 어쩔 수 없이 뮤지컬의 줄거리를 글 안에 노출할 수밖에 없다. 이 아래로는 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다.

 

 

너를위한글자_포스터.jpg

 


 

세이프 존에서 벗어나다.



투리는 발명가고 캐롤리나는 글을 쓴다. 투리는 발명에 집중하는 동안, 주위에 폐쇄적으로 생활하는 성향이 드러나 소음에 예민하다. 위층이나 아래층도 아닌, 옆집에서 빗자루질하는 소리가 거슬려 주의를 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캐롤리나는 조금 수다스럽다. 사람을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다. 그러니까, 투리와 캐롤리나는 서로가 이웃일 때 가장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이웃 간의 불화만 보아도 이해가 가능하다. 서로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른 두 집이 한 번 갈등을 빚은 후 갑자기 서로를 배려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가 없다. 각자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영역과 삶의 규칙들을 지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을 때 가장 안정적일 수 있기에.


그들의 관계가 그저 '오래전의 친구', 또는 '불편한 이웃'으로 남았다고 한다면 극의 이야기가 더 진전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투리는 이사를 가버렸을 수도 있고, 캐롤리나는 우울증에 걸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속에서 '사랑'이라든가, '우정'과 같이 뜨끈한 감정이 싹터 갑자기 '이해'라는 것이 성사될 수 있다는 흐름이 더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런데 그렇게 된다. 투리와 캐롤리나는 사랑에 빠지고 결국 서로의 미래를 응원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재미있는 부분은 '투리'와 '도미니코'의 관계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도미니코는 학창 시절부터 캐롤리나를 짝사랑해 온 그녀의 소꿉친구다. 그리고 투리는 캐롤리나를 그리 탐탁지만은 않아 했던 사람이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만큼 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둘은 극의 거의 마지막에 다다를 때까지도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손을 잡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게 된다.

 

 

 

수많은 변수 사이에서



다소 단편적으로 설명했지만, 투리와 캐롤리나, 그리고 도미니코가 고향인 마나롤라에서 만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타자기'를 발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마치 '환상'같았다. 어린 시절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이 상황에 의해 멀어지고, 나중에 우연히 만나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환상이었는데, 그 상태에서 또 다른 형태의 관계로 발전한다는 것은 더 말이 안 되었다. 멀어진 만큼 달라졌고, 달라진 만큼 이해하기 힘들 텐데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 궁금해졌다.


생각하다 보니,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투리는 폐쇄적인 성향 탓에 주변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일에 집중할 줄 알았고, 캐롤리나는 밝고 수다스러웠지만 글 쓰는 사람답게 관찰력이 좋았다. 어렸을 당시엔 친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서도 서로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다. 멀어졌음에도 남아 있었던 '기억'. 그것은 그들의 관계 속 변수다.


또한, 투리와 캐롤리나, 도미니코가 어릴 적 그대로가 아니라는 점도 이들의 관계에 있어 변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언가를 잃기도 했으며, 원하던 목표를 성취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숱한 노력과 실패, 그리고 어쩌면 상실에 대한 기억까지도 그들에게 있어 공감대로 작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사는 방식도, 모습도 다 다르지만 성장의 과정은 어느 인간에게나 다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이뤄지고 달라지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류의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다. 이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지기에 세상은 너무 넓고, 무궁무진하고, 삭막하다. 그래서 '너를 위한 글자'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라는 걸 알고 나면 놀라우면서도 괜스레 위로를 받게 되기도 한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까지 무미건조하진 않구나, 싶어서 말이다.


세상살이에 지쳤다면, 각박한 도시생활이 지겹다면 한 번쯤 '너를 위한 글자'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와하하 웃기도 하고, 찔끔 눈물을 흘려 보기도 하고, 감탄해 보기도 하면서 극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생각보다 더 큰 위로를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어렸을 때 동화를 보며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을 때처럼.

 

 

[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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