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2001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노트르담 드 파리>, <십계>와 함께 프랑스 3대 뮤지컬로 손꼽힌다. 프랑스 대중과 평단 모두의 호평을 받았던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프랑스에서 창작뮤지컬 대중화에 기폭제 역할을 했으며, 전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되며 프랑스 뮤지컬의 인지도를 높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음악은 ‘프랑스어권 최고의 작곡가’로 불렸던 제라르 프레스귀르빅이 작곡했다. 뮤지컬 속 넘버 ‘사랑한다는 것 (Aimer)’과 ‘세상의 왕들 (Les Rois du Monde)’은 상연 전 선공개되었는데 2001년 프랑스 음악 차트 1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매년 극장에 프랑스어로 매진이라는 뜻인 ‘콩플레 (Complet)’가 가장 오랫동안 붙어 있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프랑스 뮤지컬은 정적이다’라는 편견을 깬 뮤지컬로도 유명하다. 기존 프랑스 뮤지컬은 노래를 하는 가수와 춤을 추는 무용수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했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노래 부르는 주인공도 춤을 추고 무용수 또한 코러스에 참여하며 춤과 노래의 경계를 허물었다. 안무가 레다는 록, 발라드, 프렌치 샹송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과 발맞추어 현대 무용과 아크로바틱을 활용했고 그 결과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무대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는 2009년에 라이선스 공연으로 초연이 올려졌다. 그리고 올해 3월 24일부터 5월 31일까지, 서울에서 또 한 번 <로미오와 줄리엣>의 막이 오른다. 프랑스 제작진의 감수 아래 만들어진 이 라이선스 공연은 원곡의 섬세한 한국어 번역과 배우 및 앙상블의 뛰어난 연기,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더 발전한 무대 메커니즘을 선보인다.

2. 익히 아는 이야기
뮤지컬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조사하며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셰익스피어 이전에 아서 브룩이 쓴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화’가 있었다. 그리고 아서 브룩 전에도 이탈리아에 ‘로메오와 줄리에타’ 이야기가 있었다. 이 글에서 이미 베로나를 배경으로 반목하는 두 가문의 이름이 캐플릿과 몬테규라는 것도 나타나 있다. 뿐인가, 이 이야기들의 원형을 따지자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 수록된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 적대적인 집안의 아들과 딸이 사랑에 빠졌다가 사랑의 도주를 약속하지만 엇갈림으로 인해 미래가 좌절되고 차례로 자살하는 이야기이다. 이 슬픈 사랑 이야기의 계보에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유독 유명한 이유는 빼어난 운문체의 대사와 아이코닉한 발코니 장면 덕분이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 미술에서도 발코니를 빼놓을 수 없다. 베로나 전경을 나타낼 때면 세 개의 구조물이 무대 뒤편을 꽉 채웠다. 그러다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밤이 되면 하나만 남아 줄리엣의 발코니가 되었다. 배경은 총총 빛나는 별들로 채워져 발코니 장면의 낭만을 더했다. 관객들은 두 사람이 사랑에 점점 더 빠져들어가는 그 밤의 공기를 함께 마셨다. 사다리를 타고 발코니로 올라가는 로미오의 모습과 마음이 통하자마자 결혼을 약속하는 젊은 연인의 충동 혹은 결의를 보았다.
익히 아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인물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며 감정을 키워가고 충돌하거나 마침내 화합하는 것을 보는 일은 또 다른 얘기다. 두 가문의 지독한 반목은 빨강(캐플릿)과 파랑(몬테규)이라는 보색 대비로 시각화되어 더욱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두 가문의 사람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장면에서는 아크로바틱이 섞인 강렬한 안무가 이어졌다. 그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두 연인의 눈빛은 얼마나 절박하고 곧은가. 뮤지컬은 우리가 아는 줄거리를 큰 변화 없이 따라갔지만 ‘익히 아는 이야기’라 해도 죽은 로미오를 본 줄리엣의 절규는 명치 께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아프고 괴로웠다.

3.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전략
극중에서 줄리엣은 거리를 걷던 시인을 발견하고 자신과 로미오의 얘기를 기록해달라고 부탁한다. 현실에서도 많은 시인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를 세대를 거쳐 변주하며 계속 세상에 노래되도록 만들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 장면은 이야기 밖 독자, 관객들의 현실과 이어지는 장면 같았다. 제 4의 벽을 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중요한 것은 현실의 시인들이 이미 알려진 이야기의 생명력을 어떻게 연장하는가이다. 가령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에 당대 이탈리아 문화라는 옷을 입혀 이탈리아 독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하거나, 전과 달리 운문체 대사를 써서 말맛과 문학적 가치를 높이는 방법 등이 있겠다. 발코니 장면을 넣어 이야기에 새로운 ‘대표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재능 또한 시인의 무기이다. 그렇다면 2001년에서 2026년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큰 사랑을 받은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인은 어떠한 전략을 취했을까?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조연들의 성격과 심리 묘사에 몇 번의 손길을 더해 조연들의 비중을 키웠다. 대표적인 예가 레이디 캐플릿과 레이디 몬테규이다. 그들은 가문을 대표해 가문 사이의 오랜, 그러나 여전히 펄떡이며 살아 있는 증오를 노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개성적인 성격도 소설에 비해 강화되어 각 가문의 과거사에 얼마나 큰 앙금이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본래 셰익스피어의 소설에서 줄리엣의 사랑을 돕는 유모는 뮤지컬에서 줄리엣에게 시대의 한계를 알리는 수동적인 반대자 역할로 각색되었다. 유모는 줄리엣을 진심으로 아끼지만 그녀가 로미오에게 품은 사랑 앞에서는 재차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극중 각 가문의 가주 세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게 가문 사이의 갈등은 이미 피와 뼈에 새겨진 절대적인 것이다. 그들은 이제 오랜 반목에 의구심이 들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 아래 젊은 세대는 답답함을 느끼며 내적으로, 외적으로 방황한다. 캐플릿의 차기 당주인 티볼트는 가문이 지시하는 삶에 지쳐 있지만 으레 그래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몬테규에 대한 분노를 학습한다. 자유로운 한량처럼 보이는 머큐시오는 사실 두 가문 사이의 거대한 분노를 잠시 잊으려 춤과 노래로 도피할 뿐이다. 그의 유희는 체념 속의 유희이다.
머큐시오와 티볼트의 이런 성격 때문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과 로미오의 추방, 오해로 빚어진 두 연인의 비극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머큐시오의 ‘젊어서 노세’하는 성격이 우울한 기질이 있는 로맨티스트 로미오를 캐플릿 가의 가면무도회로 이끌었고 거기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났다. 뮤지컬은 티볼트에게 사촌동생 줄리엣은 남몰래 짝사랑해왔다는 설정을 덧붙였다. 티볼트는 기성세대의 분노에 젊은 세대가 분노를 이어가는 장기말로 쓰이는 현실에 지쳐 있었지만 자신은 자신대로, 줄리엣은 줄리엣대로 그럴 듯하게 정해진 삶을 따라 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장기말 신세에 체념, 납득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줄리엣이 오로지 사랑 하나로 가문에 반기를 들 때 그는 묘한 배신감과 자신의 세계관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는다. 그 혼란 섞인 분노는 연적인 로미오에게 향한다. 로미오가 없다면 세상은 더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다. 티볼트는 로미오 대신 자신을 맞은 머큐시오와 결투하게 되고 그를 죽인다. 머큐시오의 죽음을 목격한 로미오는 티볼트를 죽인다. 이로 인해 로미오는 추방 당하고 캐플릿 가는 줄리엣과 약혼자 패리스 백작 사이의 혼사를 더 빨리 진행시킨다.
줄리엣은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고 로미오와 함께하기 위해 로렌스 신부에게 도움을 청한다. 로렌스 신부는 줄리엣에게 죽음을 위장할 수 있도록 가사 상태에 빠지게 하는 비약을 전한다. 그리고 그는 로미오에게 사실 줄리엣이 죽은 게 아니라는 단서를 넣은 편지를 전하겠다고 말한다. 줄리엣은 깨어나면 로미오와 도망쳐 여생을 함께하기를 바라며 가사상태에 빠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친구의 인정에서 발생한다. 비보를 전하러가며 한껏 괴로워하던 벤볼리오는 줄리엣의 죽음을 로렌스 신부의 편지가 아니라 자신의 말로 전한다. 전령에게도 계획을 말했더라면, 결말은 바뀌었을까? 줄리엣이 죽었다고 오해한 로미오는 줄리엣 옆에서 자결한다. 깨어난 줄리엣은 처음에는 로미오를 보고 반색했다가 그의 죽음을 깨닫고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를 혼자 두지 않겠다며 연인을 따라간다.
사건의 전말과 결국 두 사람이 영영 떠난 것을 알게 된 두 집안의 어른들은 비로소 두 가문의 갈등이 얼마나 해로웠는가를 깨닫게 된다. 사랑에 맹목적이리만치 순수한 결의를 보였던 두 젊은이의 죽음에 모두가 책임이 있음을 통감한 두 가문의 레이디들은 이제 분노를 잇게 한 모두가 죄인들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고통 속에 깨달음을 얻은 결말이지만, 기성세대의 분노가 각 가문 가장 높은 사람들의 2세에게 칼날로 돌아와서야 그 분노에 제동이 걸린다는 점이 퍽 씁쓸하다. 그전까지도 케케묵은 분노를 유지하느라 희생된 다른 젊은이들도 존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로미오와 줄리엣> 아래에 깔린 일종의 세대갈등 내지는 분노의 대물림에 대한 경고가 더 존재감 있게 읽히는 데에는 앞서 티볼트와 머큐시오 같은 조연들의 방황이 잘 묘사된 장면들의 영향이 크다.
한편 나이가 들고 이 이야기를 다시 접하니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로렌스 신부이다. 젊은 두 연인의 사랑으로 베로나 안의 오랜 갈등을 풀어보고자 했던 그는 결과적으로 두 연인의 행복이 아닌 죽음에 책임의 지분을 갖게 된다. 로렌스 신부가 이 일로 징계를 받거나 파면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크다 로렌스 신부가 입은 타격은 사실 그것보다 크다. 그는 두 사람의 비극을 목도하고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중세 유럽의 신부에게 이보다 큰 괴로움이 있을까? 그나마 극의 마지막에 벤볼리오가 신부를 다독이는 몸짓이 있으니 그가 사람들 틈에서 다시 세상을 향한 애정과 안심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처럼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상투적인 조연이 아닌, 각자의 내면적 갈등을 지닌 조연들의 동기와 그로 인한 행동들이 이야기에 엮이며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더욱 탄탄하고 짜임새 있게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을 읽고 싶게 만드는 공연이었고 줄리엣의 ‘사랑하다는 것’ 넘버를 귓가에 계속해서 남아 있게 하는 공연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가문과 시대라는 배경을 뚫고 나아가려는 용기를 지녔던 로미오와 줄리엣. 두 사람의 곧음을 생각하며 여전히 이 사랑 이야기에 반응하는 우리의 시대는 분노에서 자유로운가를 곱씹어본다. 실은 곱씹을 것도 없이 답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자신의 결심을 곧게 펼치는 이들이 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시대 역시 많은 변화를 겪고 앞으로 나아갔음을 상기한다. 작금의 슬픔과 분노도 강물처럼 흘러가며 자정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손으로 이뤄나가야 할 연민과 해원의 자정이 있기를.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로미오와 줄리엣',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항목
주간동아 온라인 기사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는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