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로의 꿈을 꾼다는 것 - 윤희에게 [영화]

글 입력 2020.09.09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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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벌써 지나갔는지, 날이 무척 쌀쌀해졌다. 옷장 구석에서 긴 잠옷 바지를 꺼내 입은 어제, ‘보고싶어요’ 목록에 머물러 있던 영화 ‘윤희에게’를 봤다.


‘보고싶어요’를 누른 지는 꽤 오래됐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쉽게 손이 가진 않았다. 포스터와 줄거리를 슬쩍 봤는데 슬픈 영화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이 서늘해져서일까, 슬픈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문득 ‘윤희에게’가 보고 싶었다.


‘윤희에게’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 퀴어 영화, 특히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깊은 여운이 밀려옴과 동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윤희에게’는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았고, 추운 겨울이 배경이지만 참 따뜻했다.

 

 


윤희와 쥰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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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와 쥰은 서로 사랑했지만 세상으로부터, 서로로부터 도망쳤다. 윤희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결국 쥰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이들은 서로의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었다. 쥰이 윤희에게 차마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고모 마사코가 부치고, 편지를 읽은 윤희와 딸 새봄은 쥰이 있는 오타루로 떠난다.


윤희는 쥰의 집 앞까지 찾아가지만 쥰을 보자 숨어버리고,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눈물을 흘린다. 혼자 술집에 간 윤희는 친구를 만났냐는 바텐더의 질문에 그가 알아듣지 못할 우리말로 이야기한다. 맛있는 것도 먹고, 산책도 하고, 집에도 놀러 가봤다고.

 

바텐더가 “그렇군요.”라고 일본어로 다시 답하자 윤희는 꿈에서 깬 듯한 표정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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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와 쥰을 만나게 하려는 새봄의 어딘가 허술하지만 귀여운 계획으로 인해 그들은 결국 서로를 마주한다.


“오랜만이네.”

“그렇네.”


20년 만에 재회하는 순간, 그들은 뜨거운 사랑의 말이나 진한 포옹 대신 일렁이는 눈빛으로 온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눈길을 같이 걷는다. 손을 잡지도, 꼭 붙어 걷지도 않지만 둘의 마음이 온전히 느껴진다. 화면은 금세 어두워지고 눈 밟는 소리만 들린다.

 

이후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저녁은 같이 먹었을까,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상상만 할 뿐이다.


영화의 끝부분에 윤희가 쥰에게 쓰는 편지가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마지막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유명한 대사라 영화를 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사랑을 전하는 그 어떤 말보다 더 애틋하고 뜨거웠다.

 

 

 

윤희와 새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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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 전에는 윤희와 쥰의 관계가 영화의 중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희와 새봄의 관계에 더 집중하고 있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 윤희와 새봄을 보니 우리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그리고 ‘엄마’가 아닌 엄마의 ‘이름’을 작게 되뇌어보기도 했다.


새봄의 아빠는 엄마가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새봄은 엄마가 외로워 보여서 엄마와 함께 살기로 했다고 말한다. 쥰의 편지를 읽고 윤희와 쥰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던 새봄은 오타루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오타루에서 새봄은 윤희를 더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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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은 자신이 담배를 피우는 것도, 남자친구가 있는 것도, 쥰의 편지를 먼저 읽은 것도 아는 윤희를 보고 놀란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며 인물 사진은 찍지 않던 새봄은 엄마의 모습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새봄과 윤희가 추운 숙소에서 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 모습, 머리를 식혀야 한다며 차가운 컵을 이마에 갖다 대는 모습, 눈싸움을 하며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새봄과 윤희는 친구처럼, 동료처럼 점점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한국으로 돌아와 윤희와 새봄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꾹꾹 눌러 쓴 이력서를 내러 식당으로 들어가려는 윤희에게 새봄은 긴장되냐고 장난스럽게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 윤희의 얼굴에서 싱그러운 봄이 느껴졌다. 윤희의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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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싶었는데, 드디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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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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