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의 미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 연극 '미래의 여름'

글 입력 2020.08.2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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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도 무게가 있다. 시간이 쌓이지 못하고 바람에 가벼이 날려 사라지는 추억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켜켜이 쌓여 들여다 볼 때마다 마음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추억도 있다.

 

아마 어지러운 방을 치우다가 발견한 한 장의 편지에 몇십분이고 멍하니 앉아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 때로 머나먼 과거에 머물러 있다 생각한 추억이 오히려 현재와 미래를 내리누르며, 긴 시간선을 뒤집어 정지한 한 순간의 장면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는다. 추억이란 과거의 풍경을 제 나름대로 스케치해 완성한 그림이다. 가끔은 마음 한복판에 세워둔 이젤 앞에서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다.

 

연극 <미래의 여름>은 별빛이 반짝이고 제멋대로 소나기가 쏟아지던 찬란한 시골의 여름날로 관객을 초대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미래. 어른이 된 미래가 어릴적 미래의 기억을 무대 위에 풀어놓는다. 무대 위에 펼쳐진 소담한 나무 집과 푸르른 밭, 시원하게 펼쳐진 하늘과 강가의 풍경 속에는 작은 어른이었던 미래와 그녀의 절친한 친구였던 고모 동아가 살고 있다.

 

미래가 그려 놓은 과거의 기억은 즐겁지만은 않았으나, 어린 미래는 어른들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미래는 그 추억을 되새겨본다. 그토록 절친했던 동아의 마음을 긴 시간이 흐르고 멀찍이 떨어진 후에서야 조금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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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세계에 대한 연민


 

미래는 방학마다 고모인 동아네 집으로 놀러간다. 동아는 미래의 가장 친한 친구다. 고모가 들려주는 자연, 음악, 책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또래 아이들과 노는 건 지루할 따름이다. 하지만 동아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그럴만 한 것은, 동아는 낯선 이는 물론 마을 사람들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대신 바보라고 놀림받는 석우 오빠와 그의 어머니만을 챙긴다. 다른 사람들을 기피하는 듯한 동아의 모습은 석우의 동생인 찬우가 시골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심해진다. 무슨 일인지 알 턱이 없는 미래는 시골로 내려온 찬우와 동아를 이어주려 무진 애를 쓴다. 무언가 미안해하는 눈치의 찬우와 그런 그를 보며 경기를 일으킬 듯 불안해하며 피하려는 동아의 행동이 반복되고, 결국 동아와 찬우 사이에 얽힌 아픈 과거가 터지고 만다.

 

미래는 정말로 몰랐다. 동아가 미래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하고 세상과 멀어져 살아갔기 때문이었음을. 찬우는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는 동아가 부담스럽다며 서울에서 일하기 위해 떠나갔고 남겨진 동아는 자신을 버린 남자에 대한 충격으로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지낸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거의 10년. 동아는 그 시간동안 그 좁은 마을의 늘 같은 공간에서 빙글빙글 도는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완결짓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그녀를 그 시간 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동아의 낯선 모습을 본 미래는 다음날 도망치듯 그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 동아의 삶을 객석에서 지켜보는 나는 그녀에게 결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이해할 수 있어 슬펐다. 단순한 허구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았다. 한 시대의 이야기였다. 도시도 마찬가지지만 농촌이 얼마나 폐쇄적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여자에게 얼마나 더 좁고 폐쇄적인 곳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좋은 남자를 만나 가족을 만들고 집안을 꾸려가는 일이 여자들의 정해진 미래이자 꿈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다른 길을 알려주지 않았고 자신 스스로도 다른 세상을 알 수 없었던 동아에게, 찬우가 떠나간 그 날은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날이었을 것이다. 아직 어린 아이였던 미래나 천진난만한 석우에게만 마음을 열수 있었던 그녀의 시간은 유년의 시기에 고립되고 말았다.

 

연극 말미에 이르러 미래가 말한다. "나는 이렇게 나아가고 있는데 고모는 어디에 있는 걸까." 세상에서 단절된 삶을 살아가며 자신을 계속 고립시키던 동아,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며 안쓰러움만큼 답답한 마음이 치밀던 난 이 한 마디에 왈칵 눈물이 나왔다. 동아는 정말 어디에 있는 걸까? 지금쯤 그 갇힌 세계에서 무사히 탈출했을까?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았을까? 제 인생의 길가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히 피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래도 미래가 전하길 동아는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마을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녀의 결심이 어떤 것이었든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감옥이었던 그 마을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녀는 삶을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얻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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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이름들을 추억하다


 

주인공 미래는 아직 어린 아이의 착장을 하고 있지만 먼 미래의 시간대에서 과거의 고모를 회상하는 말투로 극을 전개한다. 이해할 수 없었던 과거의 추억을 조심스레 꺼내어 동아의 아픔을 짚어본다. <미래의 여름>은 어린 미래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관조하며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어지지만 분명 '미래의 여름'이다. 연극은 아이의 성장기이기도 했다. 처음 보는 고모의 낯선 모습에 집으로 바로 돌아온 미래는 그때서야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아마 돌아왔다기보다 도망쳤다는게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그렇게 미래가 머릿속에서 애써 지워버리듯 고모의 기억을 정리한 것은 두려움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미래는 간간이 자신과 친했던 고모와 자신에게 낯설었던 고모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게 됐다. 미래 자신에게도 놀람과 상처로 다가왔을, 사랑하는 고모에 대한 상실의 기억. 미래는 긴 시간이 흐르고 넓어지게 된 자신의 세계 속에서 그 상실의 기억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던 마음의 모양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게 어른의 증명일까. 그 과정은 쉽지 않다. 물론 과거와 멀어질 수록 옛 시간은 힘을 잃는다. 오래 우려낸 찻잎이 향을 잃듯 오랜 시간 들춰본 추억도 향이 점점 희미해진다. 하지만 씁쓸해진다. 오래 우린 찻잎에는 밍밍하고 씁쓸한 맛만 남는다. 기억도 마찬가지 아닐지. 단 하나뿐이었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친구를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해하게 됨은 가혹한 운명이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은 과거를 추억하는 미래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리움과 애잔함, 즐거움과 슬픔이 교차하는 감정의 종착지는 희미한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수많은 시간과 아픔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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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때때로 차분하고 깊은 어른의 눈으로 그 날의 여름을 돌아봤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빛을 하다가도 무거운 어른의 눈빛을 했다. 막이 내리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랬다. 그 눈빛이 주는 여운을 느끼며 극장을 나와 본 포스터가 이야기를 완성했다. 어른이 된 미래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풋풋한 웃음을 짓는 동아가 기대어 서 있었다. 분명히 극을 보기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포스터였으며, 별 생각 않던 '미래'라는 이름이었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과거의 아픔에 머물러 있던 동아,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억하는 미래의 마음 속 시간은 멈춰져 있다. 멈춘 기억 속에서 동아와 함께 보낸 여름이 변함 없이 새겨져 있다. 가까운 듯 멀리 떨어진 시간의 틈에서 미래와 동아는 닿을 수 없으며 그들의 시간도 결코 교차할 수 없다. 새로이 덧그릴 수 없는 완결된 그림 속에서 미래의 추억은 언제까지나 닫힌 결말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닫힌 추억이 있다. 이미 완결되어 더 애틋하고 그립지만 그 단절감은 쓰라리다. 내가 사랑했고 이해하려 했으며 결국 멀어지고 잊혀져간 수많은 이들의 초상화가, 피사체를 잃어버린 아픈 그림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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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선이 촘촘히 짜인 무대


 

잊고 지내던 관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따스하고 가슴 아픈 극본과 더불어 다층적인 연출이 극의 재미를 끌어올린다. 극본 구성 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생각나는 시점이 흥미로웠다. 아이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 상황이 펼쳐는데 그 괴리감으로부터 이야기의 몰입도가 높아진다. 동아의 결핍과 인물과의 관계성, 갈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있으나 한발짝 떨어져 관찰하는 장면이 많아 관람객이 한결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연극을 시작부터 끝까지 편안함과 긴장감을 조율하며 이끈 것은 배우들의 연기력이었다. 정말 사담이지만 미래를 맡으셨던 김희정 배우님은 사랑스러운 연기로 심장을 부여잡게 만들면서도 어른이 된 미래의 모습으로 정제된 모습을 보여줘 그 갭에 계속해서 심장을 부여잡을 수 밖에 없었다. 연극 <우리별> 때에도 배우님이 맡으셨던 캐릭터 지구에 푹 빠져 2번 봤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한송희 배우님도 인상깊었다. 상처받은 동아의 모습을 보여줄 때 정말 쓰러지시는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실감나는 연기에 놀랐다. 여기에 무대를 횡무진 다니며 이야기의 텐션을 한껏 끌어올려준 석우 역의 김방언 배우님과 유순하고 선한 미소로 이기적인 눈빛을 띠어 인상깊었던 찬우 역의 김호진 배우님, 미래의 아빠부터 동네 어른까지 감초 같은 역들을 소화한 장세환 배우님까지 완벽한 조합이었다.

 

그리고 <우리별>과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에 이어 <미래의 여름>을 보고 나니 창작극단 LAS의 팬이 되어버린 것인지 극단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행보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마음에 큰 울림을 준 연극을 볼 수 있어서 기쁘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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