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차라리 자신으로서 죽으라 - 알베르 카뮈, 이방인 2부 [문학]

나의 실존, 나의 삶, 그리고 주어지는 운명
글 입력 2020.08.2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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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스레 마음이 헛한 날이면, 카뮈의 사진으로 장식된 이방인을 편다. 책 표지에는 피안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매와 입에 문 담배… 그를 볼 제 나는 멋대로, 또 아무런 자격도 책임도 없이, ‘아아 아무래도 그는 자유로워 보인다.’ 하고 느껴버리고 만다.

 

아마 이 책을 잡는 때의 내 헛헛함이란 쉬운 말로는 공허감, 괜히 어려운 말로는 내 실존의 자격에 대한 회의일 것이다. 아무런 본질 없이 난 우리는, 그러나 있는 그 자체로써, 즉 실존 그 자체로써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 난 본대로 살아갈 수가 있는가. 있는 그대로의 나, 그에 대한 존중과 인정은 차치하고, 그 만으로써는 살아낼 수나 있을 것인가. 내가 읽은 ‘이방인’은 이러한 질문과 그에 대한 깊은 거절을 내게 던지었다.

 

이 책으로 날 인도한 어떤 헛헛함, 공허감, 모종의 회의란 지치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 지침이란 괜한 어떤 밤에 느껴오는 것,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적인 무기력이다. 그래, 그것은 충동적이기도 한 동시에 무기력한 것이기도 하다. 충동적으로 차오르는 일탈의 희구이자, 무기력히 깔리는 불가함에 대한 철저한 의식의 모순된 공존인 것이다. 그때 버리고 싶었고, 또 버릴 수 없을 것이라 철저히 나 믿던 것이란, 불가한 자유에 대한 내 바람, 질기게 학습된 작위에 대한 내 일탈이었다. 그것은 사회화라는 모호한 언어로 표지되던 것이기도 하다.

 

지난 이방인 1부에 대한 오피니언에서는 주인공 뫼르소의 성격 특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완벽히 이격된 이곳에서도, 뫼르소를 바라보고 있자면 짙은 불길함이 밀려온다. 그저 감정은 철저히 적고 감각만이 심대히 예민하게끔 태어난 어느 사나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느끼지 못하되, 장례식 아래로 쬐이는 뜨거운 태양을 오직 허덕이고 고통하여 그에 골몰하게 되던 어느 사나이를 보고 있자면, 아아, 이 사람은 어쩌면 몰락할지도 모르겠거니 싶다. 그가 철저한 이방인, 사회화로 길들여지지 않을 영영 낯선 짐승인 때문이다. 우리로 얽힌, 아니 얽혀 있다고 믿는 서로는 타자를 철저히 배척하기에…… 우리의 감정과 그 양태란 참으로 본능적 배타와 한정적 이타로 대충대충 얽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때때로 소름 끼치도록 배타적이고 대개 이타적이려는, 혹 그렇게 하려 애쓰거나 그렇게 믿으려는. 이런 괜한 생각을 가진다.

 

그래, 내 어떤 밤의 충동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안에 있고자 애쓰는 나, 우리로서의 내가 겪어야 할 기나긴 작위에서 이 지치는 감각은 피오르는 것이었지 싶다. 본능적 배타와 한정적 이타, 이타가 언제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면야… 그러나 나는 내 안고 난 본능을 또한 느끼며, 그것에다가 사슬을 감아 길들인다. 필요에 의한, 혹은 필수불가결로서의 이타를 스스로 훈육한다. 그것은 마땅한 일. 그러나 그 사슬을 언제껏 쥐고 있어야 할 내 팔에 힘이 빠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회화는 계속되는 것, 언제까지고 내가 채쥐어야 할 나의 목줄이다. 그런 말을 하자면 누군가는, 그것은 네가 너무 삿되게 태어난 유감스런 까닭이 아니냐 말하겠지만, 글쎄, 내 지친 눈 위로는 여러분의 침묵과 분노가 또한 보이는 듯하다. 그 침묵하는 분노는 잠깐씩만 눈빛에 어리곤 이내 종적을 감추다. 그러다 어떤 이의 죄 앞에서 비로소 심판자의 예복을 입음으로써 떳떳이 발현되더라.

 

뫼르소는 어떻든 죄인이다. 내내 불안하던 그의 행보는 결국 방아쇠의 앞에 닿았고, 그의 저주 같이 예민한 감각은 태양 아래서 녹아내려, 의식도 없이, 아무런 인식과 결단, 즉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는 살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심판이 시작된다. 그 심판이 묻는 죄목은 살인이었으나, 그 심판이 톺아보는 것은, 우습게도 살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를 명분으로 하여 한 인간의 자격을 검토하는 장. 고로 그 결과로서의 사형은 죄를 명분으로 한, 인간 자격의 폐기이다.

 

어쩌면 이것은 또 다른 살인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와 ‘절차’와 ‘형식’ 아래서 언도되는 살인은 그 죗값을 물지 않는다. 그들은 모종 운명에 대한 중압감과 어떤 비애미를 품고서 비장감을 느낀다고, 스스로는 여길지도 모르겠다.

 

**

 

 

재판장은 나에게, 이제부터 겉보기에는 나의 사건과 무관한 것 같지만, 아마도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들을 다루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또 엄마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렸고 동시에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를 느꼈다.

 

중략

 

양로원의 원장은 내가 엄마를 보려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장례식이 끝난 뒤 무덤 앞에서 묵도도 하지 않고 곧 떠났다고 말했다. 또 하나 그를 놀라게 한 일이 있는데, 장의사 직원 한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내가 엄마의 나이를 모르더라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 나는 바보같이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심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사고 있는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중략

 

양로원 관리인은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담배를 피웠고, 잠을 잤고, 밀크 커피를 마셨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방청석 전체를 격양시키는 무엇인가를 느꼈고, 처음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재판장은 관리인에게 밀크 커피 이야기와 담배 이야기를 한 번 더 반복하게 했다. - p.107

 

 

마리는 검사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해수욕, 우리가 함께 영화 구경을 간 일, 그리고 함께 우리 집으로 돌아온 일을 말했다. … 그녀의 말이 끝나자 법정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러자 검사가 일어서서 심각하게,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다음 날 이 사람은 해수욕을 했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희극 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렸습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p.114

 

나의 변호사는 참다못해 두 팔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도대체 피고인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고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했다고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그러나 검사가 다시 벌떡 일어나 법복의 위엄을 과시하면서, 존경하는 변호인처럼 순진하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두 범주의 사실들 사이에 어떤 심오하고 비장하고 본질적인 관계가 있음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고 그는 힘차게 외쳤다. "본인은,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 어머니를 땅에 묻었다는 이유로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합니다." 이 선언은 방청객들에게 엄청나게 강한 인상을 준 것 같았다. 나는 사태가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117

  

 

뫼르소는 어떻든 살인자이다. 그리고 죄인이 죗값을 치르게끔 되어 있는 것이 이 땅, 우리의 법도. 그러나 애석한 지점은 그 죄인이 짊어져야 할 죄의 무게, 그곳에 있었다. 전능한 저울이 우리에게 있어, 죄를 달고선 그 죄의 무게를 우리에게 선사해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오직 죄의 거기 있음을 밝히는 것만으로 심판은 간결하고도 명확히, 신속하고도 정확히, 그로써 이 하늘 아래를 언제까지고 공명정대히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손, 우리의 눈, 우리 임의의 격자를 가지고 죄의 무게를 계측하니, 그 계측에는 애석하게도, 저도 모를 감정이라는 것이 서린다.

 

뫼르소는 어떻든 살인자이다. 그것은 그가 그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아무런 인지도 의지도 없이 저지른 살인이지만, 살인은 일어났고 스스로 수감의 창살과 심판의 장을 마땅히 여긴다. 그러나 한편 그에게 죄의식은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이레귤러, 특이성이자 이례성. 의식이란 아무래도 모종 감정과 감각 위에 피어나는 것인가 보다.

 

너무 길어 채 인용하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기쁨만큼 두려움이 적었다. 그러니까 처벌받는 이로써 겪게 되는 가장 여실한 두려움, 본위 감정인 두려움 말이다. 그러니까 그는 선별적인 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보통 갖게끔 되는 이 두려움마저 표백되어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아이덴티티 이전의 실존, 그렇게끔 태어난 바이다. 그의 ‘그러함’, 그러니까 느끼지 못함의 특징이 죄를 사하거나 덜어내지는 못하겠지만, 구했더라면 동정표 정도는 끌어낼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마저 스스로 요구하지도 욕구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심판대를 이탈하고자 강렬히 욕망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제 그는 타인에게 이해받음으로써 갖게 되는 연민과 동정표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 타인은 곧 배심원이다.

 

그에게는 벌 받는 이의 두려움이 적었다. 이 두려움은 교인의 보드라운 인도를 따라, 능히 회개로 이어지게끔 되건마는 그는 애초 두려움이 적다. 또한, 거짓 하지 아니 한다. 그는 철저히 무감했고, 철저히 정직했다. 신을 믿는다는 그 한마디만으로 재판이 유리하게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제안과 인도, ‘믿겠노라’ 한 마디를 그는 거절하였다. 결코 믿지 못하겠음에. 이제 이 이례적 존재의 앞에서 교인은 스스로의 믿음과 신념을 시험받게 됨으로써 두려워하고 고통받고 허탈해하고 반감을 품는다. 만약 처벌이 두렵고, 그 두려움이 내면을 전횡할 때 한 마리의 인간은 가장 작고 겸손해질 터이다. 그때 죄의식과 뉘우침과 회개는 가장 여실하고도 진솔하게 피어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런 많은 것들이 없었다. 법정에서 필요한 이것, 스스로 요구하는 제 죄의 사함, 그를 위한 회개와 뉘우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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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와 변호사 사이에서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마 내 범죄에 대해서보다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딘가 좀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대로의 걱정거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가만있어요, 그편이 당신 사건에 더 유리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묻는 일 없이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 p.120

 

 

이방인 2부는 현대의 아마 유일한 심판, 재판 시스템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다. 죄인은 처벌 받아 마땅하되 그에 걸맞은 벌을 가려 받아야 하고, 죄인은 처벌 받아 마땅하되 살해당하여서는 아니 된다. 죄인은 그가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처벌 받아 마땅하되 그 죄에 합당한 무게의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정확히 합치되는 정도인 것으로써의 벌이란 영영 묘연하다. 또한 죄인은 그가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벌 받아 마땅하되, 그 벌은 죄와 범죄와 벌 모두에 있어 아예 무관한 이에 의하여 판결되고, 집행된다. 죄와 벌의 딜레마이다.

 

어떤 죄의 거기 있음을 증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떤 죄의 무게를 다는 것은 더더욱이 어려운, 아마 불가한 일일 것이다. 그 불가한 것을 이행하고자 그 긴 절차가 발명된 것이요, 또 그 불완한 것을 언도하고자 숱한 이의 참관과 동의와 증언을 구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여기, 한 인간의 죄와 그 죄에 걸맞은 벌을 밝히는 이곳에 죄인의 자리는 없다. 침묵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더욱 유리하리라는 저 변호사의 말이란, 어떻든 형량을 줄이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죄인의 공통된 바람이라고, 그는 단단히 생각하는 것이다. 뫼르소가 바랬던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밝히고, 죄를 밝히고, 딱 그만큼의 벌을 받는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건 가장 정당하고도 가장 어려운 바램이었을 것이다.

 

 

검사는 엄마가 죽은 뒤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요약했다. 내가 냉담했다는 것, 엄마의 나이를 몰랐다는 것, 이튿날 여자와 해수욕을 하러 갔다는 것, 영화 구경, 페르낭델, 그리고 끝으로 마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때 나는 검사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가 마리를 ‘정부(情婦, 몰래 사통하는 여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녀는 그저 마리일 뿐이었다.

 

사건들을 보는 그의 방식에는 명쾌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그럴듯했다. `바닷가에서 내가 레몽의 상대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레몽이 상처를 입었다. 나는 레몽에게 권총을 달라고 했고, 그것을 사용할 생각으로 혼자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계획했던 대로 아랍인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일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네 발을 침착하게, 틀림없이, 말하자면 깊이 생각한 끝에 쏘았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습니다. 여러분!"하고 검사는 말했다. "저는 여러분 앞에서, 이 사람이 고의적으로 살인을 하게 된 경위를 되짚어 보았습니다. 이것은 보통의 살인,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는 충동적 행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똑똑합니다. 그의 진술을 여러분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대답할 줄 압니다. 말뜻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행동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갖춘 장점이 어떻게 그를 죄인으로 모는 명백한 기소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고인이 하다못해 후회의 빛이라도 보였던가요?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이 사람은 단 한 번도 자기의 가증스러운 범행을 뉘우치는 빛이 없었습니다." 하기야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원래 진정으로 무엇을 뉘우쳐 본 적이 없다고 그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검사는, 배심원 여러분, 그의 영혼을 깊숙이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상 나에게는 영혼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고, 인간다운 점도, 인간들의 마음을 지켜주는 그 어떤 도덕적 원리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아마도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갖추고 있을 수 없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에게 불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법정에서는 관용이라는 매우 소극적인 덕목은, 그보다 더 어렵기는 하지만 더 고귀한, 정의라는 덕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적 공허가 어떤 구렁텅이가 되어 사회 전체를 삼켜 버릴 수도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 p.122

 


재판은 갈피를 잃고서 곤두박질치는 마차 같다. 죄를 꺼내어보고 그 죄의 무게를 다는 시도란 여기 없었고, 한 인간의 자질만이 평가되고 있다. 인간 자격에 기인해 죄를 치부해버리는 모습이다. 피고인의 자질과 인간성을 깎아내림으로써 검사는 역(逆)의 동정표를 구하고 있다. 그것으로 처벌은 성립되고 있었다. 여기서 죄는 명목으로써만 기능하고, 실질적으로 심판당하는 것은 인간의 자격과 자질이다. 시민적 존재로서의 한 인간이 갖추어야‘만’ 하는, 그렇게 모두가 여기는 것, 예컨대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그런 당연함이다.

 

그것은 재판장과 시민이 바라고, 또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때 검사와 재판장과 시민이 하나같이 바라는 것은 진정 정의와 떳떳함이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만약 죄인 뫼르소가 검사와 재판장과 시민과 같이 감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할 줄을 알았더라면 재판은 어떻게 되었을지. 우리 또한 익히 아는 그 모습, 그러니까 후회하고 자책하고 두려워하고, 그로써 회개하고 변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동정을 사게끔 되는 이 일련 죄인의 ‘바람직한’ 양태를 보였더라면 판결은 어떻게 되었을지.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심판의 전당에서 죄인이 보여야 할 마땅한 일련의 양태가 부재함으로써, 심판자 전원은 분노로 그를 몰아대고 있었던 것일지도.

 

 

"여러분, 바로 이 법정은 내일 가장 흉악한 범죄, 아버지를 살해한 범죄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범행이 불러일으키는 혐오감은, 나의 무감각함 앞에서 자신이 느끼는 혐오감에 비하면 차라리 한 수 아래라고 했다. 여전히 그의 말에 따르면,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죽이는 인간은, 자기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이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를 등지는 것, 어쨌든 전자는 후자의 행위를 준비하며, 말하자면 그러한 행위를 예고하고 또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다. "여러분, 저는 확신합니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이 법정이 내일 판결을 내리게 될 살인죄에 대해서도 역시 유죄라고 말씀드린다 해도, 여러분은 제 생각이 너무 과장되었다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끝으로 그는, 자기의 의무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결연히 그 의무를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규율을 무시하고 있으므로 이 사회와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반응도 보일 줄 모르므로 인정에 호소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본 검사는 이 사람의 목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처럼 절박한 지상 명령을 따른다는 의식에 의해, 그리고 흉악무도함밖에 찾아낼 수 없는 한 인간의 얼굴을 앞에 두고 느끼는 혐오감에 의해 보상받고, 채워지고, 빛을 받는다고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배심원들을 향하여 일련의 질문들이 낭독되었다. `살인죄, 계획적 범행, 정상 참작` 등의 말들이 들렸다. 배심원들이 퇴장했고, 나는 어떤 방으로 이끌려 갔다.

 

중략

 

피고인석 문이 열렸을 때 나에게로 밀려온 것은 장내의 정적이었다. 나는 마리가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나에게 이상한 형식을 갖추어, 나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 p.129

 

 

아무리 해 보려 해도 나는 그러한 오만방자한 확실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확실성에 근거를 제공한 판결과, 판결이 선고된 순간부터의 가차 없는 전개 과정 사이에는 어처구니 없는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문이 17시가 아니라 20시에 낭독되었다는 사실, 그 판결이 전혀 다를 수도 있었으리라는 사실, 속옷을 갈아입는 존재인 인간들에 의해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 프랑스(혹은 독일, 중국) 국민 같은 지극히 모호한 개념에 의거하여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이 그 결정의 진지성을 많이 깎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선고의 결과는 확실하고 심각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가 아버지에 대해 들려준 어떤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아버지에 대하여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는 아마도 엄마가 그때 이야기해 준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느 살인범의 사형 집행을 보러 갔었다는 것이다. - p.132

 

 

그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처형당한다. 그것은 그 누구도 이 죄인의 처벌을 당당히 선언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이 형량의 타당함을 보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처형이 순수하게 죄에 기인하는 것, 그러니까 다른 이의 목숨값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지불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끝내 추방됨을 뜻한다. 우리의 사회에는 성벽이랄 것이 없으니 추방은 곧 죽음, 이 지상에서의 축출을 의미하게 된다. 뫼르소에 의해 죽은 이가 부활하여 뫼르소를 죽이지 않는 한, 뫼르소의 처형은 완벽히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범죄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그러나 대신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공평함을 주장하는 우리에 의해, 우리의 이름으로 그 범죄자는 처형된다. 그것은 이 땅의, 우리의 오랜 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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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잠이 든 모양이다. 눈을 뜨자 얼굴 위로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나를 식혀 주었다. …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생애의 끝에서 `약혼자`를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엄마는 마침내 해방돼,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 마침내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영원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내 남은 소원은 다만, 내 처형의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 Fin.


 

중간부를 채 인용하지 못했다. 상고(上告)를, 그러니까 다시 재판받기를 포기한 뫼르소는 이제 사형을 기다리고, 그 사형을 두려워하고, 그러면서 자유를 갈망하고, 이내 갈망을 지워버리면서 처음으로 ‘생의 감각’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우연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몰라, 처절히 그 자유를 꾀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럴 값이었다면 상고를 하였을 게다. 그러니까 길로틴의 고장, 독약의 불량으로 인한 우연을 그는 갈망도 하여보지만, 이내 지워버린다.

 

그때 또 하나의 사제는 그를 찾고, 그에게 마지막 기회라며 신으로의 회개를 유도한다. 신 앞에서의 회개를 중개하는 자신이야말로 그를 위하는 자라며, 그 스스로의 요구와 욕망을 투사한다. 이타에 깃든 이기를… 다른 이의 회개를 요구하는, 이 교인의 욕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설적으로 죄인의 참회를 통한 자기 믿음의 정당화이다. 뫼르소는 이제껏 겪어온 많은 ‘인간적인 일들’에 신물이 난 것일까. 처음으로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는 ‘그 인간’들과 같지 않아 ‘인간적인 일들’에 온통 혼란함만을 느껴왔다. 그리고 그들의 ‘인간적인 일’들은 뫼르소를 향해 의무와 같이 밀려들어 왔고, 요구되어 왔다. 그는 상고를 포기하고, 그러니까 ‘보통 인간의 방법, 느끼지 못한 죄를 뉘우치고 끝내 거짓이었을지언정 급급한 회개로 사형만은 피해보는 일’을 포기하고 있는 차에 사제를 만났다. 사제는 인간의 심판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신의 심판이 중하다며 자신의 믿음, 자신의 욕망을 권한다. 뫼르소는 신물이 난 탓인지 격렬히 그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 부정은 두려운 이의 회피가 아닌, 가장 떳떳한 이의 자기 긍정이었다.

 

이 부분은 인용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1부가 너무 길다면 2부만이라도 읽어보기를 바란다. 스스로 죄를 받아들인 자의 떳떳함. 분명히 결정된 운명 앞에서 비로소 획득되는 삶의 첨예한 감각을 근거로, 그는 스스로의 분명함을 논한다. 무엇이 분명하단 말인가. 실체 없는 죄, 뚜렷한 주체 없는 처벌, 마찬가지로 실체 없는 신, 그 무엇이 분명하단 말인가. 그는 사형을 받아들였고, 길로틴의 고장이 아니고선 이 운명에 다른 길은 없을 것이라 논한다. 이제 와서 신에게 무릎 꿇어 비는 것이란, 차라리 비겁한 일이다. 미리 신을 받아들여, 그를 따라 살아온 것이 아니라면, 지금 회개란 두려움의 조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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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2부의 리뷰가 끝났다. 인용구를 줄이고 싶었지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대개 구절이 핵심적이라, 어쩌다 보니 리뷰가 책을 반쯤 읽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나는 무엇으로 이 긴 리뷰를 적은 것일까. 그것은 그만큼 내가 이 책에 깊이 동의했음을 뜻한 것일 테다.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그저 난대로 살아갈 수도 없을 터이다. 우리는 도저히 복잡하여, 하나의 분명한 갈피로 정의될 수가 없을 듯하다. 오직 사는 대로 살아질 리도 만무하거니와, 그렇다고 무엇이 주어졌던들 주어진 대로 살아질 리 또한 만무하다.

 

본능적 배타와 한정적 이타. 우리의 인식은 한정되어 주로 한 번에 한가지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지만, 여기 실체란 언제나 한 가지 극단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곤 하다. 그것은 만물에서부터 자기에 이르기까지 꼭 같을 것이다. 인식의 한계는 종종 극단적 이분법을 택한다지만, 인식의 대상인 실체는 그렇게 한 쪽 극단으로써 분명하게 정의될 수는 없었을 테다. 고로 우리는 무엇에건 언제까지고 애써야만 하는 존재이리다. 그 애씀이 인식과 감각, 의식, 처신 중 그 무엇을 지칭하는 지조차 모호하여, 가끔 나는 무엇을 향하여 이리도 살뜰한 노력을 기울였던가 회의하는 밤도 잦지만 말이다.

 

나는 무엇으로 이 책을 찾아와, 무엇을 안고 이 글을 적었던가. 그것은 내 실존에 대한 회의였고, 내 작위에 대한 회의였다. 누군들 아주 가끔의 밤, 여기 불빛으로 수 놓인 인간의 세계 한가운데를 서서 자신을 물어보지 않은 자 없으리다.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하는 그 우스꽝스럽고 모호하기 그지없는 질문이란, 어쩜 이것을 지칭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난대로 살아갈 수 없을 너와 나는, 어떻든 ‘우리’이기 위해, 보통 인간이 ‘되기’ 위해 무던히 애쓰다. 애씀은 오래되어 그 사실조차 이젠 지워져 있으리다. 그러나 가끔은 제 목에 채운 사슬이 무거워, 어딘가 이 안에서는 지치는 감각이 피오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버릴 수도, 그렇다고 계속 거뜬할 수도 없는 이 지치는 것을 대하여.

 

뫼르소는 분명 죄인이나, 역설적으로 가장 떳떳했다. 이것이 가당키나 한 말일까 잘 모르겠다마는, 뫼르소에 의해 죽은 이가 부활하지 않는 한 그를 죽일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 또한 참이다. 그는 그러나 시종 거짓 하지 않았고, 바라는바 자유를 위해 거짓 믿음과 거짓 뉘우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가부를 나누었고, 그에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가운데, 그에게는 ‘모르는 것’이 많았을 뿐이다. 왜 사람들이 저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그로써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요구가 왜 저렇게 첨예하게 일어나는 것이었던지, 그 요구가 타당한 것인지, 이때 그 스스로는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 그에게는 이 모든 보통 인간의 것들이 까마득했고, 애초 무감하였다.

 

이리 무감하게 태어난 이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의 구원이 우리 몫은 아니지마는, 충분히 질문해볼 법한 사안이다. 무감하게 태어난 이는 더 살뜰히 가장하거나, 자신으로써 처형대에 놓여야 한다. 애처롭도록 첨예한 두 택지, 무감한 이에게 이분법의 간극은 더욱 멀다. 더욱 잘 가장함으로써 지치는 유예를 택하거나, 아예 한 마리 떳떳한 이방인으로서 박해받게끔 된다. 뫼르소는 분명 후자의 전형, 그 화신이다. 그는 자신으로서 처형되기로 한다. 그 당당함은, 심지어 고대에 일어난 어떤 이의 처형을 상기시킨다. 물론 한 명의 선구자가 되기에 이방인의 손에는 피가 묻어버렸지만 말이다.

 

인간의 일과 감정에 지독히 무감한 어떤 이는, 어찌 처신하고 어떤 종말을 맞는가. 작위를 애쓰다 지쳐 천천히 종말할 것인가, 아니면 떳떳이 처형당할 것인가. 그는 떳떳함을 택했다. 그것은 택했다기보다는, 가장 솔직한 것이었을 테다. 나는 몰락과 처형을 각오할 생각일랑 추호 없지마는, 그의 행적에서 어떤 공감을 획책한 채로 책을 빠져나온다. 아직 내 몰락의 시점까지는 조금의 유예가 주어진 탓이요, 내가 그 몰락 혹은 처형을 각오하기가 아득 두려운 탓일게다. 이것이 니체가 찬양하는 몰락. 니체가 몰락과 기꺼이 몰락하는 자를 사랑하고 존하고 바란 것이,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지. 차라리 자신으로서 죽으라는.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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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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