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이 그칠 날을 기다리며, '윤희에게' [영화]

준과 마사코, 그리고 윤희와 새봄
글 입력 2020.07.30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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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은 <윤희에게>이지만, 편지를 처음 받는 이는 윤희가 아닌 윤희의 딸, 새봄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고민 끝에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사람도 편지를 쓴 준이 아닌, 준의 고모 마사코다. 준이나 윤희의 목소리가 아닌 새봄의 목소리로 영화가 시작된다는 점이 독특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윤희와 새봄의 관계, 그리고 준과 마사코의 관계에 눈길이 갔다.

 

 

 

마사코가 부치는 준의 '윤희에게'


 

준은 한국인인 어머니와 일본인인 아버지가 이혼할 때, 자신 때문에 스스로를 비난하는 어머니를 떠나 일본으로 왔다. 일본에서는 고모인 마사코와 눈이 많이 내리는 오타루에 살고 있다.

 

준은 한국에서의 윤희를 그리워하며, 가끔 윤희의 꿈을 꿀 때마다 매번 처음 쓰는 것처럼 윤희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에서 준은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흘렀”다며, ‘나는 비겁하게 너에게서 도망쳤고,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미숙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다’며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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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지만, 차마 편지를 부치지는 못하는 준의 곁에서 마사코는 마치 고양이 같은 따듯함으로 함께 한다.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온 준에게 새삼스럽게 포옹을 제안하기도 한다. 어색해하면서 서로의 품에 기댄 준과 마사코는 서로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의 위로와 유대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마사코는 부치지 못한 준의 편지를 몰래 윤희에게 부쳐준다. 후에 준에게 윤희의 딸이 오타루에 왔다고 전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마사코는 준이 용기를 내길, 억압해왔던 옛 시절로부터 그만 도망치기를 가만하게 응원한다.

 

마사코는 집 앞에 가득 쌓인 눈을 치우며,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하고 묻는다. 준은 오타루의 겨울이 끝나려면 한참 먼 것을 알면서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냐고 대꾸하지만, 마사코는 “막막하니까, 일종의 주문”처럼 말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랬던 준은 윤희를 다시 만나고 난 후, 마사코와 함께 걸으면서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하고 똑같이 묻는다. 막막한 현실을 가만히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막막해도 새삼스럽게 말해본다. 눈이 그치려면 아직 멀었음을 알면서도, 눈이 그칠 언젠가를, ‘일종의 주문’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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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이 읽는 '윤희에게'


 

윤희의 딸 새봄은 엄마와 아빠가 이혼할 때, 엄마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여서 엄마와 함께 살기로 했다. 반대로 아빠는 윤희가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윤희는 진정한 행복을 느꼈던 준과 헤어진 후, 오빠가 소개해 준 사람과 결혼하고, 오빠가 소개해 준 직장을 다니며 한없는 외로움 속에 가만히 있었다.

 

‘엄마는 왜 사냐’는 질문에 ‘자식 때문에 산다’는 윤희의 대답이 새봄에게는 자신을 짐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새봄은 좌절하거나 주눅 들지 않는다. 짐이 없던 시절의 윤희를 찾도록, 윤희에게 ‘새 봄’이 오도록, 누구보다 열심히 돕는다. 윤희에게 온 준의 편지를 먼저 몰래 읽어 본 새봄은 윤희에게 오타루 여행을 제안한다.

 

윤희는 오빠만 대학에 보내고, 자신은 대학에 가지 않는 대신 필름 카메라를 받았다. 윤희가 ‘주어진 여분의 삶을 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동안, 그 필름 카메라는 새봄의 손으로 넘어왔다. 아름다운 것만 찍기 때문에 인물 사진은 찍지 않는다던 새봄은 그 카메라로 윤희를 찍는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담배 피우는 윤희의 모습을 찍으며 새봄은 환하게 웃고, “이쁘다”고 말한다. 윤희의 얼굴에도 웃음이 맺힌다.

 

또, 새봄은 윤희에게 카메라를 건네며 자신을 찍어 달라고 한다. 능숙하게 카메라를 만지는 윤희를 보며 “왕년에 사진 좀 찍으셨나 봐?”라고 장난스러운 말을 던지기도 한다. “알다시피 여기 엄마 옛 친구가 살아”라는 말에는 “그래? 나 몰랐는데?”라며 짐짓 시치미를 뗀다. 모른 척 엄마의 삶을 응원하는 그 사랑스러운 마음에 윤희는 점점 더 많이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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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 같은 새봄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윤희와 준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걷는다. 영화는 이들의 재회를 길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의 만남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새봄처럼, 관객들은 두 사람의 만남과 앞으로의 일상을 각자 상상하며 응원할 것이다.

 

일하던 직장에 “기다리지 마”라고 말하며 여행을 떠나온 윤희는 한국에 돌아와 오빠가 있는 동네를 떠난다. 스스로 일을 찾고 언젠가 작은 식당을 차리겠다는 꿈도 가진다. 직접 이력서를 쓰고, 이력서를 낼 식당 문 앞에서 긴장된 모습으로 서 있는 윤희를 새봄은 웃으며 바라본다. 사진기를 들고 그 순간을 남기려는 새봄에게 윤희는 긴장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윤희가 보내는 '준에게'


 

그리고 이 장면들에는 윤희가 준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윤희는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

 

새봄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렸지 뭐, 언제 말하나 보자하고.” 기다렸던 윤희처럼, 새봄도 윤희가 준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를 모른 척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신, 나도 네 꿈을 꿔”라는 윤희의 마지막 고백은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기에. 또 그런 윤희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응원할 새봄이 있음을 윤희도 깨달아 할 수 있었던 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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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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