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추'에서 발견한 진실 [문화 전반]

나는 벌레를 삼켰다. 불편함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유
글 입력 2020.07.1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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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길을 혼자 걸으며 철학 수업에서 다룬 숭고정신에 대해 고찰하던 중, 숨을 깊게 마셨는데 벌레가 입으로 쏙 들어왔다. 곧바로 거센 기침을 내뱉었지만 그 작은 벌레 한 마리는 이미 목구멍을 넘어가고 있었다.'

 

_2019. 9. 14. 09:20 일기 발췌

 

 

사람은 입을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고 음식이 몸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난관이기도 하다. 그곳에 더러운 야생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사라지지 않는 목의 이물감.. 온몸을 타고 돌 것을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웃음이 나왔다. 머리로는 대단한 사유를 꿈꿨지만 결국 입으로 벌레를 삼키는구나. 육체를 타고나 도저히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인간, 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벌레가 목을 타고 내려와 내 몸속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벌레를 지닌 것을 숨긴 채 아무렇지 않은 척 길을 걸었다. 부끄러웠다.'
 

 

난 그저 우연 속에 간신히 벌레가 아닌 척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순간의 우연이 마치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처럼 하루아침에 흉측한 벌레가 된 것 같았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우월한 존재라면, 그 정의가 자신과 어긋날 때마다, 벌레를 삼키고 아닌 척하는 것과 같은 추함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좌절해야 하나.

 

 

 

1. 영화, <성스러운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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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피(Santa Sangre, Holy Blood, Alejandro Jodorowsky,1989)

 

 

컬트의 정석이라고 불리는 영화 <성스러운 피, Santa Sangre>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인공의 삶을 한 편의 연극처럼, 서커스처럼 보여준다. 어긋난 철학으로 현실에 눈 감은 사람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폭력, 코끼리에게 벌떼같이 달려가는 굶주린 이들, 영화는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함을 아주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소수자'들의 몸은 인간의 본형이 무엇이었는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불편한 진실이 반복되다 보면 어떠한 정상, 비정상의 기준 따위는 사라지고 한 인간으로서 이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들여다본 주인공 피닉스의 삶은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르라고 하면 애니메이션을 꼽을 정도로 어느 정도 미화된 것을 즐기고 겁이 많아 무서운 것은 피하는 편이다. 나와 같은 이들에게 '성스러운 피'는 사실 꺼려지는 것들의 집합체이다.

 

왜곡된 신념을 가진 광신도들의 초점 없는 눈빛, 남녀의 위계와 성 착취, 광대 공포증을 유발하는 서커스씬..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잔인한 장면으로 인해 가끔 눈을 감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눈을 떠야하는 이유는 가장 불편한 지점에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제도와 금기의 인위적인 성형을 뜯어낸 인간의 원초적인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느낀 감정은 타락한 현실에 대한 좌절이 아닌 희망이었다.

 

 

 

2. 인간: 나, 너와 피닉스


 

가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어릴 적 들었지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전쟁 이야기가 떠오른다. 할아버지께서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분이 6.25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셨다고 한다. 처음 총을 들고 사람을 죽여야 했을 때 너무 두려워 눈을 감고 총을 쐈다고 했다.

 

하지만 감정은 점점 무뎌졌고 시간이 갈수록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굴러가는 머리통이 그렇게 즐겁고 우스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충격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거들려 했지만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총을 쥐고 누군가를 쏘아야 한다면, 100명을 죽일 때 100번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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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피(Santa Sangre, Holy Blood, Alejandro Jodorowsky,1989)

  

 

'인간적'이라는 말은 흔히 두 가지로 사용된다. 하나는 사유와 창작이 가능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 나머지 하나는 추할 수밖에 없는 배고픈 육체와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 우리는 전자의 인간상을 추구하며 살아왔고 후자를 인정하면서도 철저하게 외면했다.

 

하지만 <성스러운 피>는 철저하게 육체를 가진 인간상을 따른다. 자신의 추악하고 처참한 지점이 과연 그들보다 상위에 있다 선언할 수 있는가. 육체라는 한계 앞에 우열과 열등, 주종 관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며 폭력과 트라우마에 휩싸인 피닉스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3. 미와 추,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만이 진실을 보는 길은 아니다. 사실만을 담아내는 듯한 우리의 눈은 사실 세상의 기준과 편견에 휩싸여 거짓을 뱉어내곤 한다. 사진보다 솔직한 그림이 있고 현실보다 진실인 연극이 존재한다. 지어낸 역할, 무대라는 공간, 열심히 외운 대사와 몸짓, 그 곳에서 현실에 가려진 진실을 발견한다.

 

'미와 추' 또한 다르지 않다. 숭고를 숭고만으로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종교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스테인드글라스와 십자가가 점점 화려해질 때마다 우리가 느끼는 신앙심은 커졌어야 했다.

 

신념이 담기지 않은 잠깐 눈부신 아름다움은 결국 추해지기 마련이다. 성스러운 피는 극적인 인간의 '추'를 드러냄으로써 가장 본질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4. 자유는 불편함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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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상처받을 수 있고 누구나 소외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건 이미 벌레를 먹은 것과 같다. 그 벌레의 추함을 뱉을 수도 다시 벌레를 먹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위험성과 불확실성이 사형선고는 아니다. 트라우마로 살인마가 된 '피닉스'도, 그를 구원하고 치유해 주는 '알마'도 모두 인간의 모습이다. 추함과 진정한 사랑은 우리 속에서 공존할 수 있다.

 

21세기를 살아가지만 18세기 고전주의의 시각으로 자신과 타인을 쉽게 판단해버리곤 한다. 질서정연한 조화와 통일, 균형 잡힌 형태, 고결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이상적이라고 여기며 가치를 재단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뚜렷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세상은 결코 진실이 아닐 때가 많다. 나와 타인을 그리는 명확한 윤곽선은 그 바깥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두껍고 진한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사람을 그린다면 그 속에 무엇이든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자그마한 우연으로 밑바닥을 경험했을 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자각할 수 있었다. 나에게 숭고는 본 적도 없는 신에게서, 대자연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하찮고 혐오스러운 벌레가 나에게로 왔을 때 나는 자유를 느꼈다.'
 

 

[정다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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