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의 기억조각들 [사람]

글 입력 2020.05.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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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잡힐 듯 떠나가 버리고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일상의 곳곳에서 느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분홍으로 피어났던 꽃들이 지고 그 자리에 건강한 초록의 잎들이 돋아난 변화다.

봄에서 여름으로의 가장 자연적인 세력 교체.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부쩍 얇아진 사람들의 옷차림이다. 이제 한낮엔 반팔을 입어도 쌀쌀하지 않을 정도로 볕이 제법 따뜻해졌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도 이제 꽤나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방한이나 꽃바람을 막아주는 용도로 생각하기엔 이제 너무 여름이 되어버렸다.
 
계절의 경계에서 계절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한다. 발 한 걸음 내디디면 여름에 닿을 봄의 끝자락에 서서 수없이 지낸 과거의 여름들과 계절들에 대해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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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긴 계절이다. 아마 일 년의 전부를 바쳐 이 계절을 생각하고, 이 중의 삼분의 이 이상을 머릿속에서 그 계절에 접속해 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고 일교차가 심해 카디건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계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설레기 시작한다. 아! 드디어 니트를 입을 계절이 머지않았구나!
 
옷 중에 니트와 스웨터를 가장 좋아하는 나는 니트와 스웨터를 언제나 꺼내 입을 수 있는 가을과 겨울이 좋다. 서늘한 공기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도 좋다. 피부끼리 맞닿아도 물기 없는, 부쩍 건조해진 살결이 좋다. 달착지근한 모과 차와 달달한 코코아가 어울리는 계절이라 좋다. 사실은... 연말의 포근함이 좋다.

올해가 어떻대도 괜찮을 것 같은, 내년에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연말의 너그러운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연말을 떠올리며 힘을 내곤 하지만, 카디건을 걸쳐 입을 때면 다가오는 가을과 겨울에 흥분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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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선망하는 가을과 겨울의 자리에 여름이 끼어들 틈이 있을까 싶지만, 여름은 가을과 겨울과는 정반대되는 상상으로 소환되곤 한다. 가을과 겨울이 현실에 기반한 상상이라면, 여름은 상상에 기반한 상상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헛된 망상이다.
 
실제 한국의 여름을 떠올려보면 기억이 썩 좋지만은 않다. 최근 여름의 날씨가 더 더워졌다고 느끼는 중인데, 정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곤 한다. 약속이 있어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미 땀으로 젖어버린 몸을 싣고 시작도 못한 여정을 떠나자면 한숨부터 나온다.

지하철 안은 또 어떤가! 같은 밀도여도 겨울보다 여름의 지하철이 불쾌할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지옥철 안에서는 옆 사람과 붙지 않으려는 서로의 치열한 노력들도 펼쳐진다. 여러모로 열기가 가득하다. 숨 막히는 더위에 냉방 기기를 찾지만, 한국의 여름은 또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에어컨 아래는 한여름 속 한겨울쯤 된다. 비염이 있는 나는 에어컨의 자극적인 바람에 어느새 코를 훌쩍이고 콧물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진 채다.
 
장마는 또 어떤가. 비를 싫어하는 나에겐 장마 기간은 지옥이다. 우중충한 하늘을 보면 없던 의욕도 싹 달아나고, 잠이나 자고 싶어진다. 습기 때문에 벽지가 울고, 나도 울고 싶어진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발바닥과 바닥이 쩍쩍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꿉꿉함을 알려온다. 습기 때문에 머리에 분무기를 잔뜩 뿌린 느낌이고, 의자에 닿았던 허벅지는 땀과 습기가 섞여 불쾌하고 찝찝하다.
 
그래서 나는 헛된 망상에 빠진다. 현실에 기반한 한국의 여름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나 책에서 읽었던 다른 세계의 여름을 상상한다. 여름이 꼭 불쾌한 계절만은 아니야, 하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 뒤로 미루고 싶은 여름을 받아들인다. 나에게 좋은 상상의 여름이 되어주었던 내 여름의 기억조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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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라는 계절감이 시각적으로 너무나도 잘 보이는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이다. 햇살이 따사롭고, 습도는 낮은 것 같고, 자연은 너무나도 아름다우며, 노랗고 초록색의 빛이 지배적인 스크린 속 이탈리아는 내가 선망하는 여름이었다. 더우면 언제든 옷을 벗어던지고 자연 속에서 수영할 수 있는 모습도 부러웠다.
 
 

 

몇 년 전에 봤던 이 영화는 ost와 함께 나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Mystery of love'라는 곡은 내가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영화의 ost다. 이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왠지 초여름의 시작을 함께 겪는 느낌이 든다. 어색하고 들떠 마음만 앞선 첫사랑의 느낌처럼 아직 여름이라고 부르기엔 무르익지 않은 초여름의 설렘이 묻어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Lana Del Rey의 'Summertime sadness'라는 곡도 내 여름의 일부다. 제목에 여름날이 들어가서일까, 여름 하면 항상 이 곡이 떠오른다. 뮤비 속 해질녘의 색감과 늘어지는 음감은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을 떠오르게 한다. 뙤약볕의 더위는 아직 남아있지만, 더위가 이제 참을만해질 때면 이 노래를 꺼내 듣곤 한다. 올해도 숨 막히는 더위를 어쨌거나 잘 참아냈구나 하며.
 
감각하는 순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조각들이 있다. 나에겐 그 어떤 것보다 음악이 그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 그래서 계절에 따라 듣는 노래가 조금씩 달라지는 편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노래를 들어야하는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름에 들었던 노래들을 살펴보며 다가오는 여름을 미리 감각했다. 계절의 경계에서 계절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이유는 계절의 변화가 가시적으로 잘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은 언제나 실제와 다르다는 말이 떠오른다. 현실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실제를 왜곡하고 조작하고 윤색한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건 부정확하고 믿을만한 게 못 된다.

하지만 계절에 한해서 조작된 기억은 조작된 대로 내버려두어도 좋다. 아름답게 미화된 계절감을 떠올리면, 여름이 제아무리 덥고 겨울이 제아무리 추워도 그 계절이 기대되고, 그 계절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나는 나의 선택적 기억들이 수집한 계절의 기억조각들을 통해 계절을 기대하고 상상한다. 두 노래로 초여름의 설렘과 늦여름의 나른함까지 예습했다. 실제로 내가 겪게 될 올해의 여름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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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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