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폭력] 10. 어느 편식쟁이의 변명

글 입력 2019.12.02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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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느 편식쟁이의 변명


 

사람들이 ‘못 먹는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항상 그런 거 없다고 대답한다. 좋아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절대적으로 기피하는 음식은 없다. 그래도 그런 질문을 받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콩’이다. 지금에야 겨우겨우 콩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콩’은 강력한 기피 대상이었다.

 

나는 콩을 싫어한다. 콩국수나 콩 음료, 볶은 콩 같은 건 잘 먹지만, 콩밥에 섞인 그 온전한 상태의 콩 (강낭콩 밥의 강낭콩, 카레의 완두콩 같은 것) 은 정말 싫어한다. 초등학교 때 반 전체가 강낭콩을 기를 때 지극정성으로 내 강낭콩을 돌보기도 하고 강낭콩에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화분 안에서 치열하게 성장할 네가 얼마나 힘들지 등등 애정 어린 편지까지 써봤다. 그러나 화분 속에선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강낭콩이 급식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이것은 사연이 있는 편식이다. 원래의 나는 선생님들의 가르침에 알맞게 모든 음식을 꼭꼭 잘 씹어 먹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의 한 급식 시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콩밥에 섞인 콩을 먹고 구토를 한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잘만 먹었던 음식이었다. 아직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때 먹은 콩이 잘못된 거였는지, 내 몸이 이상한 거였는지. 수많은 불확실 속에서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그렇게 사람 많은 급식실에서 구토했다는 것. 그 모습을 많은 아이가 봤고 같은 반 아이가 내 앞에서 더럽다고 말했다는 것.

 

그 이후 플라시보 효과인지, 정말 콩을 못 먹는 사람이 된 건지 콩을 입에만 넣으면 속이 울렁거렸다. 그와 함께 수치스러웠던 그때의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문제는 급식으로 콩밥이 너무 자주 등장했다는 것이다. 주간 급식 표를 확인했을 때 ‘강낭콩밥’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곧 콩을 먹게 될 거란 사실에 전날 밤부터 걱정했다.

 

적당히 골라 먹거나 안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땐 그럴 수 없었다. 점심을 다 먹고 선생님께 식판을 검사받아야 급식실을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기준에 식판에 음식이 많이 남아있다고 판단되면 다시 자리에 가서 급식을 더 먹어야 했다. 콩은 정말 싫지만, 안 받아서도 안 되고 식판에 남겨서도 안 된다. 그게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씹지 않고 삼키는 것이었다. 그냥 삼키면 힘드니까 국과 함께.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요령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꾸역꾸역 먹었어야 했나, 선생님한테 잘 말해서 콩 만큼은 봐달라고 할 수 있지도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나처럼 꾸역꾸역 먹었던 아이는 얼마 없었다. 아이들은 그 제도로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지’가 아닌 ‘내 식판에만 남기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가졌다. 선생님 몰래 네가 싫어하는 음식을 대신 먹어줄 테니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가져가달라는 식의 거래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거래는 나중엔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싫어하는 아이의 식판에 맛없는 음식을 투척하는 괴롭힘의 형태로 변질했다.

 

지금은 친구들끼리 음식 메뉴를 정할 때 누군가가 어떤 음식을 못 먹는다고 말하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오히려 먼저 못 먹는 음식이 없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어떤 이유든 상대방이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게 할 순 없다.

 

물론 성인과 아이의 신체는 완전히 다르기에 둘의 편식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그리고 편식보다는 골고루 먹는 습관이 몸에 더 좋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식습관을 형성하는 초등학생에게 좋아하는 음식만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건 스승의 당연한 본분일 것이다. 하지만 식판을 검사하고 통과되기 전까지 억지로 먹게 하는 방법도 당연한 본분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무서워서 억지로 먹는 것과 좋아져서 먹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선생님에게 식판을 검사받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콩이 두렵다. 더 이상 억지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걸 아는데도 꽤 오랫동안 습관처럼 콩이 들어간 밥을 국에 말아 삼켜 먹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급식 시간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단순히 ‘콩’이 너무 싫어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두려움에 떨 만큼 콩을 싫어하는 게 잘못한 일일까?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특징이 있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이 다른 것도 당연하다. 나 같은 경우 그게 하필 콩이었을 뿐이다.

 

선생님의 입장에선 그런 방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편식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내 머릿속에서도 식판을 검사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날 밤부터 걱정으로 잠을 뒤척이고 급식실에서 국에 말아 억지로 콩을 삼켰던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맛없는 음식을 투척 받는 괴롭힘의 대상이 나였을 땐 음식이 가득한 식판 앞에서 이 모든 걸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보다 더 깊은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지나치게 가벼워서 상대방이 어떻게 그걸 ‘상처’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생각할까 봐 내 안에만 가둬두었다. ‘고작 ‘콩’인데, 고작 ‘편식’인데 이게 대단한 문제일까‘ 라고 생각하며 어린 시절의 기억 정도로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고작 ‘콩’, 고작 ‘편식’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개인의 고유한 특징은 무시하고 모든 아이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밀었던, 삶의 태도를 권장하는 대신 강요하고 통제했던 교육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두려워했던 많은 것이 떠오른다.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늦게까지 남아 억지로 풀었던 수학 문제도, 부족한 운동신경으로 같은 팀에게 죄책감만 느꼈던 체육 시간도 무서웠다. 왜 아무도 나에게 수학에 흥미가 없어도, 운동신경이 부족해도, 콩을 싫어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나 자신조차도 말이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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