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킬롤로지', 폭력을 논하고 부모에게 전하다 [공연]

글 입력 2019.09.2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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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 킬롤로지 티저 포스터.jpg
 



폭력의 파괴성을 다룬 연극, <킬롤로지>



폭력을 당한 기억은 다른 기억에 비해 훨씬 휘발성이 약하다. 의식에서 사라진 후에도 무의식에 잔재되어 있다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하거나 자존감이 떨어진 순간에 다시금 의식으로 출몰하기도 한다. 나쁜 경험이 배움의 계기가 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폭력에 한해서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폭력은 경험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경험은, 삶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는 파괴력이 있다.


연극 <킬롤로지>는 바로 그 파괴력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소년 데이비는 게임 '킬롤로지'의 잔혹한 살해 수법과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하고, 데이비의 아버지 알란은 게임의 개발자 폴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그의 집에 잠입한다. 킬롤로지의 유저들은 게임 속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면 죽일수록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 총을 심장에 쏴 죽일 때보다, 고문을 하면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일 때 더 레벨이 높아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일 뿐,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현실에서도 게임 및 대중매체의 폭력성에 대한 논의는 자주 촉발되지만, 킬롤로지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있었다면 출시 전후로 정부의 제재가 가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 게임산업에 대한 지나친 규제가 오히려 우리나라 문화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킬롤로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어, 현실 아닌 현실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많다. 실제로 2017년, 이 연극이 영국에서 초연되었을 당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작년의 초연, 올해의 재연에서 모두 큰 호평을 받고 있다. 다만 작년에 비해 올해는 극이 '좀 더 친절해졌다'는 평을 받고 있고, 초연과 비교했을 때의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덧붙여, 배우들의 연기가 특히 돋보인다. 극 자체의 작품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알란 역 김수현 배우의 명품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람의 가치가 충분하다.



데이비.jpg
 


소년 '데이비'가 원했던 촛불 하나



*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년 데이비에게, 어린시절은 지옥이었다. 아버지 알란은 일찌감치 집을 떠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보러오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마지막 만남에서 그에게 강아지 '메이시'를 남기고 떠났다. 엄마는 생계 때문에 바쁘고 지친 상태였고, 데이비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아니었다. 그를 지지해 준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그 강아지 메이시였다.


그러나 학군이 좋지 못한 동네에서 데이비는 종종 괴롭힘의 타겟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메이시마저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은, 어린 소년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인생의 모든 전구가 한꺼번에 점멸되는, 삶의 빛이 단숨에 어둠으로 뒤덮이는 아픔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메이시의 죽음 이후 데이비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만 간다. 결국엔 건달들에게 잘못 시비를 걸어 게임 '킬롤로지'에 나오는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하고 만다.


연극 <킬롤로지>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부모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당시 데이비를 괴롭히러 아이들이 집까지 찾아왔을 때, 나가기 싫다는 아들의 말을 어머니가 조금만 더 귀기울여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불가역적인 탈선의 길로 나아가기 전 누군가 한 명이라도 지지대가 되어주었다면, 데이비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GOD의 노래 '촛불 하나'의 랩 부분에서, 촛불은 하나였다가, 두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그렇게 점점 늘어간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떨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어른들이 켜주는 촛불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따뜻한 말 하나, 손짓 하나가 모여 또하나의 삶을 수렁에서 구제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도 그랬을 것이다. 칭찬 한번 들으려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확인받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지. 지금의 아이들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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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폴'



그렇다면, <킬롤로지>와 데이비의 죽음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게임 개발자 폴은 어떤 사람일까? 허영과 자만, 잘못된 확신으로 똘똘 뭉친 그의 인격은 어떤 과정으로 형성된 것일까?


폴의 아버지는 데이비의 어머니와는 다른 의미에서 잘못된 양육 방식을 택했다. 데이비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다면, 폴은 지나치게 높은 기대 속에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산을 타고, 쏟아지는 은하수 아래에서 '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 폴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애정이 아니라, 왜곡된 욕망의 투사였다는 것도 모른 채로.


폴은 아버지를 때리고 죽이는 상상을 하며 <킬롤로지>를 만들었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존재를 없애버림으로써, 지금의 모습이 멋지고 잘났다는 확신을 얻어내고 싶은 갈망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부모에게 같은 말처럼 느껴지는 기대와 애정은 자식에게 전혀 다른 함의로 다가올 때가 많다. 기대의 언어가 현재의 모습에 대한 불만족을 뜻할 때, 애정의 언어는 지금 그대로에 대한 수용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의 후반부에 폴은 한 명의 아이를 입양한다. 처음에 그는 평범한 아버지들과 다름 없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를 걱정하고, 데리러 간다. 그러나 점점 아이가 자신의 통제 밖을 벗어나는 일이 늘어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폴은 파양을 결정하고 만다. 그렇게 폭력은 되물림되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폴도 아이를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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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을 되돌리고 싶은 '알란'



이 연극은 세 명의 독백으로 이뤄지지만, 그 중에서도 알란의 서사는 폴과 데이비에 비해서 비중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란은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 역할은 바로, '지나간 일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알란과 데이비의 엄마 사이에 어떤 파경이 있었는지 자세히 묘사되진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데이비를 떠났고 아빠로 있어주지 않았다. 소년 데이비가 강아지 메이시에게 위안을 얻었던 건, 유일하게 자신을 돌봐준 생명체이기 이전에 메이시가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이코패스 같은 아이들이 출몰하는 거리를 걸을 때마다 생각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아빠가 와서 나를 구해줄 거라고. 하지만 알란은 아들이 죽은 뒤에야 왔다. 그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래서 알란은 감옥에서 데이비를 상상한다. 이미 알고 있는 어린 시절부터, 전혀 모르는 시절까지 떠올리면서 혼자 웃고 우는 것이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마 극작가는 관객들이 알란을 보면서, 상처를 받은 일만큼이나 상처를 준 일도 영속적인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느끼길 바랬을 것이다.


영상 보는거.jpg
 

 
<킬롤로지>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낙관과 비관은 끝없는 경주를 계속해왔다. 아직 승자는 결정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연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극에 묘사된 폭력을 보다보면 작가가 지독한 비관주의자가 아닐지 의심하게 되지만, 극 중간에 희망의 메시지가 드러날 때도 많다.

알란이 폴을 포박한 상태에서 나누는 대화들 중, 군인들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쏘지 않은 총알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는 총기들이 무덤에서 잔뜩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폭력을 정면으로 마주보길 두려워하는 존재다. 그 사실은 우리를 인간성의 틀 안으로 밀어넣는 최후의 보루다. 심지어 폴조차도 데이비가 살해 당하는 영상 속의 광경을 똑바로 지켜보지 못한다. 그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폴 역시 잔혹함에 몸서리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이 극은 인간의 본성을 낙관하는 쪽에 가깝다. <킬롤로지>는 폭력이 인간 고유의 속성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이 만들어내는 속성이라고 말한다. 군인들은 살해 병기로 혹독하게 훈련받는다. 폭력적인 부모는 자신과 닮은 자식을 만들어낸다. 대중매체의 범람 속에서 청소년들은 삶의 방향성을 잃고 만다.

<킬롤로지>가 던진 문제의식은 이제 우리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그 답을 찾아 우리 세대의 폭력을 후대에 되물림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킬롤로지
- Killology -


일자 : 2019.08.31 ~ 2019.11.17

시간
평일 8시
주말 및 공휴일 3시, 6시 30분
월 공연 없음

*
8/31(토), 9/1(일) 6시 30분 공연만 있음
9/12(목) 3시, 6시 30분
9/13(금) 4시

장소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티켓가격
R석 55,000원
S석 40,000원

제작
(주)연극열전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125분 (인터미션 : 15분)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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