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뮤지컬 "난설" 리뷰 [공연예술]

글 입력 2019.09.02 04:3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뮤지컬 <난설>(이하 <난설>)이 뮤지컬 팬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난설>은 허난설헌의 시를 제재로 한 창작뮤지컬로, 최근 대학로 콘텐츠그라운드에서의 공연을 마친 뒤 예스24스테이지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있다. 극은 허초희(허난설헌)의 동생 허균이 죽기 전 그의 누이의 삶을 톺아보는 과정을 그린다. 본 글에서는 필자가 최근 <난설>의 본 공연과 관객과의 대화를 관람하며 느낀 점을 자세히 짚어보려 한다.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여러 공연 주체 중 대본 집필을 맡은 작가님의 답변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난설>의 창작진은 허초희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기보다는, 그를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이 그리는 데에 집중한 듯하다. 무대 위에서 허초희는 ‘아름답게’ 연출되는데, 그와 같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창작진은 한복이라는 장치를 사용했다.


이 문화권의 불문율과도 같은 한복의 곡선적 아름다움은 초희의 주변 인물들의 기억 속 ‘아름다운' 초희의 모습을 그리는 데에 미묘하게 활용된다. 또한 한복 바지와 치마는 서로 교차되며 초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꿈에서 멀어져야만 했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초희에게는 극이 진행됨에 따라 신비감, 아름다움, 처연함, 다정함 등이 합성된 ‘여성적’ 이미지가 씌워진다.



607225_405326_2518.jpg
 


이러한 연출은 극중 초희의 삶이 두 남성 캐릭터 허균과 이달의 회상에 의해 설명된다는 점에서 다소 위험하다. 극은 초희의 주체적 언어가 아닌, 누이가 행한 선택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허균의 감정선에 의해 전개된다. 극의 설정 상 초희는 주변 인물들의 기억 속에 갇힌 인물이며, 그들의 회상이 있어야만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혼(魂)이다.


그렇기에 작품에서 그려진 허난설헌의 삶은 타인의 추측과 상상으로 뒤덮인 픽션에 불과하다. 타인의 입을 빌려 자신을 노래하는 주인공이라니. <난설>은 요절이라는 결말과 상관 없이 무대의 최전선에서 치열한 삶의 행적을 보여주는 여성 허초희를 기대한 관객들을 적잖이 실망케 했다.


타인의 기억 속에 갇힌 초희의 삶의 연표에는 빈칸이 많다.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 허균은 끊임없이 누이의 선택에 대해 질문하지만, 그에 대한 초희의 대답은 극에서 명확히 듣기 어렵다. 한 마디로 <난설>에는 ’난설’ 허초희의 서사가 부족하다. 초희가 행한 선택의 결과는 허균과 이달에 의해 조금이나마 관객에게 전달되지만, 그가 특정 선택을 행한 이유는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다.


발언권이 없는 초희가 그 자신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리가! 무대 위는 초희가 아닌, 그의 선택을 이해하려는 허균의 고뇌로 가득하다. 초희는 누군가에 의해 이해될 필요가 없다. 초희는 그 자신과 그의 시만으로 충분하다.



난설_공연사진_3.jpg
 


여성 캐릭터의 감정에 대한 작품의 이해도 또한 기존의 ‘남장 여자’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법과 편견도 막을 수 없는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나 누이로서의 다정함, 남성 캐릭터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등이 그에 해당된다.


극이 전개됨에 따라 꼿꼿했던 난이 눈발에 맞아 점차 꺾여가는 모습이 연상되는 것 또한 어쩐지 석연치 않다. 인물 간의 연결 고리가 이성애적 사랑 코드가 아닌 ‘지음’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은 다행스럽지만, <난설> 또한 유명 ‘남장 여자’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난설>에서 ‘지음'이란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허초희라는 캐릭터를 ‘여성이기보다는 한 인간이 행한 선택들을 중점으로’ 보아달라는 한 배우의 말은 여러모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애초에 ‘여성이기보다는’이라는 말도 우습다. 인간성과 여성성을 임의로 분리시켜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 상실에 대한 관객의 지적을 ‘핀트에 어긋난’ 해석으로 호도할 참인가. 그의 발언은 여성에 대한 논의의 장을 한정시킨다. 그 어떤 작품도 성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우리는 그 어떤 작품에 관해서라도 여성을 논할 수 있어야 한다.



29074332_111.jpg
 


위와 같은 작품의 특성은 <난설>의 창작진 스스로가 작품에서 여성 허초희의 고충을 언급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꽤나 의문스럽다. 극중에서도 초희는 문학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남성 한복을 입었고, 정략결혼을 한 후로 바깥일을 할 수 없었다. 작품의 프로그램 북에서도 창작진은 허난설헌이 여성에게 가장 가혹했던 조선 중기를 살다 간 여성 작가임을 언급하고, 그가 ‘천재 여류 작가’가 아닌 ‘천재 작가’로 불리기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난설>의 창작진은 왜 초희에게 온전한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을까?


관객과의 대화에서 극이 초희가 아닌 허균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유를 물은 질문에 작가는 허난설헌의 시가 주는 위로의 정서를 무대 위에 재현하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작품의 주제가 ‘위로’이니, 위로를 받은 자의 시점에서 서사를 풀어나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했듯 창작진이 여성 허초희의 고충을 인지했음이 분명한 이상 충분한 대답이 되기 어렵다.


<난설>이 여성 허난설헌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그에게서 발언권을 빼앗지 말았어야 한다. 또한 해당 작품이 관객들에게 위로의 정서를 전달하는 데에 성공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게다가 공연을 통해 허난설헌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쩐지 <난설>은 극의 정체성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듯한 인상이다.


올해 초연을 마친 <난설>이 앞으로 여러 차례의 프로덕션을 거치며 어떻게 변화해 갈지 궁금하다. <난설>의 재연이 기대되는 이유다.



[이승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