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F학점의 자유

글 입력 2019.07.0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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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춰요, 당신의 의지로




처음 강의를 탈출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쇠창살이 있는 어두운 설계실에서 벗어나 햇빛이 쏟아지는 호수를 지나 걸어가며 Ella & Louis의 ‘Cheek to cheek’이란 재즈를 들었다. ‘Heaven~’으로 시작하는 재즈의 선율이 내가 살아온 세계의 조임을 한 순간에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학업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2015년의 가을에 처음으로 강의를 빠졌다. 막중한 책임감, 죄책감을 내려두고 딱딱한 강의실과 학교를 벗어난다는 것은 내겐 굉장한 사건이었다.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학업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으며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이 날의 해방감과 여유로움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과연 ‘해야 한다’의 삶을 것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후 몇 년의 시간은 ‘해야 한다’의 책임감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내가 원한 것인지, 원하도록 만들어진 지 모를 것들을 구분해나가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알게 모르게 만들어놓은 틀을 깨나 가는 것과, 사회 시스템 속에서 적응해버린 몸의 감각을 재배치하는 작업은 느리고 길게 이루어졌다. 때론 인식하지 못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규칙들이 머리에 늘 새겨져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이 성공하는 데 중요한 일이고 당연한 일이야. 무조건 강의는 모두 제시간에 들어야 하며, 당일 복습을 해야만 해. 장학금을 타야 하기 때문에, 학점은 B아래로 떨어지면 안 되고 싫어하는 과목이나 일이더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맞아. 책은 꼭 읽어야 해. 기본적으로 놀면 안 돼.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끝에는 그래야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생일에도 크리스마스에도 도서관과 설계실을 전전하며 맡은 일들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를 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적었다. 시간을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은 일의 능률은 물론이고 마음까지도 병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충분히 늘어놓고 나의 시간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하는 재즈를 참 좋아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바쁘면 이런 음악이 사치로 여겨진다. “내가 이렇게 여유롭게 있을 때가 아닌데!”하며 말이다.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그를 통해 모든 일에 ‘해야 한다’는 일반화된 규칙과 당위는 없다는 것을 느꼈고,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그거 안 해도 사랑받을 수 있어’라는 어떤 선배의 말과 친구들과 교수님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에 힘입어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나의 삶은 어떻게 직접 선택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어떤 방향이든 내가 바로 이 삶의 선택하는 사람이자 책임자라는 것을 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금 여기 프라하의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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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지나갈 하나의 숫자, 2019년도의 초반이 지나갔다. 회고해 볼 시간도 없이 지금 여긴 프라하의 낮이다. 단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유시간을 내고, 개인만의 사유 시간을 갖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번 해의 상반기는 원하는 것들을 말 그대로 다 해본 시간이었다. 계산 신경과학회를 참여해 팀 프로젝트 수상과 더불어 팀원들과도 친해져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되어 공식적이지만 개인적인 의견이 담긴 글을 연재하고, 뇌과학 동아리와 더불어 관심 분야 소모임을 만들어 주 2회씩 만나가며 활동했다. 한국 장학 재단에서 진행하는 파란 사다리 프로그램에 합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합격 후에는 팀 프로젝트를 준비해나가야 했다.

동시에 해외를 올해는 꼭 나가보겠다는 결의로 시작한 4개의 아르바이트를 소화했다. 건축학과이지만 계산 신경과학학회를 계기로 컴퓨터공학과 수업을 4개 듣고, 철학 강의에 학점교류, 교양강의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들었던 22학점의 수업들은 실상 모든 것을 하지만 깊이가 있기 어려웠고, 일정 부분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동시에 사람들과 교류하며 연극, 페스티벌, 뮤지컬 등의 문화생활까지 더하니 나를 위한 시간이 지극히 적었다. 하고 싶은 활동만 있고 그것들을 하나로 잇는 방향성은 부재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했다고 느낀다.

방향성이란, 말로 표현된다. 서술되지 않으면 흩어져 버리는 것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했던 경험이 다른 일을 할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해당되지, 방향성을 만들어 가는 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글을 쓴다. 큰 목표를 구체화하여 글로써 표현하고, 계획을 세운다. 이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 머릿속 언어로 생각을 거듭한다.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피드백하며 나아간다. 그러나 나는 방향성과 과정에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기록을 해나가지 않았다.

원체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기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경험하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그 순간은 지나갔고, 현재는 다가왔는데 과거의 기록을 보며 그 시간을 반추하는 것이 다소 의미 없거나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토록 과거에 열망했던 활동들을 하면서도 행복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제는 그 활동에 대한 기대감 내지는 방향성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 가지를 느낀다. 방향성과 기대감이 있어야 삶이 지속적으로 행복할 수 있고, 계획을 세워야 원하는 방향대로 시간 투자를 하여 현실화시킬 수 있다. 기록을 해야 이 시간들이 나에게 의미 있고, 마법 같은 순간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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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트인사이트는 내게 기록의 시간을 허용해줬다. 질문을 던지고, 공식적인 공간에서 어떤 글을 쓰든 상관없는 내용과 형식의 자유는 처음이었다. 플랫폼을 한껏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나의 글을 쓰기 위해 주제를 고민하고 글을 써나가는 과정이 충분히 즐겁고 뿌듯했다.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맸던 것 같다. 독자 타깃은 누구이며, 되돌아가 독자를 꼭 설정해야 할지부터 글의 형식과 분량, 주제 등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공식적인 글을 써야 하는 의무감은 어떤 분야든 프로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줬다. 더불어 글이 메인에 올라가고 다른 포털사이트에 송출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글을 작업하게 된다면, 어떤 방향성으로 글을 써 나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도 했다.

이 짧은 글 하나를 쓰는데도 어디에 시간을 투자하여 글을 쓸지, 무엇을 쳐내고 무엇을 부각할지 수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주 1회씩 연재해야 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공들여해야겠다는 욕심보다도 이 상황을 적절히 파악하여 어떤 주에 힘을 더 줄 지 결정해야 했다. 결국 분야는 달라도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고 했다. 여기서 느낀 것들을 나의 삶에 대입해보며 이제는 모든 일들에 힘을 쏟기보다도, 잘 해내고 싶은 것들을 선정하여 시간 투자를 해야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말로는 이해했지만, 몸으로 체감하니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해야 돼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다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고 과정을 토대로 이 모든 일들을 가져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한 가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시간을 차지하던 ‘이산수학’이란 수업이다. ‘드롭’이라는 말로 통용되지만 실상 강의와 시험을 포기하여 F학점을 받고, 재수강을 하거나 학점을 지운다는 의미이다. 과거에는 가능하지 않았겠지만,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한 시점에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판단한다. 이는 다른 일정들을 소화하기 위한 완충 시간이 되어줬다. 가끔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음의 부담이 한 층 덜어졌다. 이를 통해 이번 학기 중도 휴학의 유혹을 이겨내고 마무리라도 제대로 해내자는 목표는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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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강박에 둘러싸여 살던 삶을 지나와서, 꼭 그래야 한다는 당위에서 벗어나 방향성 없는 자유의 삶을 살아본 시간은 예상외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엔 지나친 강박과 어떤 목적도 없는 자유 각각을 적당히 조절하여 나의 방식으로 다뤄가는 것이 중요하며, 현재 가장 큰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역시 과거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갈망해온 유학의 꿈을 단기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이뤄냈지만, 어떤 방향성과 기대감 없이는 자칫 장소만 바뀌었지 똑같은 일상의 시간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내게 중요한 것은 하루를 살아내는 것에서 남은 나의 날들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하는 일이다. 나의 방식을 세우고, 이 시간에서 나의 최선을 실현하고 자유와 낭만을 한껏 즐기는 것, 그리고 기록하는 것.

그래, 여긴 지금 모든 낭만과 상상의 도시 프라하다.


[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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