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허무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묻다, < 고도를 기다리며 > [공연]

글 입력 2018.05.15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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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 부조리극, 실존주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야기할 때 흔히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한눈에 봐도 난해하고 어려워 보인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고고'와 '디디'


그런데 실제로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웃음이 빵빵 터지는 재미있는 희곡이었다. 거의 아무런 무대 장치도 음악도 없이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극이 진행되는데, 이 연기가 압권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이나 행동뿐 아니라, 상대의 행동을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모습이 계속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흔히 코믹 연극이라 불리는 극들에서는 오히려 억지 웃음이나 실소만 남기고 온 적이 많은데, 이 연극은 '진짜' 웃겼던 것이다.
 
또, 쉴 틈 없이 대사를 주고 받는 고고와 디디 두 배우의 호흡에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들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 자체였다. 관객들은 이처럼 흡입력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자연스레 그들의 기다림과 고독, 허무를 가까이서 따라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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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도를 기다려야 해"


극은 3시간 동안 진행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고고와 디디는 언제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마냥 고도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노래를 부르고, 아무 이유 없이 싸우고, 모자를 바꿔 쓰는 등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일 뿐이다. 끊임 없는 기다림에 디디는 곧잘 고고에게 "우리 그만 가자"고 말하지만, 고고는 "안돼,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한다. 그리고 디디는 한 번도 "왜?"라고 되묻지 않는다. 그저 "아참, 그렇지"하고 체념한다. 그리고 또다시 무력한 기다림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토록 비논리적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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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봐"


그런데 이들이 잠시나마 지루함을 잊게 되는 때가 있다. 바로 포조와 그의 노예 럭키가 등장할 때이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고고와 디디와는 매우 달라 보인다. 포조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같은 인간인 럭키를 짐승처럼 대하는 사람이다. 럭키는 포조에 길들여진 때문인지, 그저 무기력하게 명령을 따른다. 고고와 디디는 이 비인간적인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어느새 포조의 이상한 합리화에 동조하게 된다.

결국 아무도 "왜"냐고 묻지 않는 것이다. 럭키의 존재는 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 비논리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포조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럭키에게 "생각해봐"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럭키는 갑자기 숨 쉴 틈도 없이 미친듯이 생각을 뱉어낸다.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러한 대로 살아가는 나머지 인물들과, 생각함으로써 폭주하는 럭키. 어느 쪽이 더 인간다운 것일까.



'고고'의 의심


모든 인물들은 방금 한 말도, 심지어 어제의 자기 자신까지도 잊어버리는 연속성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고고이다. 그는 (비록 이후에는 동조하였지만)럭키가 착취당하는 모습에도 먼저 의문을 제기하였고, 거의 모든 과거의 일을 기억한다. 포조와 럭키가 어제도 왔었다는 것을,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소년이 어제도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인지 그는 극 중 인물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고고를 보면서도, 이 부조리함을 깨닫는 인물이 적어도 한 명은 있다는 사실에 왠지 안도감과 같은 것이 느껴졌다. 결국 두 인물은 기다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질 희망이랄 것도 없음에도 어렴풋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는,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인간이라면 응당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야 한다는 관념이 무의식적으로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의 본질


이유 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그리고  자기가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포조와 럭키의 모습은 도저히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삶을 닮기도 했다. 사람마다 '고도'는 모두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모든 의심을 저버리게 될 정도로 절대적인, 그러나 불확실한 기다림 말이다. 그리고 우리 삶은 늘 논리적일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비논리 속에서 우리를 좀 더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 모습에 대한 객관적인 의심과 비판은 아닐까? 굳이 의미를 찾으려는 강박일 수도 있겠지만, 허무 가득한 극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질문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같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서사도 없고, 메시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이야기할 거리가 풍부한 연극이다.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조금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기대보다 훨씬 흥미로운 연극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박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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