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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서로 다른 두 작품을 한 자리에서 [진홍빛 소녀, 그리고 잠수괴물]

공연을 보기 전 프리뷰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by 오지영 에디터
2016.01.02 14:55

서로 다른 두 작품을 한 자리에서
진홍빛 소녀, 그리고 잠수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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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일시 : 2016. 01.05 (화) ~ 01.17 (일)
공연시간 : 평일 8시 / 토요일 3시, 7시 / 일요일 3시 (월요일 공연없음)
공연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3관
티켓가격 : 일반 30,000원 , 학생 20,000원
러닝타임 : 135분 (인터미션 15분 포함)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작 : 한민규
연출 : 이지수
출연진
잠수괴물 - 김동찬, 장정학, 김영택, 임요셉
진홍빛소녀 - 신소현, 김형균, 나경민
제작 : 극단 M.Factory
홍보·마케팅 : 한강아트컴퍼니
후원 : 2인극 페스티벌 조직위원회
예매 : 공연예술센터 02-3668-0007 www.koreapac.kr
인터파크, 옥션티켓, 예스24티켓, 대학로티켓닷컴
공연문의 : 한강아트컴퍼니 02-3676-3676, 02-3676-3678

 


2인극 페스티벌에서 검증된 작품, 극단 M.Factory 가 자신있게 선보이는 작품!


뮤지컬로서 2인극 페스티벌 공식참가작으로 첫 선을 보이고 희곡상을 수상한 [잠수괴물], 그리고 2015년 제 15회 2인극 페스티벌에서 작품상 및 연기상을 수상한 [진홍빛 소녀]. 

2인극 페스티벌은 15년 동안 이어져온 대한민국 연극을 대표하는 페스티벌 형식의 연극제이다. 15년이란 기간 동안 200여 개의 다양한 작품들이 선정되었고, 2014년 제14회 2인극 페스티벌에서 [잠수괴물]은 연극적 상황을 음악의 형식적 변환으로 더욱 강화시켰고, 뮤지컬임에도 불구하고 말의 힘을 강화시킨 탄탄한 연극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호평을 받으면서 뮤지컬로서는 이례적으로, 그리고 최초로 2인극 페스티벌 공식참가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잠수괴물]은 연극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 스토리텔링의 역할도 충실히 해낸 작품으로 제14회 2인극 페스티벌에서 희곡상을 수상하였다. 
2015년 제15회 2인극 페스티벌에서는 창작초연작품 [진홍빛 소녀]가 공식참가작으로 선정되어 11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두 남녀의 사랑을 뼈대로 삼아 스릴 있는 사건으로 살을 채운 작가 한민규의 구성력과 장면이 전개될 때마다 하나씩 비밀을 풀어나가듯 밝혀지는 방화사건의 진실, 두 남녀 사이의 관계를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밀도감 있게 풀어간 이지수 연출가의 연출력이 흥미진진했었다는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진홍빛 소녀>는 제15회 2인극페스티벌에서 작품상 및 연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린다. 

하여 극단 M.Factory는 대한민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연극제에서 검증받은 작품인 [잠수괴물]과 [진홍빛 소녀]를 보다 더 많은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장을 만들고자 2016년 1월 5일부터 약 보름동안 대학로예술극장 3관에서 두 작품을 나란히 공연하기로 기획하였다.

 
 
서로 다른 장르의 2개의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 2개의 작품을 연속으로 선보인다 !!


뮤지컬 [잠수괴물]의 러닝타임은 60분, 연극 [진홍빛 소녀]의 러닝타임은 60분이다. 두 작품 모두 2인극 페스티벌 공식참가작으로 선정되어 공연을 올린 작품이기에 본 공연에 있어 이 두 작품을 어떻게 동시에 공연할 지에 대한 고심을 많이 하였다. 이에 따라 내린 결론은 ‘2인극 페스티벌’의 시스템을 유지하여 극단 M.Factory만의 2인극을 나란히 선보이자‘이다. 그 이유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관객들에게 서로 장르마저 다른 강렬한 2인극 작품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강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잠수괴물]은 뮤지컬로 60분간 아버지와 아들이 잠수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생존드라마이며, [진홍빛 소녀]는 스릴러로써 강렬한 연극적 힘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위 2개 작품 모두 ’2인극 페스티벌‘로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2개의 공연을 중간 인터미션 시간에 무대 전환을 함으로써 동시에 선보이는 2인극 페스티벌의 공연 시스템을 계승하여 작품도 알리고 ’2인극 페스티벌‘ 역시도 더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관객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2개의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뮤지컬 잠수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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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베테랑 해군대령 ‘준찬’, 촉망받는 엘리트 해군대위 ‘혁’. 
대한민국 신개념 초고속 소형 잠수정이 개발되어 시범항해라는 대대적인 행사에 이 두 요원이 선발된다. 
두 요원은 부자관계로 알려져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시범항해는 시작된다. 하지만 잠수정 운항 중 뜻밖의 사고로 암초에 부딪치고 좌초되고야 만다. 
이 사고로 갑판이 손상되어 침수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외부와의 연락이 닿는 통신기기부터 모든 것이 작동하지 않는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이곳을 탈출하는 것 뿐. 그 어떤 방법조차 없다. 하지만 탈출장비는 단 하나, 살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서로가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 하지만, 이 둘에게는 말 못 할 비밀이 있었으니...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이들의 목숨을 건 생존경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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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 누구나, 표출하지 못하는 욕망은 있다. 그것을 이성으로 꾹꾹 눌러 버티지만, 욕망을 실현함에 있어서 가장 사람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정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자,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세상으로 어느새 변질이 되어버린 세상의 한 면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뉴스나 신문 등에서 접한다. ‘욕망의 실현’ 앞에서 진정 ‘사람다움’을 포기하고 ‘괴물’로 변질이 된 것이다. 사회가 괴물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면,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다움’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괴물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의 변질된 모습에 본 작품 [잠수괴물]은 ‘그래도 사람이어야 한다.’ 는 메시지를 강렬히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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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적 힘을 강화시킨 드라마틱한 뮤지컬, 
2명의 배우들이 선보이는 폭발하는 에너지!


[잠수괴물]의 뮤지컬넘버는 무엇보다 연극성을 강화시킨 뮤지컬넘버다. 대사와 가사가 서로 난투하듯 치고받는 효과로 강한 에너지상승을 보임은 물론, 쏭쓰루 뮤지컬이나 기존의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는 말의 힘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잠수괴물]이 다른 여타의 뮤지컬 작품과 차별화될 수 있는 특장점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성행하는 뮤지컬은 춤추고 노래하는 흥겨운 뮤지컬적 기능을 주요소로 갖고 가는 경향이 있는데 본 작품의 뮤지컬적 기능은 연극보다 강한 말의 힘에 있다. 즉, 대사로 풀 수 있는 에너지의 한계를 음악이라는 형식적 전환을 통해 그 에너지를 한층 더 강화시켜 극을 보는 내내 2인의 배우의 파워풀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잠수괴물]의 뮤지컬넘버는 플롯의 빠른 전개력을 보이는 드라마틱한 뮤지컬넘버이다. 쇼스타퍼의 기능을 최대한 절제하고, 노래는 오로지 배역의 감정과 플롯의 구조를 따르는 철저한 연극적 뮤지컬넘버의 기능을 한다. 본 작품 [잠수괴물]은 그 동안 뮤지컬에서 연극적 재미를 찾고자 했던 관객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작품이 될 것임을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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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힘을 강화시킨 음악극 [잠수괴물]

 
가장 연극다운 것이 무엇일까? 가장 연극다운 것은 바로 ‘무대에서 펼쳐지는 스토리텔링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라는 말이다. 같은 스토리라 할지언정 영상에서 더 잘 표현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을 굳이 연극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는가?
본 작품 [잠수괴물]은 연극성의 힘을 갖는 위의 요소들을 특화시킨 작품이다. 바로, 무대라는 성격을 특화시킨 ‘공간’의 힘을 갖는 작품이다. 특히, 일생 일대 고대해왔던 꿈의 공간이 죽음의 공간으로 바뀌는 변질의 기능을 갖는 공간의 힘과 고립된 공간과 폐쇄적인 공간으로 하여금 심리적 압박의 기능을 갖는 공간의 힘을 투영시킨 공간성의 힘을 지닌 콘텐츠이다.
오늘날 ‘공연예술’ 의 ‘무대’ 라는 공간의 힘이 점차적으로 퇴색해져 가는 시대에 진정 연극성 짙은 작품들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본 작품 [잠수괴물]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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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도


우리는 살아가며 심심치 않게 뉴스에서 현재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악행에 관한 충격적인 일들을 자주 접한다. 그럴 때마다 한번씩 ‘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라는 말을 자주 내뱉곤 한다. 하지만, 이것을 역으로 분석해보자면, ‘ 사람이기에 가능하다. ’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오늘날 사람들은 법과 사회의 질서,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 등의 제약으로 자연스러운 욕망의 표출을 차단하며 익히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극도의 상황에 빠지면 무의식적으로 꿈꿨던 욕망이 법과 질서 그리고 인식 등을 깨부수고 나올 때가 있다. ‘욕망의 표출’ 이것은 가장 사람다운 것이기도 하다. ‘정도’ 라는 것만 지켜진다면 말이다. 그것을 지켜내지 못 한 사람을 필자는 ‘괴물’ 이라고 말한다.

사람 누구에게나 숨은 괴물 같은 면은 있다. 하지만, 가장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 면은 이성으로 다스려야 한다. 뮤지컬 [잠수괴물]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기다려왔던 꿈이 이뤄지는 공간이 죽음의 공간으로 변질된 순간, 이들은 살기 위해서 어떻게 변할 것인가? 만약, 누군가가 희생해야 살아나갈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 냉정하게 판단하여 삶의 가치를 재서 가치가 더 높은 사람을 살려 보낼 것이냐? 아니면, 살기 위해서라면, 괴물이 되어서라도 타인을 짓밟고 나갈 것이냐? 하는 불편한 질문들을 던진다.
하지만, 이 질문들 속에 필자가 제시하는 궁극적인 메시지가 나오는 부분은, 이러한 선택의 두 갈래를 두고 한 가지를 선택했을 때의 결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이들이 그 선택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서 나온다. [잠수괴물]은 표면적으로 생존의 욕망을 그린 작품이지만, 그 안에는 진정 사람답게 살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을 그린 작품이다.


연출의도


[잠수괴물]의 가장 큰 매력은 죽음에 대한 선택을 통해 살아온 삶에 대한 증명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아이러니에 있다. 더구나 그 결정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누가 감히 선뜻 자신이 죽겠다고 나설 것인가. 설혹 작정을 했더라도 죽음의 순간이 되었을 때 후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엄마가 아들 녀석에게 "엄마와 여자 친구가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 것이냐"는 우스개 물음이 더 이상 곤란함으로 여길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구조적인 결함의 적폐로 정말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세계가 되었다. 말 그대로 세상이 괴물로 바뀌었다. 구조(system) 뿐만 아니다. 심지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남이 아니라 부모를 해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이혼해서 이미 돌보지 않았던 아들, 딸의 사망 보험금을 태연히 요구하는 괴물이 "인간은 원래 그래"라고 하기엔 너무 많아졌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경우라 치부하기에 전세계적으로 사건 사고 소식이 너무 많다. 전래 동화와 이솝 우화를 통해 선함과 악함의 구분, 배려와 양보의 순간, 고집과 희생의 선택 결정에 균형감을 갖출 법하건만 꽤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고백>을 통해 눈을 떴고, 그러면서도 나 역시 어리석은 행동과 못된 짓을 반복했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 기준은 물론 나 아닌 각 개인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않나. 특히 대한민국은 아들이 살아야 하는 세상에 아버지가 살려고 덤비는 형국이 되었다. [잠수괴물]은 이런 세계에 대해 피하고 싶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연극 진홍빛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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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15년 전 51명의 사상자를 낸 방화사건의 공범자였던 ‘혁’은 자신의 죄는 밝혀지지 않은 채 단란한 가정에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평온히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15년 전의 방화사건의 공범자였던 무기징역수 ‘은진’ 이 귀휴 중에 자신의 집에 찾아든다. 은진은 15년 전의 사건에 있어서 혁이 자백하지 않으면 그의 아이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지만 혁은 기억이 남에도 불구하고 죄를 말하지 않고 도리어 은진을 제압하려고 하나 자신이 다치고야 만다. 혁이 다시 깨어났을 때 그의 몸은 결박되어 있고 은진은 혁의 죄를 심문하기 시작한다. 혁과 은진의 15년만의 뜻밖의 만남으로 예전 고아원에서 지냈던 끔찍한 악몽이 다시 펼쳐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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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도


현 사회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것은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밝혀지지도 않은 채 제도 안에 탈바꿈되어 전혀 다른 기록으로 기록될 뿐이다. 본 작품에는 이러한 사회로부터 희생당한 아이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이 진실을 방관하며 다른 삶을 택하는 것의 선택권이 주어졌고 다른 한명은 그 제도 안에서 지내는 것 외에 선택권이 없는 삶을 부여받았다. 여기서 이 주인공 둘이 겪는 사회라는 것은 모두 다 선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안의 진실은 인간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악’ 이 공존하는 형태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본 작품의 주인공인 ‘혁’과 ‘은진’은 희생양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둘은 또 다른 ‘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회는 이 둘의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고 이 둘의 괴물 같은 면만을 역사적 기록으로 삼는 지경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죄를 짓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지점이다. 방관 또한 죄가 되고 심판 또한 죄가 된다면, 근원적 문제는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의 환경으로부터? 아니면 환경을 벗어나 자신의 선택으로부터? 선택권마저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어느 부분을 문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을 본 작품 <진홍빛 소녀>로 던져보며 그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여지를 세상에 남겨주려 한다.


작가의도

‘ 내가 원하는 이야기에서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까지. ’

희곡을 처음으로 썼던 1999년. 그 때 당시 나의 글을 봐주었던 문학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꾸미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글이 강점이라고. 하지만... 사회에 나와 당선을 노리며 썼던 글들은 엄연한 스토리텔링 공식 위주의 글쓰기였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이냐,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이냐를 어느 순간부터 심도 깊게 고민하고 내가 원하는 이야기보다는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었다. 이러한 고민을 풀기 위해 학교도 수없이 다녔고 대학원을 졸업해서 다시 학부로 가서 새로운 전공에 입문하는 등 연극, 극작, 문학 등 배움에 미쳐서 대학교, 대학원 졸업장을 네 개나 따는 과정 동안에도 이러한 고민은 늘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를 거듭하고 나서 우연치 않게... 정말이지 우연치 않게... 길을 지나가다가 불이 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구조대원이 오기까지 사람들은 구경에 구경만을 일삼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사고현장을 찍기 바쁘더라. 안에 ‘사람이 갇혀있다’는 말들이 혼란스럽게 오고 갈 지경에 마치 구경거리가 생긴 마냥 보는 사람들, 걱정하며 보는 사람들, 그저 방관하며 지나치는 사람들... 등 한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보였다. 결론적으로 구조대원들이 오기까지 나부터 나서서 화염 속으로 뚫고 들어가려고 시도해본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도 그저 마음을 졸이며 구조대원들에게 연락하고 빨리 구조해달라는 말뿐이었다. 나 스스로 그들이 오기까지 화염 속으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인가... 지금도 이 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비겁한 나의 변명에 나를 욕할 뿐이다. 골든타임이라는 시간은 늘 존재한다. 그 시간 안에 구조대원이 항상 도착하리라는 법은 없다. 이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묵묵히 방관하기에 바쁘다. 

지금도 각종 SNS를 보면 타인들의 사고 현장이나 범죄현장 등 비인간적인 현장들을 찍은 동영상들이 즐비 한다. ‘그럴 시간에 말리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과연 그것이 내 세계관 안에서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 또한 든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세계관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였다. ‘방관도 죄가 된다.’, ‘방관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나약함’,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방관이라는 죄를 짓는 것이라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것 등의 온갖 날 것 그대로의 주제의식으로 무장된 내 손이 머리보다 말보다 컴퓨터 키보드를 먼저 두들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보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문학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던 날 것 그대로의 글들이 다시 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을 완고했을 때 난 ‘내가 원하는 이야기’ 라고 생각했지만 이지수 연출님께서는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 로 바라보았다. 본 작품이 바로 [진홍빛 소녀]이다. 이렇듯 이지수 연출님과 하형주 드라마트루기 선생님은 ‘내가 원하는 이야기’에서 시작된 [진홍빛 소녀]를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로의 접점을 만들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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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의 글


돌이켜 보면 상념에 빠지는 재주 말고 무엇 하나 번듯하게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들과 선후배들을 만나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기도 하고, 심지어 무대를 연출하기도 한다. 불혹을 몇 해 전에 넘긴 만큼 이제는 무엇 하나라도 잘 할 법하건만 아직도 이것저것 너무 서투르다. 하고픈 이야기는 많은데 말재주가 미숙하고, 보여주고픈 무대는 많은데 감각이 모자란 채 여전히 욕심만 앞선다. 한민규 작가가 남녀 치정에 관한 이야기를 가져왔다. 좀 더 들여다보니 남녀의 사랑과 복수가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기대하고 원망하는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말이 끝없이 던져지는 것을 보면 인간과 행복의 조합은 불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번지르르한 말이 무색하게 너무나 살풍경한 사회다. 유신을 거론하기에는 어리지만 계엄령과 통금은 한동안 겪었다. 2015년 세계 자본의 계엄령은 너무나 정교하여 이제는 누가 명령하고 누가 당하는지 구분도 어렵다. 종교건 문화건 국가건 일단 내 편이 아니면 적군이라 생각하는 것이 만사형통이다. 코앞의 생활도 간당간당 하다 보니 내 가족의 사고만 아니면 안심이 앞선다. D그룹을 대놓고 타박하려니 내가 덕을 받고 있고, 한잔 술에 위로를 받고자 하니 이것도 L그룹이란다. 가타부타 불평 없이 속 편하게 땅 일궈서 내가 먹을 것 내가 챙기려고 했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니 모두 빌리는 거다. 지구에게, 자연에게, 다른 생명체에게, 그리고 선대 모든 인간인 선배들에게. 그렇다보니 차라리 빠지는 게 낫건만 용기도 부족하고 미련도 많다. 이왕 온 거 좀 더 즐겁게 있다가 가고 싶은. 그래서 끝까지 말을 건넨다. '인간답게'라는 화두의 결말은 모르겠다. 그저 나 역시 부족한 게 많지만 공연이라는 이야기 창구를 통해서 이미 지구는 벤츠를 타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공연을 보기 전 프리뷰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전 참 괜찮은 연극을 보았지만,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
공연 그대로 보는 것도 좋지만, 
미리 줄거리와 내용을 알고 본다면 더욱 공연을 이해하기 싶고 풍성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공연이 기대되는 점은 두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초점으로 맞추는 연극이라서 
어려울 듯하면서 괜찮은 공연을 보러 갈 생각에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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