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작은 미술관] 입체표지.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6/20260609015844_yyvzddaw.jpg)
짧지만 프랑스에서 생활을 해본 기억을 상기시켜 보자면 학생의 신분으로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미술관 만한 곳이 없었다.
프랑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입장을 허용하는 미술관이 많았기 때문에 항상 돈이 궁했던 학생의 처지에 이만한 여가가 없었다. 유명한 루브르, 오랑주리, 오르세를 가보니 다른 미술관에도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비록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진 않았지만 대단한 예술가가 남긴 역사적 작품을 보고 감탄하는 것만큼은 잘할 수 있었다.
파리 곳곳에 숨겨진 작은 미술관을 찾아갈 때마다 좋았던 점 중 하나는 평소라면 갈 일이 없었던 동네를 방문해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파리 안에서 또 다른 여행을 하는 셈이다. 조용한 주말 아침에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고요한 주택가 거리를 걸으면서 오래된 빌라 창가에 걸려진 화분과 상점을 구경했다.
특히나 새로운 동네를 방문할 때마다 꼭 동네 빵집에서 크루아상을 사 먹곤 했는데 정말 맛있는 크루아상을 발견할 때마다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크기변환]KakaoTalk_20260609_020136288.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6/20260609020545_ratwfmpl.jpg)
《파리의 작은 미술관》은 미술 작품에 대해서 기법과 사조를 파헤치던 감상자들에게 신선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루브르나 오르세처럼 거대한 시대적 서사를 나열하는 메가 미술관을 벗어나, 거장들의 삶과 시간이 짙게 농축된 파리 골목길의 작은 공간들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동안 미술관을 방문할 때면 '무엇이 전시되어 있는가'에만 몰두했지, '이 미술관은 왜 여기에,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가'라는 건립의 역사에는 무지했음을 고백하게 된다.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흔적이 만든 이 작은 미술관들의 탄생 비화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틱한 예술사다.
저자는 단순히 벽에 걸린 그림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술관으로 향하는 파리의 지하철역 이름, 이정표의 속뜻, 골목길의 역사적 유래까지 세밀하게 짚어낸다. 이 친절한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어린 시절 주변 지명의 유래를 궁금해하며 호기심을 반짝이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성인이 되며 너무나 당연하게 지나치던 일상의 명칭들을 다시금 읽어내고 싶어지는 전이 현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동시에 수백 년 전 예술가들이 고뇌하던 방과 정원, 심지어 자코메티의 작업실 속 사소한 먼지 하나까지 그대로 박제하여 보존해 낸 프랑스의 문화적 끈기에 깊은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급격한 도시 개발과 재건축, 가슴 아픈 전쟁의 역사 속에서 부모님의 유년 시절 흔적조차 쉽게 찾기 힘든 우리의 도시 환경과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축적된 시간을 부수지 않고 서사로 이어 붙이는 공간이 존재하기에, 파리는 여전히 예술가들의 유령이 살아 숨 쉬는 도시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일화는 깊은 사유의 거리를 던진다.
만약 장식을 배제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한 '살기 위한 기계로서의 집'을 주장했던 그의 과격한 파리 재개발 계획이 당대에 그대로 실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우리는 몽마르트르의 마지막 포도밭도, 들라크루아가 숨 거두기 직전까지 거닐던 퓌르스탕베르가의 골목길도 모두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다행히 파리는 거장들의 흔적을 지우는 대신 남겨두었고, 김정화 저자는 그 남겨진 공간들을 훌륭한 텍스트로 번역해 냈다. 피카소의 말처럼 예술은 일상의 먼지를 씻어내는 것이며, 자코메티의 독백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걸어가야 하는 운명이라면, 이 책은 캔버스라는 좁은 틀에 갇혀 있던 거장들을 다시 파리의 살아있는 골목길로 걸어 나오게 만든다.
작품을 '보는' 1차원적 관람을 넘어, 공간과 도시를 '읽는' 입체적인 예술 산책을 경험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