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세상과 단절하고 싶은 날. '번아웃'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이런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발비용'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돈. 특히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버는 만큼 쓰게 된다는 것이 일종의 정설처럼 통용되곤 한다. 나의 20대 초반 역시 그랬다. 일하며 버는 족족 돈을 써버렸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일명 '예쁜 쓰레기'라 불리는 것들을 사는 데 집중했다. 실용성보다는 당장의 스트레스 해소가 우선이었다.
그러다 20대 중후반에 접어들며 변화가 찾아왔다. 예쁜 쓰레기를 사는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결혼 소식은 삶의 궤적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그렇다고 시발비용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향'이 달라졌다. 쓸데없는 물건을 사는 대신, 지금의 나는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는 쪽으로 삶의 키를 틀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더 많이", "더 빨리"를 미덕이라 속삭인다. 하지만 때로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면의 행복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그 속도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번 주 금요일, 퇴근 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졌다. 업무가 쌓이거나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면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목적지 없이 걷는다. 걷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이 비워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사실 이 글의 소재도 길 위에서 떠올린 것들이다.
이러한 '느림'의 효용은 학술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다. 심리학에서는 시간적 여유를 느낄 때 행복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시간적 풍요감(Time Affluence)'이라 설명한다. 의도적인 휴식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춰주며, 자연 속을 거니는 행위가 뇌의 인지 기능을 회복시킨다는 '주의 회복 이론(ART)'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결코 낭비가 아님을 뒷받침한다.
취향의 변화도 뒤따랐다. 20대 초반에는 도파민이 터지는 자극적인 콘텐츠만이 문화를 폭넓게 즐기는 길이라 믿었고, 잔잔한 것은 지루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숙면을 위해 OTT에서 《리틀 포레스트》나 《카모메 식당》 같은 일상적인 작품을 즐겨 본다. 자극적인 것과 잔잔한 것, 두 세계 모두 나름의 결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결국 내가 무엇을 추구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최근 <대중문화의 이해> 수업에서 교수님은 현대의 예술과 콘텐츠가 이미 나올 것은 다 나왔으며, 현재는 기존의 것들을 조금씩 변주하는 시대라고 말씀하셨다. 방대한 역사와 문화 데이터가 축적된 오늘날, AI는 그 데이터를 학습해 거장의 화풍을 모방한 이미지를 순식간에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더 자극적이고 새로운 것만을 좇아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결국 본질은 내가 무엇을 지향하느냐는 '추구미'와 '가치관'으로 귀결된다. 쏟아지는 정보와 자극 속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골라내는 힘, 그것이 바로 슬로우 라이프가 아닐까?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내 삶의 주권을 조용히 되찾는 일 말이다.

최온유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하지만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다면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거라느껴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휩쓸리지 않는 삶의 첫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외부의 속도나 기준에 밀려가기보다 조금씩 자기 삶의 중심을 되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아무 조건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경쟁력이 있는 일(대게 자본주의의 속도에 발 맞추거나 가속화 하는 일) 사이에서 아직은 어떤 것도 완전히 포기가 안되더라구요.
좀 더 어릴 때는 하고 싶은 일의 일인자가 되는 것이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방법이라 믿었는데, 결국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한 요즘입니다!
온유님의 슬로우 라이프를 응원합니다.
저도 결국 “한쪽을 완전히 선택해야만 한다”기보다는, 그 사이에서 계속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 더 가까운 것 같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완전히 답을 내리기보다, 흔들리는 상태 자체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럼에도 그런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저도 기계적으로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느리게 걷는 힘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돈을 벌고 바쁘게 사는 것도 물론 좋지만,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아야 그것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또, 그런 슬로우 라이프를 삶의 태도뿐 아니라 예술 작품들을 탐색할 때도 적용해보자고 말씀해주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최근에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늘어나는 게 우려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이 쓸려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만의 취향을 천천히 더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슬로우 라이프를 기원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무작정 소비하거나 자극적인 것들만 찾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걷거나, 조용한 영화와 콘텐츠를 보면서 제 속도를 찾으려고 하고 있어요.
말씀처럼 남들이 정해놓은 빠른 흐름에 휩쓸리기보다, 각자의 취향과 가치관을 천천히 알아가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오래 지치지 않는 슬로우 라이프를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
더군다나 요즘 퇴사를 앞두고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라, 전 뭘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막막한 요즘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체제를 바꿀 수 없다면 그 안에서 잘 타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요즘의 생각이지만, 요즘의 사회는 너무 더 많은 것을 요하고 끝없이 요구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은 분명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화이팅해보아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느꼈지만, 인문학을 안다고 해서 곧바로 주권적인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특히 퇴사와 이직을 고민하는 시기에는 누구나 방향을 잃은 기분이 드는 것 같고요. 말씀처럼 결국 자본주의 사회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안에서 나만의 속도와 기준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계속 고민하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사람이라면 분명 자기만의 방향을 찾게 될 거라 믿어요. 함께 천천히 가보아요, 화이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