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저녁, 개기일식을 기다리는 공연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경험이었다. 60분 동안 무언가를 ‘보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물렀지만, 끝내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앞에서 흘러간 시간이었다. 극단 음이온의 〈개기일식 기다리기〉는 그렇게, 관측보다 먼저 도래하는 감각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공연이었다.
이 공연에는 분명한 무대가 없다. 관객과 배우는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공간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개기일식에 대한 중계를 하는 배우가 있고, 그것을 카메라로 송출하는 배우가 있다. 그저 조용히 현상을 기다리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주변의 소음이나 갑작스러운 실수를 처리하는 배우도 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관객이 있다. 이 공연에서 모두는 ‘보는 사람’이자 동시에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개기일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리는 순간의 공유다. 소음과 침묵이 번갈아가며 공간을 채우고, 집중과 이탈이 반복된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다린다. 실시간 뉴스 중계를 틀어놓고 기다리는 사람, 과거의 관측 경험을 떠올리며 기다리는 사람, 아무 말 없이 같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같은 것을 함께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 형성되는 묘한 연대감이 그 자리에 생겨난다.
나는 그동안 늘 현상을 보기 위해 기다려왔다. 기다림은 결과를 위한 부차적인 단계였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공연을 통해 다시 마주한 것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금까지 내가 지나온 수많은 시간 중, 무의식에 더 깊게 남아 있는 것은 관측의 장면이 아니라 기다림의 순간들이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기다림을 통과해온 사람이었고, 그 감각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기다림의 순간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내가 관측하는 현상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기다림의 과정 자체가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언제나 무언가에 의해 침범된다. 뉴스 중계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거나, 통제할 수 없는 주변 소음에 주의가 흐트러지거나, 기다림의 의미를 무력화할 만큼 더 중요한 사건이 눈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순간에 오직 ‘기다림’에만 몰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오히려 이 경험을 더 솔직하게 만든다.
문득 예전에 보았던 미국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대기줄을 구상하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줄 서는 걸 누가 좋아해?" 그 말처럼, 기다림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내심을 동원해 시간을 견디고, 때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카운트다운을 바라본다. 나는 무엇을 보기 위해 이렇게 오래 기다리고 있는가. 현상을 관측하는 경험과 기다림의 경험은 정말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마침내 약속된 60분이 지나고, 모두는 한 공간에서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숫자가 줄어들수록 고조되던 목소리는 개기일식의 출현과 함께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그 순간, 완전한 침묵이 도래한다. 뉴스의 음성도, 숨소리도, 일상의 소음도 멎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하나의 현상에 몰입하는 그 짧은 순간은, 어떤 장엄한 이미지보다도 강렬했다. 대화 없이도, 설명 없이도, 함께 기다리고 함께 바라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또렷하게 남았다.
<개기일식 기다리기> 는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기다림의 순간을 다시 호출하는 공연이었다. 이 경험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뜻밖에도 반가움이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관측할 때마다 이미 기다림을 수행하고 있다. 기다림 없는 관측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공연은 개기일식을 보여주기보다, 그 사실을 몸으로 납득하게 만든다.
결국 나는 이 공연에서 개기일식을 본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