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
이는 스페인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거장이 남긴 희곡의 제목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결코 상호작용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상호작용에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역할이다. 사람들은 각자가 맡은 역할 수행을 통해 자신의 삶과 존재를 증명해내고자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모든 것은 언젠가 죽기 때문이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도 존재한다는 것만을 분명히 알 뿐이다. 예정된 끝 앞에서 무엇을 동력으로 삼고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누군가는 후손, 누군가는 명예 그리고 누군가는 예술을 선택한다.
예술과 삶을 분리하지 못하는 어느 예술가가 있다. 그가 예술을 하는 이유는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서 혹은 현재 자신을 둘러싼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그렇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무대 위에서 수십 번 수백 번을 죽는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잠자코 그 죽음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그 죽음은 왜 일어나고 왜 목격되어야 하는가?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가부키를 통해 삶과 예술의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영화는 장정 3시간에 걸쳐 삶을 통해 예술을 설명하기도 하고 예술을 통해 삶을 설명하기도 한다. 재능과 피, 세습이라는 부조리를 떠안은 인물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맡아야만 하는 역할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오로지 죽기 전 남길 무언가를 위해서.
가부키와 역할 세습

<국보>의 세계는 세습을 통한 수미상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들은 무대 위 뿐만 아니라 무대 바깥에서도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가부키를 한다. 그러한 역할은 세습을 통해 주어진다. 세상이라는 연극 속에서 배역들은 항상 부조리에 직면한다. 그리고 가부키가 주는 부조리는 바로 피와 재능이다.
영화에서 다루는 예술가들은 모두 공통된 인물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세계관은 극단적으로 폐쇄적이며, 삶과 예술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이는 가족과 예술가 사이의 역할 갈등을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키쿠오는 예술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가족 역할을 상실해간다. 그의 등에 새겨진 문신은 복수에 대한 집착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온나가타의 몸을 훼손해 예술적 역할을 방해한다. 슌스케와 하나이 한지로의 관계 또한 동일한 구조를 반복한다. 그들은 모두 ‘무대 바깥의 삶’과 ‘무대 위의 역할’ 사이에서 균열을 겪는다.
영화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역할 세습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족 간 세습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가의 세습이다. 혈연 중심으로 계보를 잇는 가부키지만 키쿠오의 경우처럼 예술가의 세습 또한 따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앞서 말한 피, 재능이라는 부조리와 각각 대응되기도 한다.
<국보>에서는 혈연으로 이어지는 전통성과 세습체계까지 가부키의 미학으로 포함시킨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혈연을 통해 부여받는 역할은 무엇보다도 가장 분명한 증명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하나이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는 하나이 한야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키쿠오가 하나이 토이치로라는 이름을 받았음에도 대중에게 쉽게 인정받지 못한 이유 또한 가족 세습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종국에 인간국보가 되며, 오노가와 만키쿠가 맡던 예술가 역할을 물려받는다.<국보> 속 관객과 예술가 간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고 거리도 매우 멀다. 관객은 예술가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영화 속 예술가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은 분명하다. 온나가타는 무대 위에서 정해진 극본, 감정, 신체만을 사용해야 한다. 또한 무대 바깥에서의 사랑은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인정하는 재능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영화 속 예술가들은 역할 갈등을 필연적으로 겪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하나이 한지로의 행적이 특히 두드러진다. 그는 슌스케와의 관계를 끝내 개선하지 못했으며 백호라는 이름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는 예술가와 아버지로서의 역할 수행 모두 실패한 인물이다. 반면 슌스케는 하나이 한야라는 이름을 받으며 하나이 한지로를 세습하고, 키쿠오도 오노가와 만키쿠의 세습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 구도는 역할을 통해 의미부여되는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허나 이것이 단순한 대체에 불과하며 무의미하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국보>에서 묘사되는 관객은 예술가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예술가가 수행해야 하는 것 또한 정해져 있다. 그것은 바로 대리 죽음이다. 예술가는 곧 관객이 원하는 죽음을 대신 겪어야 하는 인물인 것이다.
무대 위 펼쳐지는 예술가의 무수한 죽음 의식
<국보>에 등장하는 가부키극은 유독 죽음으로 끝맺는 것이 많다. 관객은 무대 위 온나가쿠가 죽는 순간에 가장 깊이 몰입한다. 모두가 바라보는 무대 위, 키쿠오는 성공적으로 죽음으로써 하나이 토이치로라는 새로운 역할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수많은 관객들을 대신해서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연기해야 했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 속 온나가타는 장송 의례를 진행하는 제사장 또는 죽음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키쿠오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 키쿠오의 도처에는 늘 죽음이 있었다.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잃고 그의 원수를 갚는 것을 실패한 순간부터 삶의 의미는 가부키로 옮겨졌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마저 배우지 못한 그는 삶에 대한 애착보다도 죽음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한 인물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삶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키쿠오가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영화는 슌스케의 죽음을 통해 미리 단서를 준다. 슌스케는 키쿠오가 지독하게 갈망하는 피를 잇고 태어났으나, 그것은 유전병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전에 그의 아버지가 불명예스럽게 죽은 것과 달리 그는 무대 위에서 끝까지 버티며 자신의 마지막 공연이자 장례식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렇기에 그는 예술가의 역할을 홀가분하게 그만둘 수 있었고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보>의 예술가들은 모두 예술을 통해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죽음을 갈망한다. 죽음에 기꺼이 자신의 예술을 바친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과연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동시에 삶의 애착이라 볼 수도 있다.
모든 죽음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예술에서 재현되는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국보>의 가부키에서 재현되는 죽음만큼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왜 관객들은 이 죽음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는가? 이는 예술의 제의적인 성격과도 맞닿아 있다. 고대의 예술가는 죽음이나 영혼, 감정 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신 통과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개자,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러한 면모는 <국보> 속 온나가타의 죽음 재현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무대 바깥의 죽음과 무대 위의 죽음은 명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세상의 죽음은 언제나 돌발적이고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포를 남긴다. 그러나 무대 위의 죽음은 다르다. 그 죽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선택이 있으며, 이야기의 원인이 있고, 정해진 결말이 있다.
가부키의 무대는 죽음이라는 압도적인 사건을 통제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한다. 아무도 자신의 마지막이 어떠할지 알 수 없는 현실과 달리, 무대 위의 죽음에는 헛된 죽음이란 것이 없다. 그 죽음은 우연히 발견되지 않으며, 누구도 모르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가 지켜보며, 그것은 반드시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관객은 이 죽음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이는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선다. 영화가 보여주는 온나가타의 죽음은 일종의 제의적 실천이다. 그들은 관객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죽음의 공포, 삶의 불확실성, 마지막 순간을 정의할 수 없다는 근원적인 불안을 대신 짊어진다. 예술가는 관객의 시선 속에서 타자화된다.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죽음을 연기하는 존재’로 호명되며, 관객은 그 대리 죽음을 통해 비로소 안도한다.
영화는 이 둘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예술은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못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의례라는 것이다. 잘 죽을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 끝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정해진 마지막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예술을 통해 잠시나마 의미를 부여받는다. 관객은 온나가타가 연기하는 수많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포를 진정시키고, 그 죽음 하나하나에 부여된 서사와 의미를 빌려 삶을 다시 견딜 힘을 얻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키쿠오가 바라본 풍경은, 그의 삶을 지배해온 죽음의 의미가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는 수많은 대리 죽음을 연기해온 끝에,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국보>는 그 장면을 통해 말한다. 어떤 예술가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코 얻을 수 없는 ‘완성된 죽음’의 형식을 대신 보여주는 의례이기도 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