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나서 그대로 죽은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이곳은 내가 읽었던 소설 속 세계?!
흔한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시작 문장이다. 이제는 웹소설의 주류 장르가 되어버린 로맨스 판타지, 일명 '로판'은 탄탄한 마니아층을 기반으로 점점 그 규모가 성장하는 중이다. 일본의 소설 장르 중 하나인 라노벨에서 주로 사용되는 제목 형식은 이제 로판의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로판은 진입 장벽이 다소 높은 장르 중 하나이다. 공작, 백작, 자작 등 대한민국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작위 체계부터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회귀'는 대체 무엇이며 판타지 장르와의 차이점은 또 무엇인지. 대부분의 로판은 중세~근대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렇다면 그 시기의 유럽 문화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지 더 몰입이 되는 건가? 제목에서부터 진입에 어려움을 느꼈던 독자들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 하나로 로판 입문은 완벽하게 끝낼 수 있다.
언제 이세계에 떨어질 지 모르는 당신! 철저한 대비를 해둔다면 로판에 문외한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작, 백작, 자작... 이게 다 뭐지?
즐겨 읽던 소설 속 엑스트라 중 엑스트라에 빙의했다.
훗날 나를 살해하는 자작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나는 공작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되는데....
로맨스 판타지의 클리셰 중 하나인 '빙의물'의 흔한 도입부이다. 그러나 로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자작과의 결혼을 피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왜 공작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거지? 자작과 공작의 차이점은 뭐지?
전에 비해 대중화 된 로판 덕에 공작이 가장 높은 작위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건너건너 '공작이 가장 높대.'를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래의 작위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 주인공은 일단 가장 세야 되니까 공작 혹은 황실 일원 중 한 명을 맡는 게 클리셰로 자리 잡아버렸지만, 요즘은 엑스트라에게 빙의하거나 환생하는 로판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추세이다.
로판 속 귀족 작위는 주로 오등작에 기본을 두고 있다. 간혹 오등작 대신 그저 힘이 센 가문, 힘이 약한 가문 정도로 나누는 로판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오등작을 차용하는 게 훨씬 흔하다. 오등작은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순서로 로판에서 등장하는 오등작과 실제 유럽에서 사용되었던 작위에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오등작의 기원은 한자문화권으로, 본래 유럽과 한자문화권의 오등작은 상호연관성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며 유럽의 칭호를 한자문화권에 맞게 번역하는 과정에서 서양식 작위를 동양식 오등작에 끼워맞추게 되었고, 이게 굳어져서 현재 웹소설 문화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근대식 중앙집권 구조와 중세식 지방분권을 모두 충족시키는 로맨스 판타지의 기묘한 세계관 배경으로 작위 또한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지키지 않은 작품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픽션은 픽션인 데 다 이유가 있고, 이 모든 것이 클리셰로 굳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작품 몰입을 과하게 망치지 않는 선, 그리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글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개인의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하려는 게 아닌 웹소설을 보려는 것이니까.
이렇듯 중세와 근대가 마구 섞였지만 서양사를 훤히 꿰뚫고 있는 역사 덕후가 아닌 이상 한 작품의 세계관적 배경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데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 때로는 과하게 치밀한 배경과 고증이 작품에 대한 몰입을 망치기도 한다는 점을 보면, 오히려 마구 혼합된 소설적 허용이 우리에게 더 잘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간혹 철저한 시대적 고증을 지킨 작품도 등장한다.
『이번 생은 가주가 되겠습니다』는 13~16세기의 중세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고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해당 웹소설의 표지와 이 작품을 웹툰화 한 동명의 웹툰을 보면 등장 인물의 의복은 르네상스 시대의 의복과 장신구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오등작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점 등에서 해당 시기의 고증을 지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명화를 찾아보면 해당 작품이 철저하게 13~16세기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 역시 중세 유럽을 잘 표현했다. 특히 중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해당 작품은 등장인물의 이름까지도 모두 중세 이탈리아 식으로 지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와 중세가 혼합된 로판식 유럽이 아닌, 중세 유럽을 제대로 실감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두 작품을 추천한다.
로판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은 서양의 근대 초기~중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작품 내 등장하는 리볼버, 석유 회사, 철도 개통 등을 통해 19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한 것을 추측할 수가 있다. 중세 유럽을 모방하여 중세와 근대가 섞인 로판식 유럽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19세기 중반을 제대로 재현한 작품으로, 로판 입문작으로 가장 많이 추천되는 작품이다.
회빙환의 법칙
공급이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일어나고 있는 장르이지만, 공식처럼 굳어져서 이제는 빠지면 섭섭한 장치가 있다. 바로 '회빙환'이다. '회빙환'은 로판에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회귀, 빙의, 그리고 환생을 합친 단어이다. 회빙환이 없으면 작품이 시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로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말 그래도 공식과도 같은 요소이다. 오등작은 빠져도 회빙환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만큼 이제 로판 하면 회빙환, 회빙환 하면 로판이 되었다. 물론 이 회빙환 없이도 전개되는 작품이 존재하지만, 그 비중은 극소수로 어쩌면 오등작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 회빙환이다.
회귀의 사전적 정의는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으로, 쉽게 말하자면 시간 여행이다. 눈을 떴더니 10년 전으로 돌아갔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로 돌아왔다 등이 모두 회귀에 포함된다. 회귀를 겪은 주인공은 미래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이용하여 큰 돈을 벌기도 하고 위험에서 벗어나기도 하며, 인생 자체를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 경우에는 어떤 유명 추리 만화가 생각나는 묘사가 종종 등장한다. 몸은 작아졌어도 두뇌는 그대로. 정신은 회귀하기 전 나이이지만 몸만 어려진 탓에 나오는 개그신 역시 회귀물과 뗄 수 없는 연출이 되었다.
회귀를 한 주인공은 대부분 불우한 인생을 보내다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인해 과거로 돌아오게 되는데, 당연히 이렇게 돌아온 주인공은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육아물과 가족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복수를 다짐하며 우리에게 사이다를 선사할 때도 있고, 힐링을 주는 육아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또는 지키고 싶었던 무언가를 지키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에 셋 중 가장 자주 쓰이는 소재이자 빙의 또는 환생과 엮이며 함께 쓰이기도 하는 만능 장치인 것이다.
빙의는 말 그대로 특정 인물에게 빙의하는 유형이다. 99.9%의 주인공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사고 혹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즐겨 읽던 소설 속으로 빙의하게 되고, 빙의하는 인물에 따라 이야기의 전개가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회귀와 비등하게 사용되는 장치이다. 회귀가 몸과 정신의 불일치로 소소한 웃음거리를 준다면, 빙의는 현대 대한민국의 사고와 그렇지 못한 중세-근대 유럽 배경으로 우리에게 웃음을 준다.
주인공은 현대 대한민국의 지식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사업을 진행하며 큰 돈을 버는 것이 주로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또한 회귀와 환생과는 달리 원작이 존재한다. 소설 속에 빙의한 이야기를 소설로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소설 속 소설로, 대부분 '원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복잡한 빙의가 얽혀있는 작품에서는 원작과 우리가 읽는 작품의 구별이 중요하며, 대체적으로 별도의 제목을 갖고 있다.
주인공이 주로 빙의하는 인물은 소설의 악녀와 엑스트라이다. 악녀에 빙의한 주인공은 또 다시 두 갈래의 길로 나눠진다. 원래부터 악녀가 원작 속 최애라서 악녀의 얼굴로 마음껏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경우와 악녀에 빙의했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최선을 다해 기존 악녀가 부린 악행을 수습하여 개과천선하는 유형이다. 전자의 경우, 의도치 않게 본래 악녀의 행동보다 착하게(?) 행동하는 탓에 자연스레 후자로 향하는 경우도 있고, 원작 악녀에 대한 모든 것이 오해이며 철저하게 원작 여주인공의 시점에서 쓰여진 이유로 원작 악녀가 되려 피해자가 된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원작 여주인공이 본작의 빌런으로 나오는 것이 상당수이다. 각 유형별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악녀가 사랑할 때』, 『신데렐라를 곱게 키웠습니다』, 『악녀라서 편하고 좋은데요?』, 그리고 『흔한 빙의물인 줄 알았다』가 있다.
악녀 빙의물과 쌍두마차 수준으로 인기가 있는 것은 엑스트라 빙의물이다. 주인공은 원작 속 이름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로 빙의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러나 엑스트라도 귀족은 귀족, 현대 대한민국보다 훨씬 부유하고 여유로운 상황을 즐기며 원작 주인공들과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엮이고 마는 경우가 가장 대중적이다. 만약 이야기 전개를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엑스트라라면, 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역시 클리셰로 자리 잡은 전개이다. 또는 아예 원작 속 인물들을 덕질하며 철저하게 원작과 본인을 분리했다가, 결국 원작 주인공들과 진하게 엮이면서 이 세계는 더 이상 소설 속이 아닌 나에게 실존하는 현실 세계라는 걸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각각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 『구경하는 들러리양』이 있다.
마지막으로 환생은 단독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회귀 혹은 빙의와 함께 묶여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죽은 후 즐겨 읽던 소설 속으로 환생했다면 빙의와 환생이 결합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세계에서 환생했는데, 이 세계에서 다시 어려졌다면 환생과 회귀가 합쳐진 유형이다. 아무래도 그 특징이 명확한 회귀와 빙의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애매한 기준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각각 『아빠가 힘을 숨김』과 『이번 생엔 가주가 되겠습니다』가 있다.
단독으로 환생만을 다루는 작품도 존재한다. 이럴 경우 주인공은 보통 수많은 환생을 통해 이미 삶에 미련을 버린지 오래라는 설정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마지막 삶이 될 수도 있는 이번 생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거나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이럴 경우 보통 초반부는 암울한 분위기로 이어지지만, 곧 주변 사람들의 사랑으로 인해 밝아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인공이 타인을 구원하지만 역으로 주인공이 구원받는 입장이 되는 작품이다. 『사랑받는 막내는 처음이라』가 여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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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에는 수많은 하위 장르가 존재하고 서로 넘나들기도 하면서 특정 작품을 하나의 장르로 규정짓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 회빙환이 서로 결합되는 것은 물론, 수많은 공급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형태는 이제 흔히 보이는 유형이다. 복수를 꿈꾸던 주인공이 가족의 사랑으로 인해 구원 받는 복수물과 육아물이 합쳐진 형태, 복수를 위해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복수물과 계약물의 혼합 등 하나로 딱 잘라서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각하지도 못한 장르의 융합은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로판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어떠한 이유로 좋아하는 걸까? 그 이유 또한 천차만별일 것이다. 주인공의 사이다가 좋아서, 유럽풍 복식과 문화가 취향이라서, 혹은 판타지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 나 역시 이러한 요소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로판을 즐겨보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장르에만 존재하는 사랑의 형태 때문이다.
로판 역시 판타지 장르 중 하나이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세계관이 배경이다. 마법사와 드래곤이 등장하기도 하며 주인공의 빙의에 신이 개입하기도 한다.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 가미된 로맨스는 역시 평범하지 않다. 그저 사랑을 속삭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위해 목숨까지도 거는 사랑을 보여준다. 아마 이 또한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평생 겪어보지 못할 사랑일 것이다.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한 사랑과 천문학적 규모의 판타지가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엄청나다. 그 에너지에 끌려 로맨스 판타지에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로판의 입문이 조금이나마 쉬워졌기를 바란다. 제목에서부터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제목 뒤에는 문학으로 분류되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도 상당수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부터 천천히 로판의 세계로 빠져들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