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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1. 재매개된 사유의 다리, 혹은 카프카라는 기계로의 초대


 

성기현의 『들뢰즈 & 과타리 카프카 수업』은 들뢰즈와 과타리라는 난해한 철학자들과 카프카라는 문학적 심연 사이를 잇는 대담한 가교를 자처하는 책이다.

 

이 책은 들뢰즈와 과타리의 철학을 일반적인 교양 수준에서 소개하는 동시에, 카프카의 텍스트를 그들의 독특한 방식으로 정교하게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사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결코 쉬운 학자가 아니며, 카프카의 소설 역시 그 형이상학적 무게와 주인공이 겪는 반복적인 불안 때문에 독자의 진을 빼놓기로 유명하다.

 

이 책이 대중 친화적인 구어체로 쓰인 이유는 본래 그린비 아카데미에서 진행된 철학 강의를 정리한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타자들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걸면서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쉬운 언어를 선택한 것은, 후술할 책의 기획과 맞물려, 독특하면서도 매혹적인 지적 긴장감을 자아낸다. 

 

처음 이 책의 기획을 마주하며 느낀 감정은 당혹감과 감탄의 기묘한 공존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들뢰즈와 과타리의 원전인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를 병렬적으로 독해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시작부터 장벽에 부딪혔다. 원전은 이미 십수 년 전 번역된 이후 사실상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중고 시장에서는 책 상인들이 원가에 프리미엄을 붙여 거래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아니라면 국회도서관까지 가야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실재하는 원전이 아니라 저자의 강의를 통해 다시 가공된, 즉 재매개된 텍스트를 읽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물리적 거리감은 독자로서 상당한 당혹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출판사의 의지에는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잊혀가던 고전의 해석을 시대에 맞게 복원하여 다시 내놓으려는 노력이, 철학이 점점 불모지가 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귀한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2. 재현을 넘어 기계로 작동하는 카프카의 문학


 

책은 총 9강에 걸쳐 들뢰즈와 과타리가 기존의 카프카 해석을 둘러싼 신학적, 정신분석학적, 실존주의적 성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추적한다. 그들은 카프카를 체코인들 사이에 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언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해야 했던 유목민적 작가로 정의한다. 카프카는 독일어라는 다수자의 언어를 매끄럽게 수용하는 대신, 기이한 강도를 불어넣어 언어 자체를 낯설게 만듦으로써 문학의 새로운 경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카프카의 문학은 세계를 거울처럼 비추는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무언가를 생산하고 작동시키는 기계가 된다. 그들은 작품 속의 가족이나 직장 에피소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닫힌 틀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욕망이 즉각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관료적 장으로 넘어간다고 보며, 아버지를 법의 기원이 아닌 거대한 사회 기계의 말단 하수인으로 재정의한다.

 

카프카가 그려내는 공간과 서사 구조 역시 전통적인 유기적 통일체인 나무의 형상이 아니라, 어디서든 접속 가능하고 무한히 뻗어 나가는 리좀의 형태를 띤다. 『굴』이나 『성』, 혹은 『소송』의 법원 사무실들은 위계적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수평적으로 확장되는 네트워크이며, 모든 지점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촘촘한 억압의 기계 안에서도 지배 체제를 벗어나는 미세한 균열인 탈주선에 주목한다. 카프카의 세계가 폐쇄적인 악몽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언제나 체제의 절대성을 흔드는 생성적인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카프카의 서사는 명확한 결말로 수렴하지 않는 에피소드의 연속을 통해 독자가 텍스트와 능동적으로 접속하도록 유도하는 리좀적 글쓰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3. 문학 기계와 실존적 고통 사이의 긴장


 

들뢰즈와 과타리의 해석은 카프카를 읽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하며, 특히 문학을 기계로 정의함으로써 텍스트의 형식과 내용을 하나의 작동 원리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카프카가 자신의 원고를 읽으며 웃었다는 일화는 그의 문학이 비극이 아닌 희극적 분해에 가깝다는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이러한 예리한 통찰 뒤에는 필연적인 논리적 긴장이 남는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문학을 배치와 효과로 바꾸어 놓을 때, 개인이 실제로 경험하는 실존적인 고통의 질감이나 강박, 불안의 밀도는 기계적인 회로 아래로 휘발되어 버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카프카를 다수 언어 내부에서 혁명을 꿈꾸는 전쟁 기계로 격상시켰지만, 정작 그 기계 장치 사이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얼굴은 다소 무심하게 다뤄지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어쩌면 출구 없는 세계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인간의 지적 욕망이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내게 때로 카프카의 세계는 때로 탈주가 가능한 리좀이 아니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세계를 끝까지 응시해야만 하는 비극적 거울로 읽힌다. 결국 그들은 카프카를 체제 내부의 전쟁 기계로 격상시켰으나, 정작 그 기계 장치 사이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얼굴은 다소 무심하게 다뤄진다.

 

책을 읽는 내내, 카프카와 들뢰즈와 과타리가 사고를 깨는 도끼가 되는 것을 인지하는 내내,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찬사하는 '탈주선'이 누군가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낭만적 강요이자, 오히려 출구 없는 세계를 끝까지 견뎌내야 하는 주체의 '응시'를 가리는 가림막이 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기계적 작동 원리 너머에 남겨진 환원 불가능한 인간의 슬픔은 어떻게 대면하게 될 것인가. 재매개된 ‘카프카’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져주고 덮은 책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간다.

 

 

[들뢰즈&과타리 카프카 수업] 앞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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