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수니스트 유성권의 '생상스 바순 소나타 G장조'
근래 들어 퇴근 후 계속 여러 서점들을 돌아다녔다.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고 싶다는 욕구가 계속 차올랐기 때문이다. 올해 1년간 지박령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려고 붙들고 있었는데, 그게 잘 풀리지 않아 한 해 동안 내내 기획안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작가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만나게 되었다.
편지 형식의 소설은 겨울과 잘 어울린다.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쓰인 글에는 자연스럽게 그 대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묻어나는데, 겨울엔 유독 그런 감정이 더 짙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도 주인공 줄리엣과 그 주변 인물들이 편지를 통해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이야기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군대에 점령 당했던 건지 섬의 사람들이 작가 줄리엣과 소통하며 전개된다. 줄리엣은 이지 비커스태프라는 필명으로 칼럼을 쓰고 있는 작가이다. 건지섬 주민이자 문학회의 일원인 도시 애덤스는 찰스 램의 팬으로, <엘리아 수필 선집>에서 줄리엣의 이름을 발견하고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가 두 사람의 접점이 되어, 줄리엣은 돼지구이로부터 시작된 감자껍질파이 문학회 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소설의 모든 페이지가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전달되는 편지들은 2차 세계대전과 그 전후의 삶을 담고 있다. 전쟁 중 건지 섬의 사람들이 결성한 문학회와, 전쟁 이후 줄리엣과 주고받는 편지들은 극한의 상황 중에서 서로에게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치유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건지섬의 사람들은 줄리엣에게 보낼 편지로 당시 현장 상황을 재서술하며, 기억을 곱씹고 ‘어쩌면 이랬을지도 모른다’는 본인만의 해석을 얹기도 한다. 힘든 기억을 반추하며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참혹한 상황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데 좋은 영향을 준다. 일상의 상실과 내면의 상처를 글로 객관화하고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줄리엣과 문학회 사람들은 함께 성장한다.
전쟁과 문학, 어쩌면 가장 멀리 동떨어져 보이는 이 두 단어가 엮이는 이유를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극도로 힘든 상황에 놓일수록 사람들은 마음을 재건하기 위한 수단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가장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았다.
수확이 끝난 땅을 잠시 고요히 두고 숨을 고르듯, 험난한 상황을 헤쳐온 건지섬 사람들과 줄리엣에게 편지는 좋은 치유의 수단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나누는 인간성과 연대의식 속에서, 돼지구이 파티라는 시작점에서 이어진 문학회가 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서점
연말의 서점들에는 크리스마스 이미지를 담은 엽서와 편지지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다 읽고 새 책을 찾으러 서점에 들른 어느 날, 불현듯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메모장을 켜 편지를 보낼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내내 붙들고 있던 기획안을 잠깐 접어두고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다. 올 한 해 크고 작은 각자의 시련들을 견뎠을 것이고, 그 시기를 지나기 위해 서로 만나 웃으며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연말부터 내년 초까지 땅을 한 번 고르는 시기를 보낼 사람들과 나를 위해 편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새 책과 편지지를 함께 구매했다. 이 편지가 또 다시 시작될 한 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