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은 그저 모여 그들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놀이를 시작했다. 마치 바둑을 두고 고스톱을 치듯, 재판을 하고 피고의 죄를 발굴한다. 까마귀를 닮은 그들에게 경계심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왜 때문일까.
트랩이라는 제목을 의식해 잔뜩 경계하지만, 사실 덫은 나 자신뿐이었다.
행복하다고 말하던 트랍스는 목을 매달았다.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걸까. 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욕망이 낯설었던걸까. 사실 털어보면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어쩌면 트랍스는 인간을 너무 고귀하고 윤리적인 존재라고. 그렇게 높은 기준을 두었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결백한 무죄를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두에게 먼지가 나온다면, 모두가 죄인이라면, 곧 모두가 판사이다. 그러니까 트랩의 만찬에서 중립을 지키는 (지켜야하는) 판사는 없듯이, 정말 그렇다. 판사도 변호사도 피고도 사형집행사도 모두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저 죄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죄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겠다. 마치 양자역학처럼 관찰하는 순간 결정된다.
트랍스는 자신의 죄를 쳐다보았고 사형을 집행했고 그건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샤토 마고 한 잔을 빼놓을 수 없다. 향연이자 재판(Garicht)인 저녁 식사에서 그들은 모두 (시모네 제외) 취해있었다. 까마귀를 닮은 네 명의 친구들은 처음부터 빨간 코였다. 다섯가지의 메인요리와 페어링되는 와인들. 마실수록 사형을 갈구하는 트랍스. 짙어져가는 알코올 농도와 유쾌함. 빨간 와인 그리고 하얀 시모네는 이 극의 정점을 찍어준다.
화려한 스포츠카를 모는 것처럼, 트랍스는 질주하듯 삶을 몰았고. 목을 매단것은 어쩌면 음주 운전의 결과. 그것도 아니라면 다가오는 맨정신이라는 숙취, 정확히는 직시해야할 나 자신에게서의 회피였겠다. 그리고 집주인이자 판사는 축 늘어진 트랍스를 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유를 묻는다. 그 순간 또 다른 재판이 하늘에서 쿵 떨어져 네 명의 노인들을 에워싼다.
무너진 사람, 무너진 사회, 무너진 선과 악. 붕괴된 세상 속에서 어쩌다 마주친 향연 재판은 행운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내면을 꺼내보게 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보지 않을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노인들이 그러했듯, 트랍스도 그저 하룻밤의 놀이이자 묵직한 성찰로 여겼더라면. 혹은 좀 더 건설적인 방법으로의 사형(새로 거듭남)을 집행할 수 있었더라면. 축 쳐진 트랍스을 보자 안쓰러움이 하염없이 솟구친다.
인간의 삶에서 노동이 갖는 의미, 술과 음식의 동행, 휘청대는 규칙들과 허우적대는 마음들. 뒤엉킨 욕망과 은은한 애정. 유쾌함 속에서 피어나는 따스한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내 안의 트랩이 나도 모르게 뚝딱뚝딱 생겨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내 안을 감시하고 경비해야 한다.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건 용기가 필요하다. 내 안의 것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고 개선하는 연습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