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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불편함 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것 [문화 전반]

종이를 읽는 행위

by 오수민 에디터
2025.10.09 07:14

 

 

전자책의 시대다.

  

이제 클릭 몇 번이면 수백 권의 책을 주머니에 담을 수 있다.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카페 한편에서,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을 열면 바로 독서가 시작된다. 원하는 구절은 검색으로 찾아내고, 마음에 드는 문장은 캡처해 이미지로 저장한다.

 

기술이 열어준 편리함 속에서 종이책은 종종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무겁고, 부피를 차지하며, 환경을 해친다는 인상까지 더해진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종이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종이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서는 것 같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 책장을 넘길 때의 미묘한 마찰, 문장을 따라 흘러가는 시선 위에 함께 흐르는 시간은 모두 독서의 일부다.

 

전자책에서는 엄지손가락을 튕기듯 화면을 넘기는 행위가 전부지만, 종이책의 물성이 주는 감각이 깊은 몰입을 끌어낸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의 몸과 책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리듬을 공유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종이책은 기록하는 존재로 거듭하게 만든다. 책장을 따라가며 좋아하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연필로 짧은 감상을 적는다. 그리고 페이지 옆에는 인덱스를 붙여 생각이 날 때마다 책을 펼치게 만든다.

 

종종 벅차게 해당 페이지가 좋아지면 노트에 그 구절을 필사하며, 나는 주인공이 되기도, 작가가 되기도 한다. 종이에 남는 연필 가루와 짙은 나의 필기체가 번지지 않도록 살살 쓸어내리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그 촉감이 오래 남는다.

 

이러한 흔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큰 힘을 가진다.

 

수년 전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종이에 남아 있는 밑줄과 메모는 단순한 텍스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대화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때의 내가 어떤 문장에 머물렀는지, 어떤 생각을 곁들였는지를 읽으며 나는 내 안의 변화를 확인한다. 그렇게 종이책은 나를 대변하는 가장 사적인 일기장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책장에 꽂힌 실물의 무게는 나의 취향과 사유의 무게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남기는 증거다. 나는 이런 책들을 읽고, 이 문장들 속에서 살아왔다. 책장에 쌓아 올린 풍경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한 부분을 드러낸다.

 

책장은 점점 두꺼운 나의 기억으로 채워진다.

 

책등 사이로 삐져나온 인덱스가 나의 시간을 알록달록하게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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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여전히 종이를 읽는다.

  

페이지를 넘길 때의 사각거림, 손끝에 스치는 종이의 냄새, 활자와 함께 흘러가는 시간이 좋다. 전자책이 빠르고 가볍게 지식을 습득하게 해준다면, 종이책은 천천히 생각을 각인하며 삶 속에 녹아든다. 불편함 속에서 얻는 기쁨, 그 고유한 경험이 종이책의 존재 이유다.

 

전자책이 제공하는 효율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이 단순한 ‘소비’에 그치지 않고 나의 기억과 감각 속에 오래도록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종이책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하다. 그것은 조금 무겁고, 불편하고, 느리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책과 나 사이의 관계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책장을 넘긴다.

 

한 장씩, 나의 시간을 넘기듯, 한 권의 세계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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