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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제 28회 서울세계무용축제는 범지구적 현상으로서의 정치 양극화와 민주주의 후퇴를 지적하는 예술만의 언어를 드러내고자 '광란의 유턴'을 테마로 이번 축제를 기획했음을 밝혔다. 축제에 초청된 여러 작품들 중 이스라엘의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이 선보인 작품 <폐허>는 단순히 이스라엘 팀 초청이 야기한 정치적 논란을 넘어 예술과 정치의 역학관계에 대한 성찰을 제공함으로써 공연 전부터 곳곳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과 집단 학살, 팔레스타인 토착민에 대한 추방과 고립화라는 정치적 문제 아래 안무가 하랄 베하리의 공연 취소와 국내 예술가들의 보이콧 서명 운동이 진행됐다. 한편 이종호 시댄스 예술감독은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은 민간단체이며 단순히 이스라엘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물론 축제 사무국은 무용단 초청과는 별개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의 항공비 지원을 반환하는 등 이스라엘 측의 후원 기금과 무관함을 설명했다.

 

<폐허>의 작품 소개에 따르면 안무가 오를리 포르탈은 해당 공연을 통해 모든 것을 파괴한 전쟁의 폐허와 그 속에서 태어나는 평화와 자유의 희망, 무용수들의 동작과 소리를 통한 치유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어느 교수는 그와 같은 공존과 화해의 레토릭이 아트워싱 혹은 이스라엘의 전범국가 이미지에 대한 윤색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과연 그들의 무용 예술이 그러한 맥락에 국한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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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권력 비대칭은 분명하다. 팔레스타인은 분할된 자치와 자원, 철저한 고립 속에서 숨 쉬는 존재이며 국제사회는 이미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대와 점령 등을 불법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대칭은 <폐허>에서도 드러난다. 무대 위 남녀의 성비, 적막 속에서 노래하며 목소리를 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홀로 춤추는 한 명의 무용수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는 다섯 명의 무용수들. 특히 두 명의 여성 무용수가 서로를 마주 보며 번갈아 노래하다 마지막 순간에 관객을 보며 함께 소리치는 순간에, 관객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만이 강렬하게 진동하는 순간에 비대칭은 관객과 무용수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내가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폐허를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언론이 말하는 집단 학살의 현장을 숫자로만 접했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은 한 명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고 모두가 땅에 쓰러진다.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모두가 쓰러질 수밖에 없는 순간에 분쟁의 책임은 오직 이스라엘의 것으로 환원되어야 하는가? 상대보다 쓰러진 사람의 숫자가 적다고 해서 더 많이 쓰러진 우리가 반드시 정의가 될 수는 없다. 2005년 체결한 양국의 정전 협정을 무시한 하마스의 이스라엘 정착촌 폭격과 민간인 학살은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와 다르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고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반한 그들의 행정은 내부의 비판과 자성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는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 자유도 평가에서 드러난다.

 

<폐허>는 전체적으로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작품이다. 무용수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바꾸며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무대 위의 모든 무용수가 쓰러져 한데 얽혀 있는 모습이 하나의 무덤을 연상시킬 때, 그 앞에서 홀로 춤추는 오를리 포르탈의 모습은 형용하기 어려운 정체성이다. 이때 "무용의 의미와 가치는 표현하는 신체에 예술적 성질을 투합하는 것이다. 예술적 성질이 투합된 신체는 육체의 물질성을 넘어서 정신적인 내용, 이념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신체는 매 순간 사회와의 다양한 관계 및 상황 속에서 다시금 조직되고 정의되는 불확정적인 존재이며, 직면한 현실을 예술의 형태로 정리한다."(최문정. (2021). 코로나 시대, 무용예술의 본질에 대한 고찰.)

 

그와 같은 불확정적 존재인 개인에게 어디까지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그 한계는 또 어디인가. 개인 아티스트에 대한 보이콧이 아니라 그 내용과 구성이 축제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점을 비판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째서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의 예술 전체가 특정한 정치적 기호로 환원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다.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해 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표사진)עותק של _יוסי צבקר photo by. Yossi Zwecker_.jpg

 

 

무용수들의 일련의 동작은 디아스포라와 시오니즘적인 관점에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폐허 속의 희망, 공존과 치유의 메지로 수용될 수도 있다. 만일 그것이 비열하고 가증스러운 레토릭을 통해 전범 행위와 그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동시에 그러한 주장 자체가 하마스의 전쟁 범죄를 흐리게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가 정당화될 수 없으며 더욱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지점을 초월하여 그 반대편에서 논의되는 자성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내부의 비폭력, 문화예술적 저항은 이스라엘의 그것만큼이나 국제적으로 주목받아야 하며, 하마스의 인권 유린과 부정부패 아래 민중의 목소리가 억압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에 그들의 현실은 예술이 아니더라도 그 어떠한 행태로든 드러나야만 한다.

 

<폐허>의 메시지는 공허한 목소리이자 폐허가 된 땅을 맴도는 침묵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들은 종교적 신화가 정치적 현실이 될 수 있는지, 타민족의 자결권을 박탈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시편 132:13-14절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로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한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라고 말한다. 과연 오늘날의 예루살렘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원한 쉴 곳은 이토록 많은 죽음 위에서 세워지는가.

 

그럼에도 그러한 역사 속에서 태어난 개인의 예술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예술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탈정치적일 수 없으나 동시에 특정 진영만의 목소리가 될 수도 없다. 설사 작품이 그러한 의도로 창작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감상자에게 귀착될 때 예술은 이미 예술가의 주체적 의지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무엇이다. <폐허>가 이스라엘의 학살과 불법 점령에 대한 아트워싱의 레토릭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무용수들의 신음과 몸짓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순간을 관람했다. 그들의 무용은 외부로 발산하는 것이 아닌 내부로의 침잠과도 같았다. 구태여 동일한 대목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노래한 것은 호소라기보다 절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개인의 예술이 자신을 반성하는 일은 정치적 맥락과 독립적이다. 예술이 다른 누군가를 반성시키고자 하지 않고 다만 그 자신을 반성할 때 폐허 속의 침묵이 무너진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절망」,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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